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수술중' 팻말에 불이 들어온, 네가 있을 수술실 앞에서 나는 주저앉았다. 철퍽, 바닥을 짚은 곳에는 붉은 선혈이 지저분하게 묻는다. 이 선혈은 분명 내 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손을 들어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건 네 피였다. 네 머리에서 흐르던 피. 네 피로 물든 손바닥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서 현지가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 어떡해, 다니엘 어떡해…. 엉엉 우는 현지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았다. 왜 울어. 그렇게 심각한 상황도 아니잖아. 대체 왜 우는 거야. 조용히 해. 제발 그만 울어. 제발, 그만. 귀를 아무리 틀어막아도 현지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머리가 깨질 것 같던 즈음에,
"……울지 마, ㅇㅇ야."
성우가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울지 마.' 그 말에 숨이 울컥 차오를 정도로 감정이 북받쳐서 나도 결국에는 목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살려줘. 제발 다니엘 좀 살려줘, 성우야. 울음에 먹혀 듣기 싫은 목소리일 텐데도 성우는 그저 등을 토닥여주었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성우의 목소리도 가느다랗게 떨렸다. 어떡하지, 이대로 네가 깨어나지 못하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다니엘….
내가 생각한 '오늘'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말도 안 되잖아, 이 상황 자체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평생 믿지도 않았던 신에게 빌었다. 시간을 되돌려 달라고. 제발 시간을 되돌려 네가 다치기 전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그러면 어떠한 것도 다, 하겠다고. 영혼이라도 팔라면 팔겠다. 그러니까…제발.
정신없이 울다가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으로 덮쳐오는 암흑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성우의 목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물로 막을 내린, 이 비극적인 오늘은 우리가 사귄 지 천 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억상실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만난 강다니엘은 잘생기고, 또 남을 잘 챙기는 성격에 인기가 많던 아이였다. 그의 스스럼 없던 성격에 그와 친해지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이란 건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심지어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적으로 찾아온다. 어느 순간부터 다니엘이 계속 눈에 밟히더라. 언제는 집에 가서 그가 나에게 했던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밤에 혼자 설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꾹꾹 참아왔다. 그는 언제나 남을 챙겼고, 나도 그 챙김을 받는 아이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쓸데없는 의미 부여는 나만 더 힘들 테니까.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더 바라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냥 혼자, 이 관계를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꽤 특별한 사람이었나보다. 2014년 10월. 고등학교 1학년 2학기가 조금 지났을 무렵, 넌 내게 고백을 했다. 처음에는 믿기지도 않고 얼떨떨해서 한참동안이나 네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너는 부끄러운지 희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연신 손부채질을 했었다. 대답을 기다리며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네가 귀여워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네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나는 너를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때부터 너와 나는 만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일방통행을 끝내고 너와 사귀게 됐을 때는 그 어떤 때보다도 행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너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는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사귀는 것도 처음이란다. 내가 너의 첫, 여자랬다.
그렇게 알콩달콩 잘 사귀면서 힘든 고3 생활까지 다 마쳤을 때, 같은 대학에 가겠다고 죽어라 노력한 너와 나는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대학도 같이 다닐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주변에서는 웬만하면 사귀는 사실을 숨기라고 했다.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듯한 내 질문에 친구는 질색을 하며 말했다. 만약에 너네 헤어지면 어떡해! 그거 되게 골치 아플걸? 같은 과에 4년 동안…. 친구는 말하던 도중에 다니엘에게 한 대 맞았다. 죽을래? 우리가 왜 헤어져. 친구는 맞은 등짝을 어루만지며 다니엘을 흘겨봤었지.
그런데 친구 말고도 말리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그렇게 말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대학에 가서, 상황을 보고 괜찮을 것 같다 싶으면 알리자고 했다. 내 말에 너는 입을 삐죽이는 꼴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지만,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동네방네 다 소문 내고 싶어, 너랑 사귄다고. 누가 너한테 관심이라도 가지면 어떡해. 언제나 인기가 많은 너였기에 불안한 마음은 애써 누를 수가 없었다.
