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을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죠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무지개를 볼 수 없어요
노을 지는 유치원 담장 밖으로 달려가 엄마의 손을 잡는다. 오늘은 우리 여주가 어떤 걸 배웠을까. 고사리손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의 질문에 활짝 웃으며 눈을 접는다.
- ‘으응-, 오늘은 좋아해요.’
- ‘좋아해요?’
- ‘친구한테도 말했어요.’
- ‘그랬더니 마음이 어땠어?’
바람개비 언덕에서 불어오는 여름 향기, 말아 쥔 손가락으로 왼쪽 마음을 톡톡 두드린다.
- ‘예뻐요.’
이제 다른 친구에게도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을 좋아해요.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6 <내 마음이 들리나요>
‘좋아해 줘’
#21.
아이스크림은 감기 걸려서 안 돼. 학교 복도를 따라 졸래졸래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는 쏟아지는 청천벽력에 울상을 지었다. 원래 여름은 질병이 농후한 계절이라서 괜찮아. 태초부터 그랬어. 자판기 앞에서 ‘블랙커피’ 버튼을 신나게 누르며 다시 꼬리를 흔든다. 그래 봤자 무심한 고양이는 관심도 없지만.
- “메로나 두 개.”
- “감기 심해져.”
- “콧물밖에 안 나는데?”
- “그게 문제야.”
- “그럼 소원으로 퉁치자. 원래 모의고사 잘 보면 소원 아무거나 들어준다고 했잖아.”
- “영어만 잘 봤잖아.”
- “우린 영어가 전부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몰라?”
- “요즘은 중국어.”
그는 따뜻한 우유가 담긴 종이컵을 내 입술 사이에 물려주고는 눈을 찡긋거렸다. 아아, 당최 한 마디를 져주지 않는 이지훈이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내가 진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오늘은 꼭 하고 말리라.
- “이지훈, 사람이 그렇게 퍽퍽…….”
- “하나만 사서 나눠 먹든가.”
- “지금 갈까?”
- “갑자기 기분 좋아졌네.”
-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내가 먹는 걸로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아니야.”
- “알겠어.”
- “진짜야.”
- “알겠다고.”
일단 앞에 좀 보자. 그는 줄곧 자신을 바라보는 날 품 안으로 가볍게 당겼다. 등 뒤에서 불쑥 열리는 도서관 문이 그 원인이었다. 숨을 참는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양이는 곧 멀찍이 떨어지며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어째 아무렇지도 않니. 난 당장 씽씽 에어컨이 필요한데.
- “같이 가.”
- “빨리 와.”
- “네가 천천히 가면 되지.”
- “네가 빨리 오면 되잖아.”
말은 저렇게 해도 마지막 계단에서 두 발을 떼지 않는 그였다. 왜 이리도 언행 불일치를 사랑하시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는 게 그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심각히 고민을 해봐야겠다.
- “오늘 보충 있어?”
- “아니, 내일.”
- “그럼 우리 집에서 오답풀이 할래? 너한테 물어볼 거 많아.”
- “그래도 돼?”
- “오늘 엄마 없는 날.”
- “되게 기다린 것처럼 말하네.”
- “뭐야, 들킨 거야?”
- “어, 완전 들킨 거야.”
내 말투까지 쏙 빼닮은 목소리에 한 번, 귓바퀴가 빨갛게 물든 귀여움에 두 번, 내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귀를 매만지는 모션에 세 번. 눈을 마주치자 누가 봐도 어색한 웃음으로 때우려는 부끄러움이 오늘의 결정타. 그래, 나만 씽씽 에어컨이 필요한 게 아니지.
- “웬만하면 칫솔도 좀 챙겨 와.”
- “왜.”
- “공부하다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
- “공부하다가 칫솔을 왜 찾아.”
- “가끔 그럴 때가 있어.”
- “서로 접점 관계가 없지 않나.”
