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이름을 부르는 형의 목소리, 스케줄 도중 쉬는 시간이면 내 어깨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하는 형의 습관, 숙소에서 잠이 오지 않으면 늘 나와 원식이형의 방으로 찾아와 내 옆자리에 누워 내게 칭얼거리는 형의 잠버릇, 그리고 그런 학연이형을 향해 언젠가부터 커져가던 비이상적인 나의 마음.
[혁엔]스물다섯, 스물
w.매니저정택운
원식이형과 재환이형, 그리고 내가 함께 패널로 나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첫사랑은 어땠냐는 진부한 질문을 받았다. 원식이형은 한 눈에 반해서 일단 정면돌파를, 재환이형은 상처 받고 싶지 않아 먼저 피하는 쪽을 택했었다고 대답했다. 당연스럽게도 내게 돌아온 질문에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전 아직 첫사랑을 안해봤어요."
이미지 관리하는거냐는 DJ누나의 짖궂은 질문에도 그냥 웃음을 지었다. 정말 없었으니까. 중학교 때는 괜히 어른인 척이 하고 싶었다. 여친을 사귀고, 헤어지고, 질질 짜고, 다시 PC방에서 게임을 하며 웃고, 또 밤만 되면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질질 짜는 친구들의 모습이 유치해 보였다. 그래서 사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가수라는 꿈이 간절했다. 가끔 연습이 지칠 때면 너무 외로워 여자친구를 만들어 볼까라고 고민해본적은 있지만, 친하게 지내던 형이 연애 문제로 소속사에서 퇴출 당하는 모습을 눈 앞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은 깔끔히 접기로 했다. 당장은 데뷔가 중요했으니까.
"그럼 혁씨는 짝사랑은 해본적있어요?"
바뀐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였다. 이걸 짝사랑이라고 정의내려야 하나. 나는 몇 일 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같은 그룹의, 같은 성을 가진 멤버를 좋아한다는걸 '짝사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네. 있어요."
한번도 짝사랑에 대해 형들에게 말한적 없었던지라 형들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날 쳐다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형들을 볼 때와는 다른 마음이 학연을 볼때면 생겼다. 뭔가 간질간질하고, 바라만 봐도 속이 아리고, 누가 심장을 콕콕 누르는 느낌. 그래서 그냥 내가 짝사랑을 하고 있구나 라고 정의내렸다.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거나, 부정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구나 정도? 내가 학연이형을 좋아하는구나, 나 남자를 좋아한건가? 아니다, 남자가 아니라 그냥 학연이형이 좋은건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길어져 갔고, 그렇게 라디오 방송이 끝났다.
"야! 한상혁! 너 짝사랑하는 사람 있었어? 저번 달 만해도 없다더니. 누구야, 누구!"
차 안에 올라타자마자 재환이형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냥 고개를 젓고 차 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걔 아니야? 그때 왜 학연이형한테 번호 달라고 했던 여자애! 상혁이랑 동갑인 애 있잖아."
"아, 학연이형이 미안하다고 하니까 욕 하면서 나갔던? 너 걔 좋아해?"
"맞나봐, 어쩐지 그 때 한상혁 표정 좀 이상했다니까. 그 여자애 죽일 듯이 쳐다보고, 와 대박이다, 진짜."
재환이형과 원식이형은 내 짝사랑 상대를 찾기 위해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 없는 소리들에 그냥 이어폰을 꽂았다. 그 여시 같은 년이 학연이형한테 눈웃음 살살 치면서 접근하니까 그게 싫어서 표정 관리가 안된거였는데, 저렇게 오해를 하다니.
[혁아!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사랑하는 학연이형]
그냥 학연이형이라고 저장해놨는데 학연이형이 핸드폰을 만지고 나서 '사랑하는' 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었다. 처음엔 남자들끼리 남사스럽게 무슨 짓이냐며 지웠지만, 지우면 또 가져가서 붙이는 바람에 그냥 납둔게 화근이었다. 내 마음을 인정하니,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에 머리가 아파왔다. 카톡을 읽고도 답장을 하지 않으니, 또 금새 재촉을 한다.
[누구야? 누구! 얼른 엄마한테 불어!-사랑하는 학연이형]
한숨을 쉬고 자판을 눌렀다. 누구긴 누구에요, 엄마지. 라고 까지 적었다가 급하게 문장을 지웠다. [그냥, 형 모르는 사람.] 짧은 문장이었지만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내 감정을 속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말하는게 이렇게 힘든일인줄은 몰랐다. 노래를 듣던 핸드폰을 꺼버린 채, 그냥 차 시트에 기대었다. 복잡하다,.
*
새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학연이형이 다가온다. 숨 막힐 듯 고혹적인 향기를 뿜어대는 학연이 형이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끌린 듯 그 손을 잡았고, 형은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학연이형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과 꽃 향기 속에서도 학연이형의 향만이 내 후각을 자극한다. 학연이형이 멈췄고, 나도 멈추었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학연이형은 내 어깨를 밀추었다. 나는 이끌린듯 그 꽃내음이 가득한 들판에 누웠고, 학연이형이 내 위에 올라탔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뭐라고요? 네? 점점 흐려지는 학연이형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지마요, 가지마. 펑펑 눈물을 흘리며 학연이형을 붙잡았지만 붙잡히지 않는다.
"상혁아!"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얼굴이 학연이어서 좋았다.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는게 형이어서 좋았다. 형의 눈동자에 나 밖에 없어서 좋았다. 그냥, 다 좋았다. 학연이형은 놀란 듯 내 이마를 짚었다. 너 지금 상태 안 좋은 것 같은데. 스케줄 할 수 있겠어? 걱정스레 물어보는 학연이형의 목소리가 좋았고, 학연이형의 일정한 톤이 좋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나를 향한 목소리라는게 가장 좋았다.
"좋아해요."
"뭐?"
"형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말한 짝사랑이 형인 것 같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나 혼자 이 말같지도 않은 짝사랑에 대한 마음정리까지 다 할 생각이었는데 꿈이 너무 슬퍼서, 학연이형이 떠날 것 같아서, 일어나자마자 보인게 학연이형 얼굴이어서 그냥 저질러 버렸다. 후회보다 후련함이 먼저였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학연이형에게 얘기하자 학연이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떠났다. 3일이 흘렀다. 3일동안 나와 학연이형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일방적인 학연이형의 시위였다. 차에서는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고, 내게 전할 말이 있으면 직접 말하는대신 꼭 다른 형들을 통해 말했다. 나와 학연이형이 함께 나가기로 되어있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어느새 나와 재환이형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렇게 3일이 꼬박 지났다. 나는 이제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난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속은 어린애일 뿐이었다.
"한상혁, 나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