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1998
02
경수의 목소리는 평범한 여느 아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조금은 단호한 목소리라는 점 일 지도 모르겠다. 어찌보면 체구가 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더 낮고 센 목소리를 내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힘있는 목소리에 종인이 대답도 못하고 눈꺼풀만 꿈뻑거렸다.그러는 사이 경수가 접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종인을 쳐다보고 말했다.
“나 여기 이 동네 구경 좀 시켜주라.”
무심한 듯 툭 내뱉은 말에 종인은 멍을 때렸다. 속으로 경수의 속눈썹이 눈이 큰 만큼 길구나, 라고 멍청한 생각만 되내었다. 왜 그런지는 종인 자신도 몰랐다. 경수가 뭐라고 말을 하든지 간에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와닿았던 까닭일까. 종인은 제 발 아래에 흐르는 개울물 처럼, 아니 보다 더 깨끗해 보이는 경수의 눈만 쳐다보았다.
대꾸 없는 종인을 보던 경수가 눈썹 사이를 조금 찌뿌렸다.
“동네 구경 좀 시켜달라고.”
경수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다시 말했다. 조금 더 단단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선홍빛 입술로 시선을 옮겼던 종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뭐라?”
“…….”
한다는 대답이 고작 되물음이라니. 경수는 답답해져서 닷새 전 처럼 몸을 홱 돌리고 징검다리를 빠른 걸음으로 건넜다. 어어, 종인이 경수의 여린 등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힘있게 말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경수의 몸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개울물에 잘못하면 휩쓸릴까, 걱정이 앞서던 그 때 막혔던 귀가 뚫린 듯 힘을 주었던 경수의 목소리가 종인의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나 여기 이 동네 구경 좀 시켜주라…….
동네 구경 좀 시켜주라…….
구경 좀 시켜주라…….
“……시, 시켜줄게!”
왠지 번지는 미소에 종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터벅터벅 걷는 경수의 뒤로 신이 난 듯 종인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징검다리를 모두 건넌 종인이 바짓가랑이에 대충 발을 번갈아 슥슥 문질러 물을 닦고 신발 속에 구겨넣듯 넣었던 양말을 꺼내신었다. 종인이 그러는 동안 경수는 그를 말없이 기다렸다.
양말을 신은 종인이 신발에 발을 대충 넣어 신발 코를 땅바닥에 툭툭 쳐댔다. 새침한 표정으로 있던 경수는 종인이 신발 코를 바닥에 쳐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종인의 신발을 힐끔거렸다. 낡아빠진 신발은 여기저기 헤져서 너덜거렸다. 색깔도 탁한 빛이 역력했고 밑창이 닳아서 돌밭이라도 걷는 날엔 발바닥이 욱씬 댈 정도로 아파보였다. 저런 신발을 신어도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경수가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큰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신발을 다 신은 종인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경수에게 구경시켜 줄 좋은 곳이 없을까, 생각에 잠겼다. 사실 구경 시켜 주고 싶은 곳은 많은데 너무 많아 어디부터 데리고 가야하는지가 고민이었다.
징검다리 앞에서 서로 말 없이 서있기를 몇 분. 드디어 장소를 정한 종인이 경수를 이끌었다.
“어디 가는 거야?”
“좋은 데.”
“그게 어딘데?”
“가 보면 안다.”
예쁜 꽃나무가 심어진 자갈밭 길을 지나고─경수는 이 때 또 종인의 신발을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을까. 종인의 발이 걱정되었다.─ 개울과 연결된 강 위로 있는 짧은 다리를 건너서 조금 더 걸으니 갈대밭이 나왔다. 아직은 여름인지라 갈대는 모두 초록색이었다. 경수가 신기한 눈으로 갈대밭을 쭉 둘러보았다. 종인은 그런 경수를 뿌듯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초록색 바다 같아.”
“바람 불 때 나는 소리도 바다 같다.”
“응. 그런 거 같아.”
경수가 갈대밭 안으로 들어가며 갈대를 만졌다. 무수히 많은 초록색 갈대밭 사이 경수가 서있었을 뿐이었는데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 났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가 어두웠던 제 방에 불을 켠 듯, 마치 그래보였다.