- “네가 어떻게 확신하는데.”
- “도대체 뭘 상상한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 아니니. 그가 입가에 잠든 보조개를 쏙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적잖은 당황함에 코를 훔치며 별관 옆 매점 안으로 들어가자, 동그란 뒤통수가 뻘뻘 땀을 흘렸다. 비밀 거래라도 하는 것인지, 매점 주인과 그의 대화는 거의 음소거 직전이었다.
- “학생, 뭐라고?”
- “……칫솔이요.”
- “왜 그렇게 작게 말하는겨?
- ”원래 제 목소리인데요.”
- “가만, 이제 보니께 저번에 하나 사가지 않았남? 그 누구여, 눈 큰 학생 거시기랑?”
- “……하나 주세요, 빨리.”
NPC와 아이템을 거래하듯, 속전속결 막힘 없이 교복 주머니에 칫솔을 박아 넣는다. 흠흠, 목소리로 기척을 내면 곧바로 뒤를 돌아 아무 일 없었다는 평온한 얼굴이 드리워지고. 지금 표정 관리 하시나 봐요. 이건 뭐, 너무 쉽잖아.
- “아저씨, 저도 주세요.”
- “학생도 칫솔 줘?”
- “네? 칫솔이요? 전 메로나 말한 건데요?”
만렙인 줄 알았던 기사단 이지훈은 지폐 한 장을 내 손에 구겨 넣고는 말없이 매점을 빠져나갔다.
- “……메로나 네가 사와.”
아주 귀여운 목소리는 덤이었고.
#22.
어느덧 해가 기운 시각이었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에는 어질러진 문제집과 지우개 가루가 선명했다. 깜빡깜빡,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뻐근한 기지개를 켰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연필을 사각거리던 게 대충 다섯 시 정도였는데, 땅거미가 짙어지는 걸로 보아 최소 한 시간은 이 상태로 뻗어 있었다는 얘기였다. 몸을 뒤덮은 담요를 걷어내고 주변을 살폈다. 우리 집, 장식용 액자, 꺼진 TV, 그리고…….
곤히 자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애기다, 애기. 흐드러진 머리칼 사이에 예쁜 눈꼬리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곧게 뻗은 콧대를 지나 말캉해 보이는 입술에 시선을 빼앗기면 활활 타오르는 두 볼. 손 부채질이 날로 늘어간다. 흡사 남의 집 귀한 아들을 뺏으러 몰래 잠입한 도둑 같은 느낌이랄까.
- “착한 생각 하자, 착한 생각.”
난 그냥 사람을 보고 있을 뿐이야. 아니, 조금 귀여운 사람을…… 내가 많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뿐이니까. 그래, 단지 이것뿐이야.
그 뭐야, ‘플랑크톤 러브’ 있잖아.
난 그런 정신적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플라토닉’인가? 아무튼.
- “속눈썹 길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넌 아기 도깨비 같아. 저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에 귀여운 뿔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날 미소 짓게 해.
지훈아, 우리 지금 되게 가까운 거 알아? 만약 내가 후-, 숨을 불면 네 머리칼이 작게 흩날릴 것 같아. 그래, 난 그냥 이렇게 좀 더 가까이 널 보고 싶었어. 절대 매끄러워 보이는 볼을 만지고 싶다거나, 안에 숨어있는 보조개를 콕콕 눌러보고 싶다거나…….
- “……예쁘다.”
우리의 여름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됐는데, 네 입술은 여전히 봄이야. 벚꽃 같은 네 입술을 대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아마도 다홍과 분홍, 그 사이?
아니면, 그냥 벚꽃색?
그것도 아니면…….
- “……지훈이 색.”
예쁘다. 너무 예뻐서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을 네 색으로 물들이고 싶어. 그리고 그건 영원히 나만 보고 싶은데…… 방금 너무 집착한 건 아닐까. 맞아, 이러면 안 돼.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 후-, 뱉어본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아이는 결국 마음을 어지럽힌다.
