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e ice baby 上
written by 브루스 칸
오년 사귄 여자친구와 이별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였다. 헤어지자. 그 짧은 한 마디에 우리의 오 년이란 시간이 무너졌다. 그다음엔 어땠더라. 그래. 난 펑펑 울었다. 졸라 병신 같지만 사실이었다. 나는 돌아서려는 그녀의 핸드백을 잡고 늘어졌다. 추잡스럽게 질질 끌며 매달렸다. 그 당시엔 그게 추잡스러운 행동이란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미쳐있었고, 우습지만 필사적이었다.
"왜 이래 정말."
"너야말로 왜 이래."
"제발. 질리지도 않아?"
응. 질리지도 않아.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한단 말야. 진심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청춘을 바쳐 사랑한 여자의 눈이었다. 너는 이렇게 달라졌는데 네 눈은 달라진 것이 없구나. 그 사실이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이유라도 알자."
"···모르는 게 나을걸."
"말해 빨리. 진짜 돌아버리기 전에."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남자 생겼어."
그리고 나는 주저앉았다. 근육의 긴장이 풀어진 것이었다. 놀란 그녀는 나를 부축 하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나는 내 몸에 손을 대려는 그녀를 밀쳐냈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나동그랐다. 야! 뭐 하는 거야! 소리친 그녀가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멍청히 그녀의 책망 어린 시선을 받아내었다. 사실 화를 낼 사람은 나였지만, 화를 낼 힘조차 없어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핸드백을 들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비로소 난 혼자가 되었다. 조금 뒤 이별의 실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어재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뭘 봐 시발! 꽥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시선들이 거두어졌다. 비참한 이별이었다.
___
"백현이 형."
"···."
"형!"
"···."
"변백현."
"뒤진다."
"아 형. 죄송해요. 난 또 형이 정신 논 줄 알고."
머쓱하게 웃은 세훈이 옆 좌석의 의자를 빼 앉았다. 나는 그 애의 알록달록한 머리색을 흘겨보았다. 사내새끼가 머리 꼬라지 하곤. 쯧 혀를 차며 전공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훈이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가득 달린 가방에서 전공 책을 꺼냈다. 가방···. 또다시 지난날의 악몽이 상기되었다. 핸드백을 잡고 늘어지던 내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오 시발! 머리를 헝클이며 펼쳐진 책에 얼굴을 박았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그날에 대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괴로워하며 눈가를 쓸었다. 세훈이 그런 날 걱정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형 괜찮아요?"
"뭐가 임마."
"저 이미 다 들었어요."
"뭘."
"형 지연이 누나랑 헤어진 거요.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남자가 차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뭘."
어이가 없어 고개를 드니 세훈이 보살미소를 띤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정색을 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세훈인 다시금 뭐라 쫑알대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그것은 대꾸할 가치도 없는 얘기였다. 나는 무시하고 책을 읽었다. 그런데 멍청한 세훈이가 자꾸만 내 성질을 건드렸다.
"아..괜찮아 세훈아."
"뭐가 괜찮아요. 한 입 마시고 다 잊어버려요."
괜찮다고. 고개를 팩 돌려 그를 외면했다. 그런데도 눈치 없는 이 새끼는 자꾸만 내게 지가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맥이려 했다. 질겁을 하며 그를 밀쳐냈다. 아유 앙칼지네.라고 깜찍하게 짓껄인 그가 내 주둥이에 빨대를 비벼댔다. 결국 똥 씹은 표정으로 아메리카노 한 입을 삼켰다. 그제야 세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놓아줬다.
"어때요. 속이 좀 후련하죠."
"어··· 고맙다."
"뭘요."
나는 더 이상 이 싸이코의 옆에서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그런데!
"······!"
나는 보았다. 전 여친과 그녀를 가로채간 후래자식의 면상을.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모가지를 부러트릴 심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나는 당황해버렸다. 내 여자를 후려간 시발새끼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겐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주춤한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을 본 것이 후회스러웠다. 괴로움에 몸서리쳤다. 그런 나를 본 세훈의 눈이 커졌다. 형! 왜그래요! 아 쫌 닥쳤으면 좋겠는데..
"형 어디 아파요?"
"아니야."
"왜그래요!"
"괜찮다고 세훈아. 쫌."
새파랗게 질린 낯의 세훈이 내 몸의 이곳 저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또라이가 뭔 짓을 할지 이제는 감도 안 잡혔다. 세훈은 안절부절하며 몸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도 무언가를 본 듯 눈이 커다래졌다.
"혀,형."
"왜."
"혹시 봤어요?"
"···."
"저거 도경수 잖아요. 대박. 지연이 누나가 도경수를."
"세훈아 형 괜찮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주라."
