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08
시작이 달랐던, 우리의 동행
고3의 시간은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삼 월 모의고사를 보고 나니, 금세 사 월이 되었고, 벚꽃은 구경도 못 했는데 중간고사 기간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선생님과 상담도 여러 번했고, 아이들은 야자 중간에 도망 갔다가 담임 선생님 연락에 돌아오기도 했다. 나도 따라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괜히 부모님 이름에 먹칠할까봐. 또 옆에서 남준이가 너무 묵묵하게 공부만 해서. 도망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창피하기도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매일 야자가 끝나면 남준이랑 밤길을 걸었고,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집 옆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처음에는 답답해서 걷기 시작했던 게, 이제는 약속처럼 그렇게 되었다. 남준이는 골목 뿐만 아니라 공원에서도 손을 잡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 정문을 조금만 벗어나자마자 손을 잡았다. 나는 그때마다 교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빼려 했지만,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아이의 말에 수긍하며 온기를 느꼈다. 똑똑한 남준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사실 남준이는 학교에서도 너무 티를 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자유롭게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야자 때와 달리 수업 시간에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했는데, 남준이는 계속 우석이를 졸라서 내 옆에 앉았다. 워낙 선생님들로부터의 신뢰가 두터운 아이는 그걸로 혼난 적이 없었고, 우석이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나와 남준이를 밉게 노려봤다. 나는 남준이가 내 옆자리에 앉으면 왜 또 왔냐고 입모양으로 다그쳤는데, 아이는 내 다그침에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이따금씩 고개를 조금씩 돌려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내가 작게 웃으면 다시 일어나 보조개가 푹 파이게 웃었다. 또 고 삼 특성상 선생님들이 자습시간을 주실 때면, 책상 밑으로 손을 잡았다 놓거나 귓속말을 하는 척 손으로 볼을 가리고는 짧게 입을 맞췄다.
남준이만큼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 삼이라고 나름 고 삼 스트레스는 왕창 받았다. 그래서 자주 우울해졌고, 종종 왜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남준이는 내가 우울해질 때마다 웃게 해줬고, 왜 살까 싶을 때마다 사는 이유가 되어줬다. 물론 남준이가 내 삶의 단 하나의 이유는 아니었지만, 많은 이유 중 큰 힘을 지닌 이유가 되어주었다. 친구였을 때도 그랬지만 애인이 된 지금은 더더욱.
아이는 공부를 하다가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볼 때면 조금도 귀찮은 내색 없이 친절하게 설명 해주었다. 때로는 너무 다정해서 물어봤던 문제를 잊기도 했는데, 남준이는 그걸 알면서도 내가 자신을 쳐다보면 다시 물었다. 다르게 설명해줄까? 나는 그 물음에 또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남준이는 또 대답해줬다. 몇 번을 물어도 대답해줬다. 일 분단 가장 끝자리에서. 아카시아가 활짝 폈을 때도. 아카시아가 시들어서, 조금은 비릿한 향이 창을 넘어왔을 때도. 한결같이.
08-01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던 비밀 연애는 결국 음악실에서 들켜버렸다. 남아서 야자를 하던 우리는 어느덧 더운 기운이 묻어나는 날씨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물론 남준이는 아니었지만 그냥 우리끼리 놀 계획을 세우며, 남준이도 동참 시켰다.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음악실에 가서 과자나 까먹는 것이 그날의 일탈이었고, 남준이는 영어단어장을 챙겨 우리의 뒤를 따랐다. 우리는 음악실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고 문까지 잠군 뒤에 과자를 뜯었다. 남준이는 내가 뜯고 있던 과자를 가져가 뜯으며, 휴대폰 플래쉬로 이곳저곳을 비춰보는 우석이를 바라보았다.
"우리 그때 여기서 키스했는데. 그치."
탁. 남준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석이는 핸드폰을 놓쳤고, 남준이는 제가 한 말에 스스로 놀라 과자를 힘차게 뜯어버렸다. 덕분에 과자가 공중으로 튀었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와, 학교에서 키스래. 미쳤다. 학생회장이 권력 이런 식으로 남용해도 되냐? 야. 언제야. 언제 했어. 야, 불어라. 아니. 그때 빠박이라니까. 얘네 둘이 점심시간에 상담 있다고 먼저 간 날.