2017년 3월.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너는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 개강 총회 뒤풀이 때 신입생들 자기 소개 하는 자리에서 강 씨였던 네가 먼저 앞에 나갔었는데 하나같이 먼저 나온 질문이 그거였다. 여자친구가 있냐고. 그때 다니엘은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허락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여자친구가 있다고 하면, 그게 나라고 밝혀지면 뭔가 몰매 맞을 것만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말을 내뱉던 너의 목소리는 조금 시무룩했었다.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진 못했다. 눈치를 챈 건 나뿐이었다.
그때 그냥 1차만 하고 빨리 갈걸. 나는 아직도 그날을 후회한다. 나는 주량이 약한 편이다. 스무살이 되자마자 술을 마셔봤을 때 나는 반 병도 못 마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술에 취하면 아무 데나 쓰러져서 자고 기억을 못 했기에 웬만하면 술을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이상한 선배한테 걸려서 내 대학 생활은 완전히 꼬여버렸지.
옆에서 계속 술을 권하는 남자 선배 때문에 내 주량은 한껏 넘어간 상태였다. 거절을 하면 됐을걸, 계속해서 눈치를 주는 그 선배가 무서워 무식하게 받아먹기를 몇 번.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웬 낯선 곳에서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더라. 벌떡 일어나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와 잠시 끙끙 앓다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막 화장실에서 나오던 어떤 여자애는 나를 보더니 일어났네? 하며 속은 어떠냐고 나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순간 화장실에서 나온 게 남자가 아니라 여자란 사실에 본능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그 여자애는 자초지종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나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던 이 여자애는 현지였다. 성현지. 지금은 둘도 없는 내 친구.
현지는 내 맞은 편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선배가 주는 술을 곧이곧대로 받아먹는 나를 보면서 조금 불안하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미 취할 대로 취한 내가 정신도 못 차리고 그 선배의 어깨에 기댄 게 화근이 되었다고. 그걸 본 사람들은 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여자 선배들한테 꽤나 손가락질을 받았더란다. 취한 척 남자한테 꼬리 친다고.
그러다가 그 선배가 나를 데려다준답시고 나를 업고 술집을 나왔는데, 영 불안했던 현지가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뒤따라 나왔더니 그 선배가 이상한 길로 새고 있었다고 한다. 안 봐도 비디오인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안에 사람들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 다니엘이 나왔다고 한다.
그때 자신은 무서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이던 다니엘은 그 선배랑 뭐라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처음에 큰 소리 치던 그 선배는 이내 욕을 하면서 다시 술집으로 돌아가더란다. 그리고 다니엘은… 한숨만 내쉬었다고. 아…, 내가 미쳐. 안 봐도 그려진다. 다니엘의 얼굴이.
'아, 너 토했어. 성우한테.'
'누구?'
'옹성우.'
바닥에 주저앉아 집에 안 간다고 난리를 치는 나 때문에 다니엘이 애를 먹다가 뒤늦게 술집에서 나오던 성우라는 애가 도와준다고 나섰는데 하필, 그때 그 애한테 토를 했단다. 상황이 약간 노답이라 생각한 건지 현지는 자기 자취방에 나를 재운다고 데리고 왔다고. 현지는 오늘이 공강인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안 그랬으면 너는 오늘 학교에 가지도 못 했을 거라고.
아… 미치겠네.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땐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굉장히 큰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얼마나 취했으면 정신도 못 차리고 누군지도 모르는 애한테 토까지 하고. 다니엘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 것 같던 와중에 현지는 또 말했다. 다니엘이 일어나면 꼭 전화하래, 라고. 아… 어떡하지.
'그런데 둘이 되게 친한가봐? 다니엘이 너 엄청 챙기던데.'
'…….'
'어제 걔 좀 멋있더라.'
화장실 저쪽이니까 씻으려면 씻어! 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헨드폰을 들고 네 번호를 눌렀다, 지웠다 반복하기를 수십 번. 어차피 거쳐야 할 난관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네 번호를 누르고는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너에게 연결되는 신호음은 나를 조여오기에 충분했다. 네가 화를 내든 욕을 하든 뭐든 다 받아들이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보 같은 네 첫 마디는…
'속은, 괜찮아?'
