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 따위는 부러 하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 말한다. 기대치가 높아질수록 쌓여가는 ‘실망’의 바다는 그만큼 깊은 것이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 어느 경계에 검은 선을 그은 아이는 그 고통을 안다. 그럼에도 손가락을 거는 것이다.
- ‘그때 만나, 우리.’
……
- ‘기다릴게.’
희미한 피사체에 불안정한 숨을 삼켰다. 낡은 기억의 파편들, 새벽녘 어스름이 사색의 낯을 덮쳐 환상을 깨운다. 땀으로 흥건한 목덜미를 닦아 바지춤에 대충 문질렀다. 이윽고 꿈을 먹는 아이의 넋두리를 대신하려 냉한 거실을 거쳐 바깥으로 발을 디딘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유일한 시간, 이 순간을 닮은 아이의 목소리가 불어온다. 오직 기억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그런 목소리.
- ‘살아있어도 죽은 거야.’
……
- ‘우린 다 그래.’
난간에 기대 서늘한 새벽바람을 맞는다.
올해의 세 번째 계절이었다.
Oh My Rainbow
Kiss me hard in the pouring rain
Chapter. 9 <절망의 약속>
#33.
2013년 가을.
안전 문제로 B 시의 전 학교 옥상이 폐쇄된 지 약 9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수능 성적을 비관한 수험생들이 자신의 모교 옥상에서 잇달아 숨을 끊은 것이다. 한 해에 학업 문제로 자살한 청소년의 비율이 나날이 늘어가자, B 시 대책 위원회는 재발 방지 프로그램을 착수한다는 목적으로 정부로부터 보조 지원금을 받았다. 결과는 청소년 상담사 다섯 명으로 이뤄진 구멍가게였고, 얼마 가지 않아 뉴스는 ‘정부 보조금을 빼돌린 B 시의 농락’이라는 타이틀로 논쟁을 빚었다.
B 시는 현재까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승관이, 그리고…….
- ‘진은수, 들키면 바로 도망인 거 알지?’
- ‘더 세게 밀어 보라니까?’
- ‘달리기 몇 초 나오는데?’
- ‘걷기만 해서 몰라.’
- ‘아이 씨, 자랑이다.’
있는 힘을 다해 삐거덕대는 옥상 문을 밀어냈다. 쥐고 있던 열쇠가 철문에 부딪혀 댕강 소리를 내자, 여물지 않은 서로의 검지가 입술에 닿았다. 쉬이-. 문틈으로 불어오는 청색 바람이 상대방의 짙은 갈색 머리칼을 날린다. 배시시 웃는 매끄러운 볼에 깊은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낼 때, 두 쌍의 운동화가 자유를 찾아 일방적인 공간을 넘었다. 켜켜이 묻어둔 속박을 털어내듯, 유독 푸르던 하늘에 손을 뻗는 그녀였다.
- ‘야, 진짜 시원해!’
- ‘담임 눈치채기 전에 다시 갖다 놔야 하니까 딱 십 분만 있다 가자.’
- ‘승관이도 부를까?’
- ‘담 넘다가 걸려서 지금 학주랑 대판 싸우고 있다며.’
- ‘맞다, 아까 문자 했지.’
의미 없는 손가락이 휴대폰을 훑는다. 부승관은 왜 멀쩡한 교문 놔두고 담을 넘어서는…… 그래도 하루 종일 수업 못 듣게 하는 건 좀 그렇다……. 차디찬 시멘트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우유 곽에 날카로운 빨대를 꽂는다.
- ‘마셔, 승관이는 내일 사주지 뭐.’
- ‘맨날 부승관, 부승관. 지겹다.’
- ‘친구는 친구가 챙겨야지 누가 신경 써주나?’
- ‘친구 아니잖아.’
- ‘또 시작이네.’
- ‘왜 고백 안 해?’
은수는 빨대 끝을 잘게 물더니 기어코 화제를 돌렸다. 망해버린 드라마 줄거리와 관심도 없는 어느 배우의 열애설로 어색함을 없애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빨대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불안해서, 할 말이 없어서, 또는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길 바란다는 의미였다.
- ‘벌써 일 년이나 지났잖아. 언제까지 줄 타기만 할래?’
- ‘남이사 줄을 타든 박을 타든.’
- ‘부승관 여친 생길 때마다 그렇게 속앓이하면서. 새벽에 하소연하는 네 목소리 그만 듣고 싶거든.’
- ‘콕콕 찌르는 건 선수다, 진짜.’
그녀가 장난스레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는 아야야-, 고통을 표한다.