종인이 갈대밭 중간중간에 핀 잡초꽃을 발견하였다. 길게 뻗은 갈대밭 아래로 기특하게도 꽃봉우리를 연 꽃이 일부러 단단한 목소리를 내는 경수와 닮아보여서 종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저 앞에서 갈대밭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경수를 보던 종인이 연한 노란빛을 띄고있는 꽃을 꺾어 경수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경수의 귀에 말없이 꽃을 걸어주었다.
경수의 큰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제 귀 옆에 꽂힌 꽃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는 종인에겐 들리지 않고 경수에게만 들렸다. 경수는 꽃이 꽂혀있는 쪽으로 눈을 굴렸다가 이내 표정을 조금 찡그렸다. 경수의 표정이 찡그려졌거나 말거나 귀에 꽃을 꽂은 경수를 보고 종인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예쁘다.”
여전히 표정을 찡그린 경수도 말했다.
“난 남자야.”
경수는 귀에 꽂힌 꽃을 빼내려 손을 위로 뻗었다. 종인은 그런 경수의 손목을 잡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알어.”
“나는 예쁘지 않아.”
“아냐. 예쁘다. 잘 어울린다, 엄청.”
그렇게 말한 종인이 경수의 손목을 놔주고, 경수를 지나치며 갈대밭 안 쪽으로 더 들어가 걸었다. 경수는 말없이 자신을 앞서간 종인의 가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잡혀있었던 손목이 화끈거렸다. 종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종인의 손이 붙같이 뜨거운 것도 아니였다. 그냥, 경수의 마음 한 구석과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처럼. 경수의 손목도 그랬다.
“어디 가?”
“따라 와라. 좋은 데 아직 멀었다.”
종인은 뒤따라 오는 경수가 수월하게 올 수 있도록 키가 큰 갈대들을 손으로 일일이 헤쳐 길을 넓히며 걸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경수가 자신을 놓칠까 싶어 양쪽 팔로 갈대가 경수를 가리지 못하도록 막고 서서 경수가 가까이 올 때 까지 기다렸다. 경수는 그런 종인이 고마웠지만 티를 내기가 부끄러워 종인에게 가까워 질 때 쯤 걸음을 늦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종인은 그저 경수가 편하게 올 수 있도록 팔로 갈대를 막고 또 막았다. 그런 종인 덕분에 경수는 제 키보다 크게 솟은 갈대들이 수두룩한 갈대밭을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닥 오래 걸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갈대밭 길은 끝이 났다. 시원해 보이는 숲 입구 앞에 도착하여 뒤를 돌아보자, 드넓은 갈대밭이 한 눈에 들어왔다. 경수는 한동안 또 갈대밭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종인은 경수가 다시 제 쪽으로 뒤를 돌 때 까지 기다렸다. 신발코로 바닥에 널부러진 나뭇잎이나 풀데기들을 건드리며 장난치기도 하고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손바닥으로 두드리기도 했다. 경수에게 그만 가자고 말을 하면 될텐데, 종인은 그러지 않았다. 신기한 눈으로 갈대밭을 보고 있는 경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보고 나면 뒤돌아보겠지. 그런 마음으로 종인은 계속 경수를 기다렸다.
경수는 갈대밭을 보는 것을 마치고 뒤를 돌아 종인을 쳐다보았다. 나무의 겉 껍데기를 손으로 잡아떼던 종인은 경수가 뒤를 돌아보자 손을 탈탈 털고 숲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수는 종인의 뒤에 바짝 따라붙어 걸었다.
조금 안 가서 종인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가까이에서 들리던 경수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뜨문뜨문 나던 인기척도 사라진 듯 했다. 뒤를 돌아보니 경수가 제 가슴팍에 동그란 주먹을 얹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경수의 숨소리가 많이 거칠었다. 헉헉대는 소리를 듣자하니 힘든 모양이었다. 경수가 건강 문제로 시골에 왔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생각나, 종인은 뒤쳐져 있는 경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경수는 볼 옆으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슥슥 닦아내었다. 뒷목도 축축한 느낌에 경수가 손으로 목을 문질렀다. 그 때 귀에 꽂혀있던 연노란색의 잡초꽃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떨어진 모양새가 애처로워 보였다. 뿌리가 없으니 꽃 색깔과 모양이 예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꺾어지는 순간 꽃은 그걸로 생명을 다 한 것이라는 걸 경수는 괜히 뼈져리게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땅바닥에 떨어진 꽃이, 그 꽃을 귀에 걸어주던 종인의 손이 떠올라 아쉬웠다.