- “나, 네가 좋아.”
내 등교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네가.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살며시 웃는 네가.
점심시간마다 내 주변을 서성거리는 네가.
비가 오는 날이면 무심히 우산을 건네주는 네가.
그런 너를…….
- “……정말 좋아해.”
아, 고백해버렸다.
뒤늦게 입술을 막지만 금세 폭 튀어나오는 헛파람.
그의 눈꺼풀에 닿은 빛의 어스름을 가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뉘었다.
- “지훈아, 있잖아…….”
- “나도.”
그렇게나 어루만지고 싶다던 보조개 한 쌍이 수줍게 인사한다. 말도 안 돼. 뭐야. 뭔데. 꼬리를 살살 흔들던 강아지는 멀뚱히 눈을 굴린다. 고양이의 돌발 기상이었다. 웃을 듯 말 듯 곡선을 그리는 입꼬리. 장비 없이 달에 착륙한 우주 미아는 허겁지겁 숨을 참는다. 지구의 모든 기체는 내 앞에 있는 예민한 고양이가 다 마셔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 “혼자 뭐해.”
- “……어?”
- “소곤거리니까 간지러워.”
- “들었어?”
- “아니.”
- “뭐를?”
- “몰라.”
……와, 들었네 다 들었어. 이건 백퍼야. 망했어. 이번 생은 진짜 망했나 봐. 질끈 눈을 감고 과거의 나를 질타한다. 이래서 속마음이 있는 거야. 김여주, 대뇌를 거치라고. 아무 말이나 막 뱉으라고 있는 입술이 아니라니까.
- “근데…….”
- “…….”
- “아까 했던 말 다시 듣고 싶어.”
아아, 그런 눈으로 웃어버리면 다 말하고 싶어지잖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나른함을 한껏 보이던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닿는다.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도 아닌데 두근거림이 느껴져. 망했어. 세상 모든 신이시여, 제발 이 아이의 기억을 없애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또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야 한단 말입니다.
- “아, 내일 영화 보러 가자고.”
- “아닌데.”
- “맞아, 이거.”
- “아닌데, 이거.”
말꼬리가 길어졌다. 그가 장난을 칠 때면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생떼도 아니고 애교도 아닌 것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오늘이야말로 ‘이지훈 화법’에 제대로 당하는 날이구나. 가까운 거리에서 오물조물 움직이는 입술이 내 이름을 부른다. 김여주, 뭐하는데. 젠장, 정말 제대로 잡혔다. 머리를 굴려라 김여주. 제발.
아니, 솔직히 생각을 좀 해봐. ‘좋아해’ 이런 명백한 단어를 어떻게 둘러대냐고. 비슷한 발음도 없……
진 않지.
- “조화.”
- “조화?”
- “응, 조화 키워보고 싶어서 혼잣말 했어.”
- “갑자기.”
- “응, 갑자기.”
- “내 얼굴 보고.”
- “내가 또 꽃에 관심이 많잖아.”
- “처음 들어봐.”
- “아니야, 너 들어봤어.”
김여주, 나이스. 역시 헛공부한 게 아니야. 이제야 시원스레 웃어보는 나였다. 원하는 대답은커녕 대화에 말린 그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해보라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부연 설명은 당연히 해줘야지.
- “요즘은 생화가 유행이긴 한데, 조화 소비자도 꽤 많이 있어. 그중에 하나가 나야.”
- “그래?”
- “응, 이게 전부.”
- “그 말 하려고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구나.”
그제야 깨달은 엄청난 사실 하나. 진득한 입술로 바람을 불면 그의 머리칼이 춤을 추는,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 “그랬구나.”
- “……응.”
- “혼자 중얼중얼도 하고.”
- “……응?”