였다. 어, 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바보같이 말을 더듬고 있을 때 너는 그랬지. 나오라고. 해장하러 가자고.
현지랑 같이 다니엘이 말한 식당에 갔을 때는 처음 보는 남자애도 같이 있었다. 누구…? 현지한테 누구냐고 물으니, 현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남자애는 이내 내게 말했지.
'안녕, 친구?'
'…어?'
'속은 좀 괜찮아? 이제 토는 안 하고?'
……아. 쪽팔리게도 그게 나와 옹성우와의 정식적인 첫만남이었다.
옹성우도 꽤나 스스럼 없던 성격이었다. 그날 다니엘이랑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다가 다니엘과 친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술집을 나가는 다니엘이 이상해 따라가봤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고. …으으. 내가 정말 미안해서 세탁비라도 주겠다고 싹싹 빌지만 성우는 쾌활하게 웃어넘겼다. 괜찮다고, 덕분에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신선한 경험이었다고. 지금 비꼬는 건가 살짝 의심이 가긴 했지만… 그는 정말 순수하게 새로운 경험이었다며 좋아하더라. 그것 때문에 우리가 친해지게 된 거 아니냐고 하면서. 첫인상은 살짝 이상했는데 그날 처음 말을 해봤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본 사람처럼 나는 금방 성우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는 다니엘이 신경 쓰여 계속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 어떡하지, 진짜.
계산을 다 하고 식당에서 나오기 전에 다들 사탕 하나씩 오물오물 입에 물고 나왔다. 성우와 현지는 나와 다니엘이 사는 곳과 정반대에 살았기 때문에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다음주에 보자! 인사를 하고 다니엘과 둘이 걷는데 그 어색한 침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되는 거겠지?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무서우니까. 다니엘이 어떻게 반응할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가니까. 사과는 해야지 싶으면서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그저 묵묵히 걸어가기를 몇 분째.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입 안의 사탕은 작아질대로 작아진 상태였다.
'ㅇㅇㅇ.'
'…어?!'
그때 나는 소스라치게도 놀랐지. 네가 먼저 말을 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깜짝 놀라던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너는,
'으이구.'
하며 나를 껴안았다. …뭐지? 생각지도 못한 너의 행동에 눈만 꿈벅이고 있는데 너는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술도 못 마시면서.'
'…….'
'다음에도 이러면 혼나, 진짜.'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네 눈빛은 여전히 따스했다.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너는 내게 화를 내지는 못할망정 내 걱정부터 해주었다. 그러나 혼자서 얼마나 애가 탔을 널 잘 알기에, 혼자서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너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는 그때부터 네게 미안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 그 마음을 최대한 쏟아내고 있는데,
'……!'
두 손으로 내 볼을 잡던 너는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촉, 닿고 떨어지는 네 입술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는데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던 너는 말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이제.'
'…….'
'가자, 집에.'
그 후에 버스가 오고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도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보다 대학교는 남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게 많이 와전이 되더라. 그 일이 있고 나서 학교에 갔을 땐 나는 이미 더러운 애가 되어있었다. 그 선배가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를 보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들은 내가 못 들을 거라고 생각할 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그것들을 들었고,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어쨌든 내가 처신을 잘못한 거니까. 내가 그때 정신만 똑바로 차렸더라면 이런 소문 따위 퍼지진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다 사실이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건, 동기한테든 선배한테든 고백을 받는 강다니엘의 모습을 볼 때였다.
천성이 워낙 착한 애라는 걸 안다. 절대 의도된 행동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나도 그 의도되지 않은 행동에 넘어갔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변에서 다니엘 잘생기지 않았냐, 애가 되게 괜찮다, 멋있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실제로, 내 눈으로 다니엘에게 고백을 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차라리 내 눈알을 뽑아버리고만 싶었다. 당연히 너는 거절을 했지만 나는 괜히 네가 미웠다. 너는 그때마다 말했다. 그냥 밝히자. 밝히자, ㅇㅇ야. 하지만… 비겁한 겁쟁이인 난 항상 고개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소문이 안 좋은데 여기서 너랑 사귀고 있다고 하면 애써 붙잡고 있던 내 대학 생활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네 옆에 있을 수가 없었다.
