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05
불협화음의 화음
"그냥 좀 그렇게 해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이해가 안 돼."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복도 끝에 자리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음악실에서 얼굴을 붉혔다. 남준이가 자꾸만 우리의 달라진 사이를 아이들에게 밝히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원체 거리감없이 친하고 다정한 아이라, 아이들은 우리가 붙어있는 것에 대한 의심이 별로 없었다. 골목길에서의 우리 대화를 엿들은 녀석의 친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의 연애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처럼 언성을 높여대더니, 정작 오늘은 관심도 없었다. 열아홉 남자 아이들에게, 남의 연애는 그다지 오래 잡고 늘어질 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오늘의 게임 아이템이 무엇인지, 대학 상담에 들어가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이런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연애가 그렇게 튀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아무리 우리가 친했어도. 어제 친했던 거랑 오늘 친한 거랑은 달랐다. 그래서일까. 우리 사이의 분위기가 달랐나보다. 어제 그 자리에 없던 김우석이 쉬는 시간에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보고 물었다. 둘이 뭐 있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나는 더욱 오버하며, 있긴 뭐가 있냐고. 당장을 수습하기 위한 말을 쏟아냈다. 너도 참 웃긴다. 있기는 뭐가, 있어. 하여튼 못 하는 말이 없어. 하하. 그치. 김남준? 하지만 김남준은 나의 물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 내 앞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사물함으로 향하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내 머리에 제 머리를 소리나게 부딪혔다. 엄청 아프지는 않았는데, 꽤 아팠다. 나는 대답 대신 애먼 고통을 전한 아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저를 향한 내 시선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 뒤, 책을 챙겨 제 자리로 돌아갔다.
05-01
첫 번째 쉬는 시간을 기점으로 김남준은 내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곁에 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 앞자리 책상에 몸을 기대고서는 우리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내가 말을 할 때면, 그 대화를 이어주거나 특별한 리액션을 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는데, 함께 대화를 나누던 아리와 미영이가 물었다. 둘이 싸웠어? 단순한 내 오해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는 아이들의 물음에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김남준은 느닷없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나를 또 미지근하게 바라보았다. 쟤는 자기가 무표정일 때, 얼마나 차가워 보이는지 알까. 김우석은 내 옆자리에 앉아, 그런 김남준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제가 오늘 대학 상담 번호라는 것을 깨닫고는 울상을 지었다.
"와. 나 어떡하냐."
"그냥 가서 성적되는 대로, 간다고 해."
"최아리. 자기 일 아니라고 말 막하네."
"그럼 네가 뭐. 계획이 있어?"
"나 꿈 있거든?"
"피시방 사장?"
"인형뽑기집 사장할 거다."
아리와 우석이의 무미건조한 대화가 튀었다. 나는 김남준에게 쏟아져 있던 감각을 깨워,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김우석도 꿈이 있구나. 정말 인형뽑기집 사장인가? 근데 김우석이라면 그걸 해도 대박날 것 같기는 한데. 잘 어울리기도 하고. 별 것없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자꾸만 몸집이 커졌다. 저렇게 당당하게 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녀석이 부러웠다. 나는 꿈이 없는데.
"손톱 하지마."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불안할 때마다 나오는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남준이는 줄곧 나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더니, 제 큰 손을 뻗어 입가에 머무는 내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내가 물어뜯던, 엄지손가락을 제 엄지로 살살 쓸어주었다. 그 손길이 퍽 다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우석은 그 사이를 못 참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오. 침 묻어 있을 텐데, 그냥 만지기! 그러자 아리와 미영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나는 또 그게 불안해서, 녀석에게 잡혀있던 손을 뺐다. 뭐래. 하며. 우리의 소란 때문일까, 몇몇 반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아 있었다. 아리, 미영, 우석이. 그리고 녀석을 제외하면 친한 무리가 없는 나였기에,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나.
그 뒤로도 몇 번의 종이 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나는 대충 급식을 퍼지는 대로 먹다가,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준이는 자연스레 나를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 식판까지 가져가서 정리를 마치고는 문 앞에 서서 손짓했다. 나는 평소에도 녀석이 종종 내 식판을 버려줬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잊은 채, 조금 전의 우리의 모습을 다른 아이들이 오해하면 어쩌지 싶었다.
05-02
녀석의 발길이 멈춘 곳은 교실이 아닌 음악실이었다. 남준이는 근처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를 마주하고 물었다. 우리 사귀는 거 비밀이야?
"응."
"나는 그럴 생각없는데."
"... 그냥 그렇게 하자."
"같이 사귀는데, 상의도 없이. 너 혼자 비밀로 하면 끝이야?"
"그럼 너는. 같이 사귀는데, 너만 좋다고 티내면 다야?"
"내가 뭘 티냈어."
"아까도 급식 대신 버려주고, 손톱도 막 하지 말라고 하고. 김우석이 놀리는 데도 가만히 있고. 그게 티내는 거지. 뭐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아이의 단정한 뒷통수가 큰 손으로 인해, 헝클어졌다. 창 밖으로는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이따금씩 크게 들렸다가 작게 들리기를 반복했다. 나는 순간의 어색함에 괜히 그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집중은 아이의 대답으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평소에도 내가 너 급식 같이 정리했어. 손톱도 물어뜯고 나면 고생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리고."
"..."
"우석이가 놀릴 때, 내가 가만히 있기도 전에."
"..."
"네가 먼저 오버해서,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그랬잖아."
"... 그건,"
"심지어 나한테까지 네 거짓말에 동의하라고, 부추겼잖아."
"..."