당장 도망쳐야 했다. 본능적인 사이렌이었다. 슬쩍 엉덩이를 빼며 달려나갈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예민하고 예민한 그는 이를 놓치지 않고 팔을 덥석 붙잡았다. 상대방 품에 스러지듯 안겨버린 나. 멍하니 눈만 굴리며 또다시 숨을 멈추는 우주 미아다. 오늘부터 숨 안 쉬고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할 지경이었다.
- “추워.”
- “더워.”
- “계속 이러고 있을까.”
- “장난치지 마.”
- “장난 아닌데.”
살포시 담요를 덮는다. 냉기를 차단해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여름날 이지훈의 명언이었다. 묘한 기류에 반사적으로 열을 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번 내 병명은 ‘이지훈으로 인한 미열’이었다.
- “따뜻하지.”
- “덥다니까…….”
- “감기 걸리면 이렇게 있어야 해.”
- “이제 감기 아니야…….”
- “그럼 뭔데.”
그럼 뭔데요. 허리에 팔을 감고 칭얼대듯 종알댄다. 어린아이가 조르듯 좌우로 몸을 흔들며 귀엽게 웃던 그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훑는다. 평소와 같지만 평소와 다르다. 뭐랄까, 이건 약간…….
- “보지 마.”
- “그럼 누구 봐.”
- “문제집.”
- “그럼 이제부터 네가 문제집 해.”
내 이마에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부딪친다. 닿을 듯 말 듯 한 간격에 삐걱거리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향기 좋다. 오똑한 코끝이 머리칼에 맞닿는다. 바보, 난 네 향기 때문에 자꾸만 눈이 감겨 오는데.
- “왜 나 안 봐.”
지금 느끼는 감정은 딱 하나.
계속 네가 날 안아줬으면 좋겠어.
- “무슨 생각해.”
이렇게 안겨 있기만 해도 너무 포근해. 얼굴을 살짝만 틀어도 바로 닿을 거리에서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 그의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지 오래,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안 돼, 이상한 생각 들기 전에 지금 벗어나야 해.
그때부터였나요.
내가 정신을 놓았던 게.
- “집에서 영화 보고 갈래?”
- “여기서?”
- “응, 너만 좋으면.”
블루레이 많은데. 반지의 제왕 빼고. 허리 부근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곰곰이 생각할 때마다 건반을 연주하듯 손을 움직이는 그의 버릇은 매우 위험했다.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 “아니면 영화관 가도 되고.”
- “재밌는 거 있어?”
- “좋아하는 장르를 말해주면…….”
움직임을 멈춘 손가락은 더욱더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윽고 들려온 대답은 내 모든 것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 “좋아해 줘.”
눈꼬리가 살랑거렸다. 내게 다가왔던 그 날의 너처럼.
지훈아, 내가 널 좋아해. 잠든 네가 아니라 지금 날 보고 있는 네게 꼭 말해주고 싶어.
지훈아, 있잖아…… 내가…….
- “영화 ’좋아해 줘’ 보고 싶다고.”
- “……응?”
- “얼굴 왜 이렇게 빨개.”
이쯤 되면 눈치껏 다들 알아챘으리라. 최근 극장에서 재개봉한 작품들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는데,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좋아해 줘’도 같은 루트였다. 옅게 웃는 그가 얄미워 눈을 흘긴다. 참고로 얼굴이 빨개진 건 백만 년 전이야. 당장 지금 때문만은 아니라고.
- “덥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 “사과 같다.”
- “강조 하지 마.”
- “난 추워.”
몸을 밀착시키며 담요를 파고들던 고양이는 뾰로통한 내 입술을 앞발로 콕 두드리며 눈꼬리를 접는다. 쿵쿵 뛰는 심장은 두 개. 하나는 내 꺼. 또 다른 하나는…….
- “귀여워, 진짜.”
우리 지훈이 꺼.
Epilogue.