“많이 힘드나.”
더운 열기가 올라와 벌게진 볼에 부채질을 하던 경수는 종인의 물음에 약간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경수의 표정이 무슨 뜻인지 몰라 종인은 괜시리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더 걸었다가는 경수가 쓰러질 것 같아서 종인은 쉬다 갈 요량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깨끗한 바위를 찾았다.
“뭐해?”
경수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바위를 찾던 종인의 눈에 적당한 바위가 보였다. 종인은 경수의 가느다란 손목을 손에 움켜쥐고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바위로 향했다. 나무가 우거져 햇빛이 들지않는 그늘에 위치한 바위는 차가웠다. 이정도면 더위도 어느 정도 식힐 수 있을 거 같아 종인은 움켜 쥔 경수의 손목을 바위 쪽으로 이끌었다. 경수가 주춤거리며 종인이 하는데로 발을 움직였다.
“앉아라. 쉬다 가자.”
종인이 먼저 바위 위로 가볍게 올라 앉았다. 경수는 바위 위를 보다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개미 있어.”
경수가 종인의 옆을 손가락으로 켰다. 개미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인지 경수의 표정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종인은 개미한테 겁을 먹고 그러느냐며 한 마디 하려다 관두고 엄지 손가락으로 개미를 꾹꾹 눌렀다. 바위를 바쁘게 거느리고 있는 개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종인은 눈에 보이는 개미 몇 마리를 더 손가락으로 누른 뒤 손을 대충 바지에 슥슥 문질렀다.
표정이 사색이 된 경수에게 종인이 말했다.
“이제 없다.”
와서 앉으라는 뜻을 담아 종인은 제 옆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검연쩍은 느낌이 들어 경수는 바위를 한참을 살핀 후에야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눈 앞에서 종인이 개미를 손으로 누른 걸 보았지만 왠지 금방이라도 다른 개미들이 기어 올 거 같아 느낌이 이상했다.
“개미가 무섭나.”
“물잖아.”
“깔고 앉으면 물기도 전에 깔려 죽어. 무서워 할 것 없다.”
“무서운게 아니라 그냥 싫은거야.”
뾰루퉁한 얼굴을 하고 경수가 말했다. 어련하시겠냐마는, 경수 하는 짓이 귀엽게 느껴져 종인이 픽픽 웃었다.
숲안으로 들어와 바닥을 비추는 햇빛이 옅어진 걸 보아하니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것 같아 종인은 바위에서 내려왔다. 경수는 바위 옆에 자란 풀들을 신발로 건드리고 소리를 내며 장난을 치던 중이었다.
“이제 가자.”
“좀만 더 있다가.”
가던 길을 마저 가려던 종인이 경수의 말에 멈추었다.
“니 아직도 힘드나.”
“…….”
“내가 업어줄까.”
종인은 경수가 걱정되어 제안한 말이었지만, 경수는 신발로 풀을 건드는 것을 그만 두고 종인을 째려보 듯 쳐다보았다. 종인이 경수의 눈에 움찔거렸다. 경수가 필요 이상 과하게 힘이 들어간 채로 바위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경수의 발이 닿으니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난 남자라니까. 여자애처럼 업히는 거 필요 없어.”
경수가 보폭을 크게 하여 종인을 지나쳐 앞에 난 길을 걸었다.
“……그 쪽 아닌데. 이리 와. 그리로 가면 도로 갈대밭 나온다.”
종인의 말에 경수는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잠시 서있다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 줍더니 다시 종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경수의 손에는 맥아리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잡초꽃이 들려있었다. 연노란색의 어여쁘던 그 잡초꽃이.
“나도 알아. 이거 주으러 간 거야.”
그걸 왜? 종인이 묻기도 전에 경수는 잡초꽃을 주으러 갔던 길의 반대쪽 길을 걸었다. 종인이 경수의 옆에 서서 경수가 왜 꽃을 주웠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같이 걸었다. 아는 체 하고 길을 먼저 걸었다가 가는 길이 아니라는 말에 밀려드는 창피함을 무마시키고자 경수가 대충 둘러댄 말이라는 것을, 종인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종인과 경수는 최종 목적지에 다달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인이 경수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비탈진 길을 한동안 걷다가 도착한 이 곳은 낡은 오두막이었다. 지붕은 두터운 지푸라기였고,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길이의 나무들과 나무들 사이사이에 발린 마른 흙, 돌맹이 몇 개들이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바닥은 시멘트 바닥이였다. 겉모습과 지붕에 비해 대조적인 부분이라 아주 의외였다.