나와 승관이, 그리고 은수는 한동네서 자란 아이들이었다. 무엇을 하든 함께하는 일이 당연한 또래들처럼 학교가 끝나면 근처 분식집에서 숫자를 세며 기다렸고, 누군가 혼이 나면 그날 밤 놀이터는 우리의 아지트가 되었다. 사실, 눈물로 놀이터 모래를 적시는 일이 허다했다. 예상하다시피 그 주인공은 주로 승관이 되었고, 나머지는 반듯한 손수건으로 닭똥 같은 눈물을 닦아 주기 바빴다. 물론, 그 일의 대다수는 은수의 몫이었지만.
은수가 승관을 담에 담아두기 시작한 사건은 일 년 전, 학업에 엄한 그녀의 부모가 손찌검을 한 날이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비싼 돈 들인 티가 나지 않아서, 머리가 멍청해서,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가당치 않은 것들로 저항하는 그녀를 무참히 억압했다.
당시, 약속 시간이 넘도록 연락조차 받지 않는 은수를 걱정하던 승관이 그녀의 집을 찾았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그녀를 마주하자, 승관은 한달음에 달려가 품에 안았다. 그 흔한 물음도 없이, 승관은 자신의 패딩을 벗어 은수를 감쌌다. 눈물을 꾹 참는 것이 동정은 아니었음이라.
- ‘왜 이렇게 늦게 와.’
……
- ‘안 오는 줄 알았어.’
어느 관계가 그러하듯 그녀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니, 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승관을 대했다. 대신, 지금처럼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승관이, 우리 승관이. 그리고 마지막은 늘 같았다.
- ‘나중에 나 없으면 승관이는 누가 챙겨주나.’
- ‘또 그런다.’
- ‘왜, 내가 없을 수도 있지.’
- ‘네가 없다는 가정 자체가 너무 이상해.’
-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울 언니 봐도 그렇잖아.’
- ‘진은수……’.
- ‘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너무하지 않냐?’
빈 우유 통이 포물선을 그리며 옥상 구석에 처박힌다. 여분의 끈적이는 액체가 빨대를 타고 바닥을 적셨다. 그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언성을 높인다.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유서도 쓰고 물건도 미리 정리했다니까? 내가 진짜 그거 보면서 와, 이 미친년이 그동안 나 몰래 이딴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원망이 드는데……. 내가 진짜…… 진짜…….
그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도려내지 못한 상처였다.
- ‘좀만 더 살아보지…… 좀만 더 버텨보지…….’
- ‘은수야…….’
- ‘옥상에서 떨어질 거면 차라리 목을 매달지…… 그럼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었잖아…….’
여물지 않은 손바닥이 작은 얼굴을 감싼다. 그녀의 언니는 성적 비관으로 잇달아 자살한 수험생 중 한 명이었다. 실패에 무기력한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달고 살던 스무 살은, 당시 열다섯인 그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 ‘수능이 뭐라고, 부모가 도대체 뭔데 자식을 이렇게 만들어. 부모라서, 낳아준 사람이라서 다 참을 수 있다고 병신 같이 맞더니 결국엔 곪아 터져서 죽어버렸어.’
……
- ‘진짜 뭣 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죽기 직전에 내 생각은 했는지, 왜 미안하다는 말만 잔뜩 써 놓고 갔는지 묻고 싶은데, 이젠 그럴 수가 없어……’.
……
- ‘……대답해 줄 사람이 없잖아.’
자신의 부재를 당연시하게 된 시점도 아마 혈육의 죽음 이후였을 것이다. 즐거움과 행복은 종종 우릴 스쳤으나, 그녀의 얼굴은 늘 어두웠다. 만약 내가 없으면, 내가 없어도, 그래도 지금처럼 빈틈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은 꼭 그랬으면 좋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가끔 이런 말을 남기며 불안한 인사를 고했다. 얄팍한 내 입술은 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다. 다만,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는 그늘 옆에 앉아 그녀의 얘기를 들었다.
- ‘여주야.’
……
- ‘넌 살아 있어?’
따가운 햇볕에 구석에 처박힌 우유가 바닥에 스며든다.
은수의 마음처럼, 그것은 짙은 그을림을 남겼다.
#34.
코끝에 눈꽃이 매달리는 계절이었다. 저마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형식적인 흔적을 남기는 비상식적이고도 쓸데없는 날이었다. 우리 엄마는 바쁘니까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또 고생길 시작인데 졸업이 무슨 재미야. 푹 인상을 구긴 채, 복잡한 교실을 벗어나 건물 밖으로 향했다. 두꺼운 코트를 여미고 난 빈손은 되도록 주머니에 숨겼다. 이방인의 냄새가 난 것이라.
- ‘껄렁한 자세를 보건대, 저건 분명 김여주다.’