그때는 키스 안 했거든. 이 상황에서도 아이들의 말에 오류를 찾아, 사실을 정정해주는 남준이었다. 나는 옆에 앉은 남준이의 팔뚝을 아프게 꼬집으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거냐고, 알아서 수습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그러자 남준이는 제 손에 들린 영어단어장을 펼쳐서 내 얼굴 앞에 가져댔다. 나는 덕분에 차단된 시야에 한숨을 돌리기는 커녕 어쩐지 더 불안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여주는 아무 잘못없다. 내가 꼬셨어."
이모 따라서 드라마 몇 개 좀 챙겨보더니, 나조차도 어이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남준이의 대답을 끝으로 아이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야 돼. 진짜. 남준이는 아이들의 손길을 곧이 곧대로 받아내다가, 금세 내 등뒤로 와서 제 큰 덩치를 숨겼다. 야. 키스는 둘이 했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그러자 아이들은 네가 방금 여주는 아무 잘못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다시 단어장을 펼쳐서, 얼굴을 가렸다. 이럴 때는 일단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이었기에.
지금까지의 연애를 비밀로 했다는 것을 이유로 모든 연애사를 탈탈 털린 우리는 차라리 속이 편해졌다며, 서로를 보고 키득거리다가 따가운 눈초리들에 고개를 떨궜다. 남준이는 내게 고개 들라며 우리가 뭘 잘못했어! 라고 당당하게 외쳤다가, 떨어진 과자나 마저 주워오라는 아리와 미영이의 말에 고분고분 음악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제가 흘린 과자를 주웠다. 우석이는 김남준이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저렇게 하찮아졌냐며 혀를 찼다. 남준이는 긴 다리를 접은 채로 과자를 줍다가, 제 이름이 들려오자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나와 우석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우석. 너무 딱 붙어있다?
남준이가 기껏 주워 손에 담고 있던 과자들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리와 미영이가 참을 수 없다며, 아이의 어깨를 마구 잡고 흔든 탓이었다. 나는 야자를 마치는 종이 빨리 치기를 바랐다.
08-02
"너가 자기들 것도 아니면서, 유난은 엄청 떨어. 그치."
"입 완전 나왔네."
"너한테는 뭐라고 안 하고, 나한테만 뭐라고 하니까..."
그래도 나랑도 친구인데, 너만 완전 감싸주고... 조금 서운했어. 야자를 마치는 종이 치자마자 서둘러 가방을 챙겨,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학교를 벗어난 우리였다. 남준이는 정말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력을 다해 달렸고, 공원에 도착해서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정말 서운하다는 듯, 제 입을 달싹이며 속에 담아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솔찌키! 나는 김우석이라도! 내 편일 줄 알았는데. 그거 나쁜 새끼야. 진짜. 남준이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솔찌키! 하며 우석이 뒷담을 깠다. 그리고 그러다가 나쁜 새끼라고 말한 것을 뒤늦게 곱씹고는 멈춰 서서는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헙. 나 욕했다. 미안해. 이제 안 할게. 나 원래 욕 많이 안 해. 라는 변명도 덧붙이면서. 참나, 요즘은 그런 말도 욕이라고 치나. 그리고 욕 좀 하면 어때. 얼굴 부대끼고 산 시간이 얼마인데. 나는 남준이의 말에 작게 웃으며, 괜찮다고 답해주려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욕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네. 나는 뭐만 하면 꺼져라, 미친놈이냐. 그랬는데. 남준이는 그거에 똑같이 받아친 적이 없었다.
"넌 왜 나한테 욕 안 해?"
"... 너 그쪽 플레이 좋아해?"
"아니!"