누가 가져다 놓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한 손길로 종인은 오두막 입구 옆에 뉘어있던 빗자루를 들어 시멘트 바닥을 쓸었다. 오두막 바깥으로 쓸어 낸 것들을 대충 버리고 종인은 오두막 안쪽 구석에 개켜놓았던 돗자리를 찾아 시멘트 바닥 위에 펼쳤다. 돗자리는 생각 외로 커다란 것이여서 다 펼치고 나니 시멘트 바닥이 거의 안보일 정도였다.
돗자리를 다 펴고 난 후 종인이 신발을 벗고 돗자리 위로 올라가 앉았다. 경수가 여전히 서있자, 종인은 어서 올라오지 않고 뭐하냐며 바위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제 옆을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경수가 느적느적 신발을 벗고 돗자리 위로 올라갔다. 바스락,바스락. 경수가 걸을 때 마다 소리가 났다. 귀 옆에서 꽃이 내던 소리와 똑같았다.
돗자리 위에 올라온 경수가 종인의 옆에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무릎을 들어 끌어 안은 경수가 돗자리로 다 덮지 못한 시멘트 바닥을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시멘트 바닥이라 놀랐어. 신기하다, 여기.”
“원래는 시멘트 바닥 아니었는데.”
무심한 종인의 말투에 경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짜? 그럼?”
“그냥 흙바닥. 풀도 돌도 벌레도 하도 많아서 우리 아부지 몰래 시멘트 가져다 부었다.”
“시멘트는 무겁잖아.”
“응. 바케스 통 이─만한 데에다 시멘트 반죽 해놓은거 담고 한……열 번은 왔다리, 갔다리.”
종인이 시멘트 반죽을 담았던 통 크기를 가늠해 양 팔을 넓게 벌렸다. 원래도 큰 경수의 눈이 더 커졌다. 토끼눈 보다 더.
“여기는 니가 만든거야?”
“바닥만. 바닥만 내가 시멘트 들이 부은거고, 여기 지붕이랑 벽은 누가 만들어 놓은거야.”
“누가?”
“모르지, 나도. 그냥 여기 숲에 와서 놀다 봤어. 하도 구석이라 우리 동네 사람들 여기에 이런데 있는 것도 모른다.”
“여긴 니가 만든데가 아니니까 만든 사람은 알 거 아니야.”
“아, 그건 그렇네. 똑똑하다, 니.”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종인이 탄식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경수가 말했다.
“어쨌뜬 지금 여기는 나만 아는 곳이다. 비밀 장소.”
“나도 알았으니까 너만 아는 곳이 아니지. 비밀도 아니고.”
경수의 말에 종인이 한 번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경수가 다시 종인을 향해 바보라고 말했다.
“그럼……너랑 나. 이렇게 둘만의 비밀 장소.”
“너랑 나랑?”
“응. 니랑 나랑. 야, 여기는 내 절친인 이태민이도 모르는 데다. 내 비밀 장소로 데리고 온 건 나 아는 사람 전부 통틀어서 니가 처음이다.”
손가락으로 시멘트 바닥을 비비던 경수의 손이 멈추었다. ‘처음’ 이라는 단어가 왠지 묘하게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기분에 경수는 괜히 말을 돌렸다.
“여기 오면 뭐해?”
“그냥 멍 때리고 앉아있다 가는데. 아, 가끔 자기도 하고.”
“여기서 잔다고?”
“어. 겨울 빼고. 겨울에 여기서 잘못 자면 입 돌아간다. 더 잘못하면 콱 뒤져버리고.”
종인이 손날로 제 목을 약하게 툭, 치고 죽는 시늉을 하였다. 경수가 그것을 보고 큭큭대었다. 그러자 종인이 놀란 표정을 짓고 경수를 쳐다보았다. 종인의 시선에 경수가 웃는 것을 뚝 멈추고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렇지만 종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왜.”