- ‘에이, 설마. 이제 짝다리 안 짚는다 했잖아.’
- ‘일단 머리가 부시맨이니까 김여주 맞아.’
- ‘쟤, 지금 너 노려 보고 있어.’
- ‘괜찮아, 반가울 때 가끔 저렇게 보는 습성이 있더라고.’
운동장 한복판에서 오지도 않은 문자를 확인할 때였다. 승관은 학부모들의 자가용으로 인해 진흙탕이 된 눈덩이를 운동화로 치대며 내게 눈발을 날렸다. 이제부터 노려보지 말고 반갑다고 얘기를 해. 한 팔로 꽃을 안고는 그대로 내 어깨를 보듬는다. 달갑지 않은 친숙함에 심통이 난 건지, 빈손이 창피한 건지, 승관의 옆구리를 가격한 후 한 발짝 멀리 떨어졌다. 은수는 주변을 살피며 부모의 흔적을 물었다.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이며 멋쩍은 미소를 짓자, 승관이는 그녀에게 제 꽃다발을 넘기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미끄러운 눈길을 달려가는 앳된 교복이었다.
- ‘……은수야.’
- ‘응.’
- ‘그때, 네가 물어봤던 거 있잖아.’
- ‘어떤 거?’
- ‘살아…… 있냐고.’
품에 안은 백색 리시안셔스의 향을 맡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찬바람에 꽁꽁 매어 놓은 꽃다발의 가지가 추위에 떨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이는 날 바라보다, 멍한 시선으로 진흙탕이 된 바닥을 훑었다.
- ‘나, 살아 있어.’
- ‘…….’
- ‘살아서 너랑 승관이랑 계속 같이 있을거고 행복해질 거야.’
- ‘…….’
- ‘네 꿈도 행복해지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추위에 떠는 것은 비단 가지뿐만이 아니었다. 두꺼운 목도리를 벗어 휑한 은수의 목을 감쌌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차가운 꽃가지를 끌어안았다. 승관이 온다. 바보 같아. 그녀는 눈짓을 따라 뒤를 돌자, 투박한 눈길을 따라 돌아온 승관이 노란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받아라, 졸업 축하하고. 처음 받아본 꽃송이에 무척이나 어색한 몸짓을 그리다, 이내 배시시 웃으며 코끝에 향을 담았다.
- ‘꽃 이름 뭐야? 향 좋다.’
- ‘그 뭐야, 프리 뭐시기였는데.’
- ‘암기력이 참 프리하다.’
- ‘됐고, 사진이나 박자.’
야, 모여 봐. 은수를 중심으로 나와 승관은 각각 양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한파의 기승도 추억을 남기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존재였다. 프레임에 완벽히 담기지 않는 모양새가 영 맘에 들지 않았는지, 승관은 앞을 지나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저만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곧바로 브이를 얼굴에 붙인 개구쟁이는 순식간에 끝난 셔터 소리에 이번엔 필터 타령을 하며 남자를 붙잡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남자는 자세를 잡고 큰소리로 숫자를 외쳤다. 그리고 은수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작게 중얼거렸다.
- ‘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살아 있는 건 아냐.’
……
- ‘살아있어도 죽은 거야.’
……
- ‘우린 다 그래.’
졸업 축하해
중학생 진 양이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했습니다.
오전 5시 44분경,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19층에서 뛰어내려 사고 직후 119구조대가 긴급 출동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졸업식 다음 날, 진 양은 자신의 개인 SNS를 통해 “엄마가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 “죽은 언니처럼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라며 자신이 가정 폭력 피해자라는 것과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미 작년에 사망한 진 양의 언니도 성적으로 인해 투신자살한 사실이 알려지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훗날 은수는 말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자신에게 달려오던 승관이의 모습이 기적 같아, 부디 그것이 꿈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다고.
보복이 두려워 신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승관이 있어 작게나마 숨을 토했다고.
그날은, 언니보다 여주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유서는 그녀를 닮아 마지막까지 담담했다.
Epilogue.
- ‘나 대신 수능 좀 봐주라.’
- ‘네 이름으로? 그거 불법이야.’
- ‘아니, 네 이름으로.’
- ‘……수능, 안 볼 거야?’
그때의 널, 좀 더 이해했더라면…….
- ‘네가 대신 봐줘.’
……
- ‘보고 나서 어땠는지 알려주라.’
……
- ‘어디서든 듣고 있을게.’
죽지 말고 넌 살아.
그날의 네 말을 좀 더 알아챘더라면.
더보기 |
여주의 과거 사정을 조금 (이라 쓰고 많이) 수정했습니다. 다음화부터는 지훈이와 다시 만나요. 안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