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조명도 작은 조명도 여러 개, 본인을 둘러 싼 수많은 카메라들, 팔짱을 낀 채로 혹은 집중하는 눈빛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당당한 자세로 여러가지 모습을 취하는 학연. 여느 연예인과 다름 없는 프로의식이 느껴지는 화보 촬영장. 유난히 맑은 날씨가 학연과 아주 잘 어울렸다. “고개를 좀 더 숙이는 게 나은 거 같죠.” “응, 네가 불편해도 화면으로는 이게 훨 예쁘다.” “...이렇게?” “시선은 조금 멀리.” 연출을 담당하는 감독과 함께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의견을 맞추고 있던 학연을 뒤로 오늘도 어김없이 검은 모자를 쓴 택운은 먼 발치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망고 음료수를 든 채로. “야!!” “아! 깜짝아!” “여기서 뭐 하냐?” 다름 아닌 원식이었다. 택운과 같은 대학교 동기. 서로 군 입대 시기가 달라 택운이 졸업할 때까지 원식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케이블 방송국에서 마주쳤고 둘은 서로가 하나도 안 변했음에 너무 웃기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그런 감정에 이전보다 더 뜨거운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동기이긴 했지만 원식이 맡았던 프로그램들이 연이어 대박을 치면서 원식은 편집과 제작을 맡을 수 있었고 택운의 실력과는 다르게 맡았던 프로그램들이 잘 안 되고 아쉽게도 아직까지 막내 작가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차학연? 유명하지. 쟤 여자들이랑 엄청 많이 자고 다녀.” “...응? 정말?” “근데 스케쥴만 들어가 있으면 연예인은 연예인인 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한다더라. 그... 요즘 뭐라고 하더라? 태생부터...” “본 투 비 스타... 그런 거?” “어어, 그런 거. 쟤는 딱 그런 타입이야.” “잘생겼잖아... 성격도 좋고, 가끔 출근할 때 보니까 원래 스타일도 좋던데...” “뭐냐... 무슨 사랑에 빠진 여고생이냐.” “조용히 해... 다 들리겠어.” 둘 쪽으로 다가오는 학연을 보고 소스라치게 몸까지 떠는 택운이 의아스러운 원식이다. 아니나 다를까, 학연이 원식을 불렀고 택운은 저도 모르게 망고 음료수를 입고 있던 패딩 안 주머니에 쏘옥 넣어버렸다. “저희 소속사에 신인 애들 예능 잡고 있던데, 다 김 감독 님 프로그램 넣어도 되는 거죠?” “어유... 웬 감독 님이에요! 저도 차 배우 님이라고 부를까요?”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요? 음... 어, 어디서 많이 뵀는데. 혹시.” “...아, 안녕하세요! 브이티에스 정택운입니다!!” “그래요. 택운 씨. 우리 본 적 있잖아요.” “아, 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기억하죠.” 즐거운 둘의 대화 속에 슬그머니 눈치만 보던 택운을 학연이 발견하고 상냥하게 웃어 주며 손을 내밀었다. 생각치도 못한, 자신을 기억해 주는 학연에게 택운은 얼굴까지 새빨개져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저번과는 확연히 다른 반가움이 느껴지고 택운은 기분이 좋아서 계속 웃음을 띄웠다. “그래요.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아... 혹시 택운 씨 명함 있으면 주세요.” “아...” “아니, 차 배우 님도 참...! 작가 님 놀리는 것도 아니구, 막내 작가가 명함이 어딨어요.” “어... 놀리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연락처라도 알려 주세요.”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택운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 못 하고 그대로 연락처를 학연에게 넘겨 주었다. 학연은 의미심장한, 하지만 따스한 미소와 함께 간단히 고개만 숙이고 유유히 둘 밖을 빠져나갔다. 학연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택운은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어... “야, 엄청 이례적인 거 알아?” “...뭐가 또...” “차학연이 이렇게 사적으로 번호 물어보는 거... 게다가 너 방송에서 뭐 직책 있는 것도 아닌데...” “몰라... 아무도 몰라...” “뭐? 뭘 모른다는 거야.” 5년 전에는 라디오에서 어떤 팝송을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서, 4년 전 여름에는 나한테 주던 그 망고 음료수를 준 게 좋아서, 2년 전 겨울에는 세월이 지나도 안 변하는 그 마음가짐이 좋아서, 지금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그걸 누가 알아. 아무도 몰라. 그렇게 한동안 택운은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 “그 영화 또 봐?” “보고 또 봐도 재밌는 걸.” “뭐가 그렇게?” “볼 때마다 내용이 다른 느낌이야.” “...” “계속 알고 싶어져.” 재환이 샤워 후 아직 물기가 있는 머리를 손으로 대충 털면서 미소 지었다. 꼭 누구랑 똑같네. “요즘에 사진 잘 안 찍나 보네?” “거울로 내 모습 맨날 보잖아.” “네 사진도, 풍경 사진도 말이야.” “바빠. 나.” “내 애인 바쁜 건 나도 잘 알지. 근데...” “근데?” “...누구야? 정택운이란 사람.” 네가 어떻게? 학연이 재환을 쳐다 보았다.