"저런 걸 봤는데 어떻게 괜찮아요! 진정하고 이거 한 입 더 마셔요. 얼른."
그가 또다시 내 주둥이 사이로 빨대를 쑤셔 넣었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또다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빨았다. 씁쓸한 원두의 맛이 느껴졌다. 머리 위로 열이 올랐다. 눈을 감으면 도경수의 그 후래자식의 뺀질한 낯이 둥둥 떠다녔고 눈을 뜨며 그보다 더 줫같은 세훈이의 얼굴이 보였다. 저 싸이코는 지금 내게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이라도 더 맥이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다. 전 여친이고 뭐고 이 토나오는 아메리카노를 다 엎어버리기 전에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 간다."
"왜요? 아, 형!"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길을 걷는데 눈 앞으로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도경수. 세훈이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경영과 킹카였다. 씹 오글거리긴 한데 사실이 그랬다. 나쁜년. 언제 또 그런 남자를 꼬셔가지곤. 훌쩍이며 거리를 걸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 우리 사랑했잖아. 핸드폰 가게의 스피커에선 비참한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___
"형 제 얘기 듣고 있어요?"
"어,어."
이 시발같은 세훈이는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나를 쫓아다니며 열심히 날 괴롭히고 있다. 제 딴에는 나름 챙겨준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주 죽겠다. 제발 좀 꺼져주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 변백현. 넌 너무 물러서 문제야. 스스로를 자책하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전 여친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내가 먼저 피해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럴수록 비참해지는 것은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좋은 추억으로 묻어 두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찾아가 내가 사준 물건을 다시 돌려 달라던가 밤늦게 술을 먹고 전화하는 진상 짓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쫑이 났고 도경수도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이 터졌다. 경영학과 도경수가 실용음학과 강의실에 들어 닥친 것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나를 찾기 위해. 나는 벙 찐 채로 강의실 안을 두리번 거리는 도경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인상을 구긴 도경수가 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왔다.
"네가 변백현이냐?"
"그, 그런데."
"따라 나와라."
희번뜩하게 눈을 부라리는 도경수를 보며 사실 난 좀 쫄았다. 그의 시선이 내 정수리부터 발 끝까지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뒷목을 쓸었다. 도경수는 그런 나를 몇 번 야리더니 휙 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가 나간 뒷문을 응시했다.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뭐랄까,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 잠시 멍을 때리는데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춤주춤 도경수의 뒤를 쫓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내가 도경수를 기분 나쁘게 만든 일이 뭐가 있었지? 잠시 생각을 하다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화를 내야 할 쪽은 내 쪽이었다. 도경수는 나한태 귓방망이를 오백 대 쳐맞아도 모자랄 놈이다. 그런데 내가 왜 도경수한태 끌려가고 있는 거지?
도경수는 자판기 앞에 서있었다. 나는 한껏 쭈그려진 채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눈썹에 힘을 팍 주며 나를 아렸다.
"너냐?"
"뭐..가..?"
"나를 남의 여자 후려간 양아치라고 소문낸 씹새끼가 너냐고."
도경수가 씹.이라고 발음할때 나는 조금 크게 움찔했다. 그리고 도경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또 한번 놀랐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금 도경수는 저의 이름이 들어간 저급한 소문의 근원지를 나 변백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왜 방귀 뀐 놈이 성내고 지랄? 당연한 사실이지만 소문을 낸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떤 후래 자식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녔는지는 몰라도 나는 내 여자를 다른 놈한테 뺏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머리가 텅텅 빈 놈이 아니었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었다. 누가 그런 걸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겠냐고. 그런데 지금 도경수는 지가 하는 소리가 말인지 방구인지 구별도 못하고 되는데로 뱉어 내는 것이었다. 네가 양아친건 맞지만 내가 씹새끼는 아니라고. 눈앞의 도경수는 여전히 큰 눈알로 나를 부라리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나도 작은 눈을 치떠서 그를 야렸다.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도경수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깔아? 나는 좀 더 힘을 줘서 도경수를 야렸다. 도경수가 눈을 깜박였다. 이겼다!
"어떤 찌질이 새끼가 그딴 소문을 내고 다니는가 했는데 널 보니까 수준이 딱 나온다."
"남의 여자 후려가는 양아치가 할 소린 아니라고 보는데?"
내가 비아냥 거리자 도경수는 정색을했다.
"여섯시에 스타벅스 앞으로 나와라."
그는 그렇게 말하곤 홀랑 가버렸다. 그렇게 말하면 누가 쪼..쫄 줄 알아? 나는 도경수의 등짝에 뻐큐를 날리고 돌아섰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똥을 밟아도 이런 개똥을 밟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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