우리 이제 일어날까? 진짜 더워서 그래. 헛기침을 연발하며 뒤로 몸을 빼면 의외로 쉽게 풀어주는 분홍가지. 멀뚱히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참 뭐랄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의 표본이랄까. 조금 전까지 그렇게 야릇했던 사람이 어찌 이리 변할 수 있는지. 꼭 나만 이상한 사람 같잖아.
- “창문 열어 줄게.”
- “아니야, 괜찮아.”
- “여기 열면 되나.”
- “추워!”
- “뭐?”
- “춥다고!”
귀찮음의 선봉자는 집에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저번 주에 입은 교복 셔츠와 치마를 베란다에 던져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어디 교복뿐이겠는가, 짜장면을 먹은 파자마와 엽떡을 먹은 후줄근한 티셔츠도 세탁기 옆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딱하다가는 그와 함께 흩뿌려진 교복과 참혹한 실상을 보게 생겼다는 말이다.
- “소리는 왜 질러.”
- “내가 언제!”
- “지금도.”
- “아니야!”
날 봐, 얼마나 침착해! 전혀 침착하지 않은 손길은 그의 티셔츠 끝을 주욱-, 늘어트린다. 질긴 것이 꼭 문방구 젤리 같기도 했다.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움직인다. 지훈아, 내 마음이 들리니.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앉아줘. 넌 가만히 있을 때가 제일 예뻐. 부탁이야.
- “아까는 덥다며.”
- “이제 안 더워.”
- “핫팩 줄까.”
- “더워.”
- “그러니까.”
더운데 왜 창문을 열지 못하니. 흡사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문장과 비슷했다. 제2차 고비가 왔다. 조화로 둘러댄 첫 번째 난관을 겨우 지나쳤다 생각했는데. 여주야, 천천히 생각해보자.
- ‘으응-, 뒤집어서 벗은 교복이 있어.’
미쳤어.
- ‘베란다에 화분들이 너무 많아.’
안 돼, 쟤 분명히 구경하자고 말한다.
- ‘곰…… 곰이 있어.’
……그냥 말을 하지 마.
- “말을 해.”
- “…….”
- “그냥 연다.”
이지훈은 가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부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찾아서 일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해결을 봐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창틀 사이로 반쯤 감긴 커튼을 헤치고 창문을 꼭 열어야겠다는 저 강한 의지를 봐. 그는 티셔츠가 늘어지든 말든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아아, 몰라. 그냥 해.
- "어어! 속옷! 그래, 속옷이 있어!”
- “…….”
- “아주 많이 걸어 놨어. 보면 아주 놀랄 텐데.”
- “…….”
- “하하 참…….”
……하아. 그냥 교복 던져놨다고 사실대로 말할 걸 그랬다.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우리 여주 얼만큼 먹었어요?’ 물어보면, ‘이따 만큼 먹었어요’ 할 때의 동작처럼 팔로 원을 크게 그리며 어필했다. 구겨진 티셔츠에 잠시 시선을 두던 그가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다. 까만 유리구슬에 담긴 새빨간 사과.
- “옷 말고 손 잡아도 돼.”
- “응?”
- "내 손 잡아도 된다고.”
- “뭐야, 손목 잡는 것도 아프다면서. 언제는 교복 주머니 타령하더니.”
- “그땐 널 몰랐잖아.”
- “지금은 날 잘 알아?”
- “어, 부승관보다 많이.”
- “승관이, 오늘 또 자기만 빼고 놀았다고 화내겠다.”
- “이게 화낼 거리는 아니지.”
- “충분해. 걘 이런 걸로 화내거든.”
그가 소파에 앉아 내 어깨에 둥근 머리를 기댄다. 곧 포개어지는 두 손. 익숙하지 않음에도 이질감이 없다. 발그레해지는 두 볼이 말한다. 여태 기다려 왔다고.
- “내일도 잡을까.”
- “…….”
- “네 손.”
