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몇 년 전 나와 사랑을 속삭였던 두 살 아래의 김종인이었고, 수신인은 당연히 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헤어진 지도 벌써 2년 반이나 지났고 김종인은 결혼까지 했다. 물론 나는 생활고에 찌들려 부모님의 잔소리를 애인 삼아 친구 삼아 지내고 있지만. 손으로 직접 쓴 편지인 건지 포장 또한 정성스레 마무리 된 상태였다. 흰 색 봉투는 초조함에 만지작거렸는지 손 때가 약간 묻어나 있었고, 노란색 테이프를 살짝 뜯어내 봉투 안을 보니 꽤나 두툼한 종이가 여러 장 보였다. 초록색 편지지였다. 나는 늘 초록색이 좋다고, 김종인에게 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일,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을 항상 품고 있었다. 내 마음은 늘 불안함과 긴장감이 범벅 되어 혼란을 이루었고, 하루라도 여유롭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날은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했다. 초록색이 좋아,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거든.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겠지만 김종인은 두 눈을 예쁘게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좋으면 나도 좋아요. 해준 것 하나 없는 못난 나를, 그 아이는 진심으로 보듬고 사랑해 주었다.
편지 내용은 간략한 듯 무겁고 답답했으며 통쾌했다. 우스웠다. 그깟 편지 한 통의 내용도 제대로 요약하지 못 하다니. 하도 글을 안 썼더니 이제 내 어휘력에도 한계가 온 것 같았다. 그토록 닮길 바랬던 롤모델로 삼던 작가들의 글도 안 읽은 지 몇 달 됐으니 이런 증세는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와이프가 첫째 아들을 무사히 순산했고, 지금 자신은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자랑하는 어투는 아니었기에, 질투가 나거나 부아가 치밀어 오르진 않았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내 몸 주변을 에워쌌다. 다행이구나. 비록 난 망가졌지만 그 아이는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니, 난 그걸로 됐다. 내가 더 이상 무언가 더 바란다면 그건 못된 욕심이겠지.
꽤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돼서 후회할까 겁도 났는데 의외로 와이프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얼굴도 귀엽게 생겼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준다고. 난 너무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구절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화가 났다. 아니, 부러움인가. 나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내 표현과 마음의 부족인 걸까. 난 고개를 저었다. 김종인을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난 누구보다 큰 마음으로 그 아이를 사랑했으니까.
전화가 울렸고, 전화를 건 사람은 부모님이란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글은 쓰는 거니? 출판사에서 연락은 안 와? 잘 나가던 애가 뭘 하고 있는 거야. 한 때 작가로서 이름을 날렸던 나였기에 부모님은 늘 자질구레하고 더 이상 흥미가 없는 소재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검지와 엄지 끝을 집어들 때와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 글 안 쓴다니까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던 그 아이. 김종인만을 생각하며 글을 썼었다. 달달한 글을 잘 쓰는 작가라며 호평을 받을 때에도 별 거 없었다. 난 그저 종인이와 나의 이야기를, 종인이에 대한 내 감정을, 내가 느끼고 있는 엄청난 황홀함을 느끼는 그대로 적어 내렸을 뿐이니까. 하지만 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쓸 수 없다. 김종인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고, 다른 사람과 하나의 생명을 만들었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니까. 어쩌면 해피 엔딩일 수 있겠다. 난 자궁도 없고, 난자도 없고, 종인이와 사랑을 나눌 수도 없으며 아이 또한 낳을 수 없으니까.
펜을 집어 들었다.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나자 늘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던 굳은살은 금세 사라졌고, 예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던 필체 또한 잔뜩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자신의 근황과 나의 안부를 물어준 김종인에게 답장을 쓰고 싶었다. 흰 색 A4 용지를 꺼냈다. 초록색 편지지에 비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내 편지의 내용도 김종인의 편지 내용보다 초라하겠지.
종인아, 잘 지냈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지금 밖에서 비가 내려, 전에 우리 둘 우산 없어서 비에 잔뜩 젖었던 날 기억나? 항상 비가 올 때마다 그 때를 생각하고 있어. 좋은 아내분과, 귀여운 아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널 생각하니까 웃음부터 나온다. 다행이고, 정말 부럽다. 네 인생의 일부를 내가 더럽힌 것 같았고 늘 죄책감에 갇혀 살았어. 뜬금없지만 나에게 연락해줘서 너무 고맙다. 앞으로 자주 연락하고 지내.
내 마음과 전혀 다른 답장을 썼다. 역겨워서 당장이라도 구토가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흰 봉투에 종이를 곱게 접어 넣었다.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였다. 마음이 허했다.
종인이와 내가 이별했을 바로 그 날처럼, 마음이 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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