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이었지만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게 보인다. 재환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학연의 옆에 앉아 품을 끌어안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믿고 있는데 자꾸 밖에서 딴 짓 거리 한다는 얘기 들려 오면 섭섭하잖아.” “...” “감독들도 아니고, 연출진들도 아니고, 제작사 사람들도 아닌데 왜 번호를 물어 봤어요?” “...내일 비 온대.” “형이 언제부터 그렇게 그런 사람한테 번호를 물어 봤어요?” “우산 챙겨. 다용도실에 우산 남는 거 엄청 많아.” “데뷔할 때부터 엄청 재수 없고 차가워서 아무도 너 신인이라고 생각 안 한거 너도 알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마를 짚고 재환을 떼어낸 학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방으로 간 뒤 올려진 포트를 들고 물을 따랐다. 재환은 곧이어 학연을 따라와서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우리, 결혼하면 이런 짓도 그만할 거야?” “...내가 너랑 결혼을 왜 해.” “사망 신고하고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결혼하자.” “...미쳤구나.” “저번에는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나가. 너 보기 싫어.” “...” “지금은.” 학연이 재환의 볼을 톡톡, 두드리고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이내 안에서 문을 잠그는 철컥, 소리까지 들렸다. 재환은 그대로 다리가 긴 의자에 앉아 자신의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난데, 나 케이블 프로그램 있는 거 다 잡아 줘요. 웬만하면 신인들 많은 쪽으로.” * 어색한 공간. 택운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듯 꾸역꾸역 음식을 입 안에 밀어넣었다. 검붉은 색이 매력적인 하우스 와인을 잔에 따르던 재환이 그 모습을 보고 웃어보였다. “입에 맞아요?” “네, 네! 엄청 맛있어요! 저 이런 거 처음 먹어 봐요, 사실...” “아. 그러시구나.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재환 씨도요...” “제가 택운 씨 프로그램에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요즘에 방송하는 프로그램들의 취지를 잘 모르겠어서에요. 다들 하나같이 밀착하고, 리얼리티니 뭐니... 너무 지겹잖아요.” “...네.” “우리 팬들은 이제 나 그렇게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아...” “근데 택운 씨 프로그램은 나레이션 말고 대본이 아예 없다면서요.” “...아, 아예 없지는...” “그 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그리고 택운 씨 친구.” “...” “원식 씨한테도 택운 씨 칭찬을 워낙 들어서.” “아, 원식이... 아닙니다. 저 아직 많이 부족하구요...” “그건 제가 판단해도 될까요? 택운 씨 안 부족해요. 편집도 본인이 맡는다면서.” “...네.” “저 재밌게 봤어요. 얼마 전에 종영한 거.” 택운이 쑥스럽다는 듯 웃어보이고 재환은 그에 맞춰 택운의 앞에 놓여있던 접시에 깨끗한 칼로 정갈하게 썬 고기를 올려주었다. 알면 알 수록 겸손하시고 좋은 사람이시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장을 입은 지배인이 둘의 자리에 와서 질문한다. “식사 다 하셨으면 디저트, 준비해 드릴까요?” “아...” “늘 드시던 걸로 준비해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 이제 나갈 거에요.” “아, 네. 그럼.” 내가, 우리가 늘 먹던 걸 너한테 줄 수는 없지. 다른 거랑 틀린 거랑 구별은 해야지. *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네! 말씀은 감사하지만! 네. 먼저 가 볼게요.” “알겠어요. 잘 들어가요, 그럼.” 차는 출발하고 택운은 그 차를 쳐다보다 몸을 돌리고 깜깜한 밤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차학연이 내게 번호를 물었고, 대형 소속사 기획 실장이 나와 식사 제안을 하고... 하지만 재환은 알고 있을까. “...어! 어!!” 얼마 전에 종영한 프로그램, 우리 프로그램들 중에는 없다는 걸. “...” -“여보세요?” “...” -“정택운 씨 번호 아닌가요?” “...맞, 맞는데요.” -“아. 택운 씨. 저예요. 차학연.” “...네...” -“지금 잠깐 전화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익히 들어온, 네가 차학연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제가 학연 씨 있는 쪽으로 갈게요. 어디세요?” -“아, 그럼 제가 문자로 주소 찍어서 보내 드릴게요.” “...네.” -“그리고 괜찮으면, 오실 때...” 나는 그렇게나 네가 소중히 여기는 차학연을 갖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라는 걸, 한 남자라는 걸.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문자 보내 주세요.” - 마땅한 제목이 없어....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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