“니 웃는거 처음 본다.”
종인이 말하는 ‘처음’이란 단어가 방금 그랬던 것 처럼 묘하게 느껴졌다. 두 번 째 였다.
“웃으니까 훨 낫네. 학교에서도 웃고 댕겨라. 아, 근데 넌 왜 학교에서 말을 안 하냐. 얘들이 니 말 병신인 줄 안다. 너 이렇게 말 잘 하는지 얘들이 알면 놀랄 걸.”
경수의 표정이 금새 우울해졌다. 흠짓거리며 놀란 종인이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경수가 고개를 떨구었다. 축 처진 경수의 어깨가 안쓰러웠다.
“……몸도 병신인데 뭐.”
“뭐라?”
경수가 아주 작게 혼잣말 처럼 중얼거렸다. 종인은 경수가 뭐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듣지 못하였다. 경수에게 되물었지만 경수는 우울한 표정을 풀지도 않고 전학 온 첫 날처럼 허공을 주시했다. 어색한 기류가 아주 오랜만에 둘 사이를 배회했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경수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종인도 재빨리 경수를 따라 일어났다. 경수가 제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구경 시켜 줘.”
“…….”
“오래 걸었더니 피곤해. 더 걷기는 힘들 것 같아.”
“…….”
종인은 아까 한 말을 되내었다. 뭔가 말 실수를 해서 경수가 기분이 상한 건 알겠는데 어느 대목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공존했다.
“대신 내일 더 구경 시켜 줘.”
아무런 말 없이 손장난만 치고있던 종인이 경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응?”
“내일 더 구경 시켜 달라고. 나는 이 동네 잘 모르니까 니가 우리집으로 와.”
“……니 집이 어딘데?”
신발을 다 신은 경수가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종인이 다급하게 돗자리를 개켜놓은 후 신발을 신고 경수를 따라 나갔다. 종인의 급한 마음이 꺾어신은 운동화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경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종인에게 새치름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집 근처에 마을회관이라는 데가 있더라.”
종인은 경수의 집이 어딘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마을회관 옆에 오랜동안 비어있던 집 한 채를 알기 때문이었다. 동네에서 보기 드문 이층집이기 때문에 더욱 빨리 떠올릴 수 있었다. 누군가 이사를 온다면 이층집에 살게 될텐데, 부럽다, 하고 가끔 생각했던 종인이기에 경수의 집이 떠오르자마자 종인은 경수가 조금 부러웠다.
“나 니네 집 알 거 같다. 빨간색 지붕 이층 집. 맞지?”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자. 나 피곤해.”
종인은 마을 회관 근처에 있는 경수네 집 가는 길을 더듬더듬 떠올려 경수를 데려다주었다. 도착한 경수네 집 외관은 전보다 훨씬 깔끔해져 있었고, 조금 탁했던 지붕 색도 밝아져있었다. 대문도 낡고 녹슨 철문이었는데 어여쁜 문으로 바뀌어있었다. 더 없이 예뻐진 집이라 종인은 경수가 더없이 부러워졌다.
“내일 점심 먹고 여기로 와. 다시 구경 시켜주는거다?”
“알았다. 들어가라.”
경수가 어여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지만 힘이 실린 경수의 발걸음 소리가 대문 너머로 새어나왔다. 갈대밭을 막 지나고 나왔을 때 거칠었었던 숨소리나 힘들어하던 어깨가 생각났다. 기운이 금방 돌아온 모양이다, 종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경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소리까지 다 들은 후에야 종인은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종인의 집은 마을 회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집이라 꽤 오래 걸어야 했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경수가 먼저 말을 건 날이고, 경수가 처음으로 웃은 날이기에 오래 걷는 것 따위는 종인에게 있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일도 경수네 집까지 오기 위해서 꽤 오래 걸어야 하겠지만 상관 없었다. 내일도 경수가 먼저 말을 걸어 줄 것이고 웃기도 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종인의 발걸음도 경수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종인의 입꼬리에 달려있던 미소가 떨어질 줄을 몰라했다.
종인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 빨간색 지붕만 겨우 보이는 경수네 집을 쳐다보았다. 마음 끝이 간지러웠다.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가 내쉰 종인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걸었다. 내일도 경수와 함께 걷게 될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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