**
"왔니?"
안녕하세요. 어머님께 꾸벅 인사를 드렸다. 어머님은 오늘도 배려를 해주신다고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다. 쨍쨍하기만 했던 날씨는 이제 매섭게 찬 바람이 불 정도로 추워졌다. 괜히 다니엘의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오늘도 여전히 의식이 없다, 너는. 삐, 삐- 심장 박동을 체크해주는 기계음만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네 병실에 들리는 것도 어언 다섯 달째다.
기적적으로 너는 살아났다. 고비는 넘겼다는 그 말에 나는 의사의 손을 잡고 하염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두부 외상이 워낙 심해 언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고, 만약 깨어난다한들 후유증이 심하게 올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나는 네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했다. 그런데… 너는 꽤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 무덥던 7월에서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너를 살려준 것만 해도 하늘에 감사해야 할 일인데, 난 네가 깨어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건데 사람이란 게 참 야속하게도 더한 걸 바라게 된다. 그 맑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나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기다려야겠지. 수도 없이, 끝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겠지. 여전히 힘이 없는 네 손을 꽉 쥐어보았다. 오로지 나만이 힘을 주고 있는 이 상황이 낯설다. 언제나 내 손을 꽉 잡아주던 너였는데. 놓치기 싫다며 깍지를 끼고선 꽉 잡아주던… 너였는데.
지이잉-
끝도 없이 너와의 추억 속에 잠겨있다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다. 상대는 성우였다. 아,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애들이랑 만나기 전에 잠깐 들린다고 온 거였는데 어느새 약속 시간은 벌써 10분을 훌쩍 넘어가 있었으니까.
"여보세요?"
- 어. 어디야?
"…미안, 지금 빨리 갈게."
- 병원이야?
"……."
- 천천히 와. 괜찮으니까.
……응. 항상 나를 배려해주는 성우가 고맙다. 짐을 챙기다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너를 바라보았다.
너 없는 2학기가 오늘로서 끝이 났다. 나는 한 학기를 너 없이 보냈다. 네 빈자리는 너무나도 허전하더라. 그 누구도 네 자리를 채울 수는 없더라. 공허함은 한 시도 빠짐 없이 나를 덮쳤고, 나는 그 공허함 속에 빠져 숨을 헐떡이곤 했다. 이 공허함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네가 나를 꺼내주는 것, 그거 하나 밖엔.
"…내일 다시 올게."
이제 방학이니까 너를 보러 오는 일이 더 수월해질 거야. 잠든 네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병실을 나섰다.
네가 너무 보고 싶다.
**
"전부터 궁금했는데."
다니엘하고는 어떤 사이야? 현지의 질문에 순간 테이블에는 적막감이 맴돌았다. …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다시 물으니 현지는 말했다.
"처음부터 느꼈던 건데 그냥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한참 뜸을 들이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눈치챈 마당에 이 둘한테는 비밀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현지랑 성우였으니까. 정말 친한, 내 친구들이었으니까. 아… 역시 맞구나. 현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래? 성우에게 물으니 뭔가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진짜로 그런 사이라니 조금 놀랐다고 한다. 그렇구나….
…잠깐. 순간 불안해져서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어? 나랑 다니엘? 아직도 소문에 민감한 나였다. 벌써 두 명이나 눈치챌 정도면,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조급한 나를 눈치챘는지 성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도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야 붙어 있는 시간이 많았잖아. 그래서 나랑 현지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던 거고. 학교에서는 네가 다니엘하고 같이 있는 모습이 드물었으니까… 누군가가 의심이 됐으면 우리한테 물어봤겠지."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성우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는 밝히고 싶은 마음이 태반이었다. 솔직히 뒤풀이 때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그때 잘 넘어가기만 했더라면 나는 당장이라도 우리 사이를 밝혔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대학 생활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항상 너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대학이라도 같이 오려고 노력한 거였는데.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같이 있기는커녕 너는 나 때문에 다쳐 눈도 뜨지 못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힘들어 죽겠다. 하루에도 몇 십번씩 너 대신에 내가 다치는 상상을 한다. 나는 죄책감에 살 수가 없다.