만약 멀쩡한 테라스를 가졌더라면, 난 이 자리에서 창문이란 창문 모조리 열어놓았을 것이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실력이 거의 프로급이다. 하루에 롤러코스터만 몇 번을 타는 건지 모르겠다. 시속 300은 거뜬해 보인다.
- “계속 잡고 싶다는 말이야.”
- “…….”
- “넌 왜 아무 말도 안 해.”
가까워도 너무 가깝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훑는 시선이 뜨겁다. ‘김수한무’를 외치던 어느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심경이 바로 이런 느낌이었을까.
- “내일도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 “…….”
- “욕심 조금 더 보태서 매일매일.”
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마디가 간지러워 참아내야만 했다. 좋아하는 멜로디가 귓가에 닿으며 소곤거렸다. 왜 나만 고백해. 반칙이야.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에 비로소 눈을 맞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예쁜 눈,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 그리고 달아오르는 내 마음.
- “난 예전부터 그랬는데.”
- “…….”
- “지금 네가 말하는 거 모두.”
예쁜 보조개를 피워내는 그를 마주했을 때, 더는 ‘이지훈과 친구로 지내보기’ 지침서가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고백은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그런 한 장면이었다.
- “매일 보고 싶어.”
……
- “내가 널 방울 해서.”
모두가 별을 노래하는 그날, 난 짐작 할 수 있었다.
내 작은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듣는 순간, 수많은 투명한 비눗방울이 하늘에서 별처럼 쏟아지지 않았을까.
- “나도.”
……
- “방울방울 해, 너.”
Calling |
- “여보세요, 끊습니다.” - “부우-.” - “예, 수신 불안정이요.” - “말도 안 꺼냈거든.” - “응, 말하지 말라는 겨.” - “너, 방울방울이 뭔 줄 알아? 알려줄까? 응? 막 궁금하지 않아?” - “오락실 게임아니냐? 포도 새끼 못 먹으면 죽는 궁극의 문명 전.” - “진짜 넌 왜 그럴까.” - “아, 방울방울이 뭔데. 관심 있는 척 힘드니까 빨리 대답해.” - “방울방울.” - “그래, 그게 뭐냐고.” - “이지훈을 방울방울.” - “진짜 넌 왜 그럴까.” - “승관아, 상가에서 비눗방울 하나만 사다 줘.” - “헛소리 좀 하지 마.” - “어차피 바로 옆 동이잖아.” -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진지해, 지금.” - “두 개 사와. 날씨 좋을 때 불어야 지금 이 기분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거든.” - “삥 뜯지 말지?” - “비눗방울로 별 모양 만들어줄게.” - “……에바, 그게 가능해?” - “응, 당연히 구라.” - “오늘도 정상적인 대화는 틀려먹었어.” - “방울방울.” - “통화료 아깝다. 끊어라.” - “지훈이를 방울방울.” - “아, 좀! 닥치라고!” * - “여보세요.” - “어디냐?” - “집.” - “야 이 미친, 방울방울이 뭔데?” - “끊어.” - “야야! 김여주가 이지훈을 방울방울 한다잖아! 겁나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 “알 필요 없고 신경 꺼.” - “지금 당장 비눗방울을 대령하라 신다. 열아홉에 미친 거 아니냐?” - “열아홉이면 한창 즐길 나이지 않나.” - “……얘도 틀려먹었네.” - “어, 수고.” - “……칫솔은 쓰지도 않을 거면서 왜 사오라고 한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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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백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 감기 조심하세요 (하트 X 1122 (하트 붙여넣기가 안 돼요...... ㅠㅠ) + 우즈님, 좋은 결과 있으시길! ++ 전 추석 연휴에도 일을 했...... 크흡.......... 아침에 송편 사 먹었는데 맛있더라고요. 특히 분홍색 사랑합니다. +++ 우리 독자님들 예쁜 하루 보내세요 (하트 백만 개...... 하트...... 나와주세요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