내 질문을 또 이상하게 받으며, 마주 잡은 손을 슬며시 놓는 아이였다. 나는 붉어진 얼굴이 밤중이라 보이지 않을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손을 내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너 그니까 내가 막 욕했어도, 똑같이 욕한 적 없잖아! 왜 그랬냐고! 지금은 뭐, 애인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친구일 때는? 너는 나 안 좋아했잖아. 나만 너 좋아했을 때! 그때도 왜 욕 안 했어? 응? 혹시라도 나를 정말 그쪽 플레이를 즐겨하는 사람으로 오해할까 싶어, 말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자 남준이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내 어깨를 타고 내려간 가방끈을 다시 올려주고서는, 허공에서 열심히 내저어지고 있는 내 손을 잡아채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너한테 어떻게 욕을 하냐."
"그럼 너한테 했던 나는 뭐가 돼..."
"가만 생각해보면, 나 좋아했다면서 하는 행동은 김우석한테랑 똑같았다? 너?"
"아니거든..."
"아니긴. 좋아한다면서 욕하고, 때리고, 두고 가고."
"..."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있나?"
"미안."
아주 대놓고 고개를 푹 숙여,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묻는 남준이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그랬구나. 나는 반성의 의미로 아이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멀어졌다. 미안. 하면서. 그러자 남준이는 그제서야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었는지, 다시 허리를 펴고서는 천천히 걸었다.
"너한테 욕하기 싫었던 거 보면, 나도 너 좋아했나보지."
"치, 좋아하는데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돼?"
"그러니까. 그래서 요즘 깨닫고 있어."
"뭘."
"나 사실 초코 아이스크림 되게 좋아하는데, 엄마가 사오면 그냥 너 초코 주고 내가 딸기 먹었던 거. 그거 사랑이었다고."
"너 초코 좋아해?"
"어. 그리고 또 비 오는 날, 무섭다고 거실에서 잘까봐 내가 먼저 거실 소파에서 잤던 것도. 그것도 사랑이었는데."
"그게 왜 사랑이야."
"거실에서 자면 너 다음 날 허리 아파하잖아. 그래서 그냥 내가 소파에 먼저 누워버렸거든. 내가 들어가서 재워주겠다고 하는 건, 좀 오버같아서."
"... 조금 감동이네."
"나 되게 많은데. 그런거?"
"하나만 더 말해봐."
"나 사실 안경 어디 뒀는지 알면서도 너가 잔소리하면서 찾아주는 게 좋아서, 맨날 모르는 척 했어."
"그게 사랑이야?"
"응. 너랑 했던 거,"
전부 다 사랑이었던 거 같아.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해주기 싫은 거 보니까.
나는 남준이의 말이 간지러워서, 당장 눈 앞의 아이의 품에 안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사랑해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이렇게까지 사랑을 해주니까. 남준이는 제 품에 무작정 안긴 나를 천천히 토닥여주며, 웃었다. 아이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얼라. 부끄러워? 나는 남준이의 물음에 아이의 복부를 아프지 않게 치고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더욱 크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제 입술을 스치며 물었다. 그래서 진하게 키스는 언제 해주는데? 지금이 타이밍 같은데.
아직 완연한 여름이 오기 전, 봄과 여름 그 중턱에서. 우리의 발자국이 수도 없이 찍혀있을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가까이 안았다.
무작정 사랑부터 하고 본 나와 지나고보니 사랑이었던 남준이가 같이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사랑이 이렇게나 너를 닮아도 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연초이다보니 해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줄었어요 ㅜㅜ 그래서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글을 쓰면서 마구마구 기운을 충전하고 있어서,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제 글을 보시면서 잠시나마 웃으시면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회차는 로맨틱 아이들이라면 저 계절에 저렇게 사랑하고 있겠다. 싶은 장면을 담고 싶었어요! 얼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사랑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애초에 플롯을 짤 때부터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설정했거든요. 그래서 아마 10회가 넘어가면서 어른이 된 아이들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회차가 다른 회차에 비해 짧은 이유는 다음 회차가 남준이의 꿈과 아이들의 과거와 관련된 회차이기 때문인데요...! 열심히 써서 오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또 무사히... 로맨틱하게! 몸 건강하게 마음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금방 또 보아요!
대상 축하해요. 우리의 뮤즈들!
FOR BTS. FOR ARMY
RoMantic
낭만적인 사람들
For 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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