"아니야?"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남준이의 말이 다 맞았다. 그냥 나 혼자 찔려서, 그랬던 거다. 나는 내게 아니야? 라는 물음으로 제 말을 마친 아이에게 무어라고 답을 해줘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사과를 할까 그냥 계속 우겨볼까. 그것도 아니면,
"나는 얘들 입에 내가 오르내리는 게 싫어."
솔직해야 할까. 답은 마지막이었다. 솔직해야 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아이다. 남준이는 부러 내게 물었다. 아니냐고. 내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거였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다가 또 나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댔다. 하지만 이런 나보다 빨랐던 남준이는 내 손을 제 손에 담았고, 이거랑은 벌개로 계속 이야기를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길이 또 다정했다.
05-03
어렸을 때부터, 엄마아빠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시선을 받아왔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익숙해지기는 커녕, 커다란 짐이 되었다. 쟤가 걔래. 엄마랑 하나도 안 닮았다. 엄마가 뜯어 고친 거 아니냐. 쟤네 아빠 이번에 한 영화 망하지 않았나? 야. 그래도 연예인인데 돈 존나 많겠지. 식의 평가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어야, 최상이 아닌 상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친한 친구도 아주 적었다. 우리 부모님의 직업을 알고서도 무던했던 우석이. 아이들이 내 뒷담화를 할 때, 대신 화를 내주며 울어서 뜻하지 않게 친해진 미영이. 내 사진을 몰래 찍으려던 아이를 잡아, 벌점을 왕창 먹인 아리. 그리고 그냥 뭐든 다 알아주는 남준이. 이렇게가 전부였다. 나를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와 사교성이 좋아,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이미지가 좋았다. 나는 언제나 다른 무리로 자연스레 스며드는 아이들을 보며, 신기해하다가 부러워했다.
남준이는 분명 이런 나를 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자, 그런 것이다. 지금은 애인 그런 걸 떠나서, 내가 나를 잠식시킬까봐. 오랜 친구로 말이다.
"너네처럼 친한 친구도 많이 없고, 그래서 누가 내 이야기하면 그게 다 안 좋은 얘기일 것 같아."
"안 그래."
"안 그래도 나는 그렇게 들려. 나한테는 그래."
"그럼 계속 비밀로 해?'
"... 응. 이모한테도 비밀이고, 우리 엄마아빠한테도 비밀이야. 또,"
"알았어."
남준이가 한 발 물러나주었다. 그게 느껴져서, 고마웠다. 하지만 입에서는 고맙다는 말 대신 알긴 뭘 알아. 다 말도 안 했는데! 라는 퉁명스러운 답이 나갔다. 나는 녀석에게 잡힌 손 안에서 아이의 손을 꼬집었다. 아이는 그제서야 굳어진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냥 다 말하지 말라는 거 아니야? 나는 그 말이 또 아닌 건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는 제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제 품에 안고는 잔뜩 힘을 주었다. 진짜로, 갈비뼈랑 어깨뼈가 조금 아팠다. 아이는 나를 안은 채로, 이리저리 흔들다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아이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은 얼라랑 만나기 너무 힘들다. 진짜.
"... 뭐래."
남준이는 제 가슴팍에서 웅얼거리는 나를 또 특유의 가지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내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나는 아이가 입을 맞출 때마다, 밀려나는 몸에 힘을 주었다. 왜 이래! 하지만 남준이는 내가 밀리면 밀리는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밀리다보니, 등 뒤에 무언가 툭 닿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것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확인하기도 전에.
조율이 엉망인 탁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몸을 눕히면 눕히는 대로, 눌리는 건반들이 소리를 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들을 왕창 누르는 바람에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크게 엇나가지 않는 음역대의 소리가 뒤섞였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화음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맞춘 채로 웃기 시작하던 우리는 결국 몸을 떼어낸 채로,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이게 뭐야. 진짜 이상해! 등 뒤로 엄청난 먼지가 붙었을 것 같았지만, 일단 지금은 웃었다. 웃긴 걸 어떡해.
원래 연애가 이렇게 이상하고 재밌는 건가. 조금 전의 뚱땅뚱땅 멜로디가 여전히 귀를 간질였다. 눈 앞에서 보조개를 푹 판 채로, 아빠다리를 한 채로 웃고 있는 남준이가 마음을 간질였다.
남준이와의 연애는 즐거웠다.
우리의 화음이었다.
⁂⁂⁂
안녕하세요. 연재텀이 엉망진창인 겨울입니다... (머쓱)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열심히는 쓰는 부류의 사람이라. 여유가 있을 때는 최대한 많이 읽고 쓰려고 해요. 그래서 텀이 너무 엉망이지만...! 제가 잘 조절해서, 올려보도록 할게요. 이번 회차에서는 오랜 친구이자 애인인 두 사람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오랜 친구라 서로를 잘 알지만 애인이라서 서운하고 또 오랜 친구라면 할 수 없지만 애인이라서 할 수 있는 스킨쉽에 대해서. 동시에 친구이고 애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서툴지만 건강하고 쾌활한 웃음도 담고 싶었습니다 :)
로맨틱은 마음을 전하는 것과 미래를 꿈꾸는 것이 서툴고 두렵지만, 당장 즐거워서 행복하고 괜찮은. 그런 열아홉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예요. 제목에 관한 의미와 글을 구성할 때 생각했던 점들을 나중에, 작품이 끝난 뒤 사담으로 들려드려도 좋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 책임감 있게 열심히 이야기 할게요. 그럼 오늘도 귀한 시간 내서, 제 이야기를 여러분의 이야기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oMantic
낭만적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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