한 소년을 만났다. 그 언젠가 우주를 떠돌았던 어린 왕자처럼, 깊은 눈을 지닌 너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나의 곁에 다가섰다. 별도 달도 없었지만, 어쩐지 눈이 부시도록 해사한 너의 손 아래 그곳 안에서 나는 네 손길로 인해 회귀했다. 변함없는 밤. 그 한 가운데, 꿈결을 헤매이다. 어린 왕자 학연은 그 자리에서 미동없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빛이 바래어 희미한 색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정지된 허공 속에서 흩날리듯 나부꼈다. 참으로 묘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그리운, 아릿한 무언가가 제 가슴을 찌르고 들었다. 소년과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더는 다가갈 수 없는 환상의 그것처럼, 이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머뭇거리듯 입술을 깔닥이다, 이내 소년에게 서툰 말을 건네었다.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켄. …… 켄…. 원래 이름은 이재환이야. 다만, 이곳에서의 이름이 켄일 뿐이지. 묘한 내용의 말을 하며 켄, 아니. 재환은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궁금해, 학연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재환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온통 어둠에 물든 곳에서 홀로 빛나는. 그것은, 다름 아닌 푸른색 장미꽃이었다. 학연은 저도 모르게 옅은 숨을 삼키었다. 그리고는, 어쩌면 저 장미도 재환의 곁에 있기에 빛이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말없이 장미꽃을 쓰다듬던 재환의 깊은 눈이 학연에게 닿았다. 가무잡잡하고 조그만 얼굴이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올려다 보던 재환의 입술은, 여전히 불필요한 말을 담지 않고 그저 일자로 꾹 다물려져 있었다. 시간의 틈이 갈라지고, 그제서야 학연의 입술이 벌어진다. 조금은 늦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여기가, 어디야? 여기? 응. 내 우주. 간단명료하지. 재환의 입술 끝을 타고 흐르는 나른한 음성에, 학연은 멍한 눈꺼풀을 꿈쩍이며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그래, 너의 우주. 시리도록 아름다운, 네 세상. 이것은 분명 나의 꿈. 그 중심일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아. 너의 세상. 그래, 너의 바다가 맞는 것 같다. 재환의 손바닥 위에는, 그러니까, 자신의 약지 손가락만한 푸른색 장미꽃이 들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이 똑 하고 떨어져 그의 바짓단을 적실 것 같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장미는 메말라 일말의 수분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학연은 다시금 삐걱이는 입을 움직여 재환에게 물었다. 너의 우주에, 내가 있어? 너의 우주에, 왜, 내가 있어. 어째서인지, 중간의 단어 하나는 학연의 목구멍을 거치지 않았다. 약에 취한 느낌이었다. 까맣고, 하얀 안개가 주위를 감싸고 있다. 확신을 얻고 싶었다. 왜. 왜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이것이 꿈이던, 너의 우주이던. 이곳에 내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맞겠지. 그런 거겠지. 너무나 그리운 기분이 들어. 그 깊은 눈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네 세상에. ……. 내가, 있어? 대답이 두려워, 조악한 목구멍을 닫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태양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아아, 아마도. 네가 태양이기 때문은 아닐까. 재환이 몸을 일으켰다. 일어 선 그의 발치로, 여러 조각의 환상이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유리 조각과도 같아서, 학연의 슬픔을 온전히 담아냈다. 내 우주. ……. 그 안에, 너와 나. …….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지. 네 숨결이 나에게 닿았고, 나의 목소리가 너에게 닿은 이상. 그 말을 끝으로, 재환의 푸른 장미가 학연의 가슴 속에 놓여졌다. 시린 꽃잎의 뒤로, 물방울이 알알이 맺혀 응어리를 적셨다. 거짓말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학연은 불안해졌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사라져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빈 틈을 무엇으로 메꾸며, 이 그리움을 어떻게 견딜까. 너는, 재환아. 나에게 무어길래. 나의 우주는, 곧, 학연이 너야. ……. 우리 둘 뿐이야. …… 너의, 우주. 너의, 바다가. 너와 나의 손이 맞물린다. 안녕.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도록. 나의 우주에 온 것을 환영해. 마지막으로, 너의 음성이 나의 귓가를 맴돌았다. 학연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간절하게, 이 꿈이, 깨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우리의 세상, 우리의 바다에서. - 재환이에게 학연이가, 그리고 학연이에게 재환이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우주와 바다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