술도 마셨겠다 나는 이야기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고등학교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나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여전히 너의 이름을 부르며 끝이 나고야 만다.
"다니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미치겠어.
우는 나를 보며 성우와 현지는 말이 없었다. 그저, 토닥이며 나를 위로해줄 뿐이었다.
**
2017년이 끝나기까지도 이제 3일이란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3일 뒤면 요란스러웠던 스무살이 끝나고 스물 하나가 되겠지, 우리는. 스물 하나에는 우리 예쁜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때는 우리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나는 이제 겁쟁이처럼 뒤에서 숨어 있지 않을 것이다. 당당해질 것이다. 네가 깨어나면 그때는 다 밝혀야지. 우리 사귄다고. 우리 정말 서로를 좋아한다고. 너도 좋아하겠지. 분명… 너도 좋아하겠지.
너를 보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핸드폰을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다니엘 어머님이었다.
"………!!"
잠깐. 어머님이 전화를 거셨다는 건 설마….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만큼 속이 울렁거려서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쳐대며 겨우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손이 얼마나 떨리던지 전화를 받는 그 순간에도 핸드폰을 몇 번이고 놓칠 뻔했다.
"…여보세요?"
- …ㅇㅇ야.
"네, 어머님."
- 다니엘 지금 깨어났어.
아……. 그 말을 듣는데 정말 눈물이 툭, 하고 흐르더라.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다가 이 좋은 날에 웃지는 못할 망정 울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 소매로 눈물을 슥 닦아내고는 얼른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갈게요, 어머님. 다니엘은 어때요? 괜찮데요? 묻고 싶은 질문이 너무나도 많다. 가방을 메고 이제 막 신발을 신으려던 찰나였다.
- ㅇㅇ야.
"네."
-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
"……네?"
어머님의 한숨에는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제야 어머님의 목소리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불안감이 온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핸드폰은 듣기 싫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마음도 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
"야, ㅇㅇ야…!"
믿을 수가 없다.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이건 너무, 잔혹하잖아. 무슨 정신으로 병원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진정 좀 하라며 나를 잡아채는 현지와 성우의 손을 뿌리치고는 나는 얼른 네가 있을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그 안을 들어갔을 때에는 인기척을 느낀 건지 너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로 인해 너와 나는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오랫동안 감겨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눈은 여전히 참 맑았다. 저 맑은 눈과 마주하게 된 것은 다섯 달만이었다. 자그마치 다섯 달.
"……."
"……."
왜 아무 말도 안 해? 나 왔잖아. 지금 내가… 왔잖아. 너는 그냥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네가 밉다. 네가 너무나도 밉다.
…아니지.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갈 차례다. 언제나, 네가 먼저 다가왔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한테 다가가 보려고 한다.
"…다니엘."
난 아직도 네 이름 석 자만 불러도 가슴이 미칠 듯이 뛰고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어김없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아 입술을 꽉 깨무는데, 뒤이어 들려오던 네 대답은 내가 깨물고 있던 그 입술마저 허탈하게 놓쳐버리게 만든다.
"……누구세요?"
너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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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아련한 게 쓰고 싶어서 쓰는 클리셰 범벅 글입니다.
▶ 뻔한 글 싫어하시면 가볍게 넘겨주세요!
▶ 구구절절 설명이 많죠. 1편이라 그래요.
▶ 내용이 많죠. 1편이라 그래요.
▶ 첫 글이라 떨려요 (도키도키) 읽고 댓글 남겨주시면 저는 기쁨의 댄스를 출 것 같아요.
▶ 귀중한 시간 내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하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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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mt 보고 느낀건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