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은 조용했다.
봄기운을 담은 따사로운 햇살이 창틀 안으로 번져 들어와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그에 학연은 잠시.
조금 갑작스럽지만.
어린 아이들과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갑자기 무작정 어디론가 소풍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멍청하게도 부질없었다.
자신이 놓인 처지만큼이나 고통스럽게.
학연이 무딘 침을 목 안으로 쓸어 삼킨다.
자신의 책상 앞에 의자를 내어준 그가 재환에게 눈짓으로 권유했다.
앉아.
그에 재환이 느리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연이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어디서 왔다고 했지?”
“……노르웨이요. 알타에서 살았어요. 핀마르크 주에 있는 아주 작은 곳이에요.”
“추운 곳이구나.”
“네.”
재환은 잔뜩 구겨지는 발음으로 어수룩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초등생 수준의 언어 실력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학연은 개의치 않아하며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둘의 옆에서 전기 포트가 열을 올리며 보글보글한 기포 방울들을 터뜨렸다.
“한국에 온지는? 세 달 조금 넘었다고 했나?”
“네.”
“거기서 학교는 다니지 않았던 거니?”
“…네. 대신.”
그림을 그렸어요.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이요.
학연이 끓어오르는 전기 포트의 내용물을 한 번 흘긋거리곤 책상 서랍에서 티스푼과 함께 티백 두 개를 꺼냈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서랍을 닫은 그는 역시나 가벼운 손짓으로 티백의 포장지를 부욱 잡아 뜯었다.
칙칙했던 공기에 선선한 향기가 퍼진다.
잠시 그 향기를 음미하던 학연이 포트로 손을 뻗어 머그잔 두 개에 물을 부었다.
그 안에 티백을 털어 넣던 학연이 무의식적으로 묻는다.
“그림?”
“네. 상도 많이 탔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모국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장난스런 학연의 말에 재환이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인 거 알지?”
“듣기에 많이 불편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냐. 걱정 마. 내가 국어 선생님인데 뭐가 걱정이야.”
학연이 씩 웃으며 머그잔 안으로 티스푼을 휘저었다.
강하게 풍겨오는 짜릿한 허브의 향에 재환이 무심코 인상을 찌푸린다.
따뜻할 때 마셔.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머그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환의 눈빛이 언뜻 미세하게 흔들렸다.
후룩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신 학연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재환의 모습에 동그랗게 눈을 치뜬다.
“왜 안 마셔? 혹시 허브 알레르기 같은 거 있어?”
“아뇨…….”
“그럼 왜? 아, 거기서는 이런 거 잘 안 먹나?”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요.”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요.
멍한 표정으로 음절을 곱씹던 학연의 낯빛이 일순간 어두워졌다.
이 순간에도 재환의 눈빛은 검은 물을 머금은 것처럼 투명했다.
잠시 아무 말이 없던 학연이 서둘러 재환의 앞에서 머그잔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말을 하지.
재환이 아랑곳 않으며 심심하게 눈동자를 굴린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깊은 어둠이 학연을 끌어당겼다.
“끝나고 데리러 올게.”
“응.”
“또 자지만 말고. 수업 열심히 듣고.”
“응.”
그 둘은 언제나처럼 깍지를 낀 손으로 계단을 올라 교실에 도착했다.
상혁의 말에 여자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학연의 앞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태도다.
교실로 들어가는 모퉁이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던 상혁의 시선이 잠시 안타까움에 물들여졌다.
그 일말의 시선은 곧 파랗게 피멍이 번져있는 여자의 고운 피부로 향한다.
잔뜩 상처를 받아버린 시선이 딱하게 여자를 바라봤다.
“내가 얼굴은 다치지 말랬지.”
“…….”
“여자애 얼굴에, 이게 뭐냐……. 속상하게.”
“…….”
“이따 약국 들리자. 약 발라줄게.”
“…괜찮아.”
상혁이 힘껏 인상을 찌푸리며 보드랍게 여자의 콧대를 쓰다듬었다.
곧 그 속뜻을 알아차려낸 여자는 얄팍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나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안 아프기는.”
“진짠데…….”
“…누가 또 괴롭히려고 하면 바로 나한테 와서 말해.”
“…….”
“오빠가 혼내줄게.”
개구지게 웃으며 중얼거린 상혁이 마지막으로 여자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새까만 감촉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행복함에 젖은 여자의 얼굴이 상혁을 바라봤다.
“이따 보자.”
“응.”
“수업 열심히 들어. 분명 자지 말라고 했어. 난.”
“알았어. 알았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채색을 풍기던 여자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어버리는 순간은 오직 상혁을 마주하고 있을 때다.
그 사소하고도 무지한 감정의 변화를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상혁은 보았다.
자신이 유일한 미소의 주인이라는 것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가야겠다. 이따 봐. 교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올게.”
“너 빨리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괜찮아도 너는…….”
“괜찮아. 어차피 자습이야. 좀 늦어도 돼.”
“그래?”
“응.”
“그럼 나는 갈게. 상혁아. 이따 끝나고 보자.”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리던 상혁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몇 걸음을 움직이면 자신의 반이 보인다.
여자의 교실 바로 옆.
일 학년 오 반이다.
상혁이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교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교시가 뭐더라.
약간의 담소를 나눈 뒤였다.
오 교시의 마침을 알리는 종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재환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중한 태도에 학연이 물씬 기쁨에 찬 미소를 짓는다.
“다 좋은 애들이야. 애들이 엄하게 대할 일은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알아요.”
“……그래. 그럼 내일 교실 가기 전에 잠깐 교무실로 올래?”
“그렇게 할게요.”
정상적이지 못한 그의 음정은 계속해서 위태롭게 삐그덕거렸다.
그러나 굳이 들춰내지 않으며 학연은 방긋 웃음을 지었다.
“조심히 가고. 어려운 일 생기면 선생님한테 바로 바로 얘기해.”
“네. 안녕히 계세요.”
재환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혀 담임에게 인사를 고한다.
그런 제자를 바라보던 선생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가 감겨지기를 반복한다.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제자의 뒷모습을 뒤쫓는 시선이 바빴다.
학연이 냉큼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머리칼들을 곱게 정돈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상혁과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교실에 들어선 여자가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비어있는 교실.
아.
아니구나.
저기 교탁 뒤에서 불량한 자세로 뻑뻑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있는 아이들 몇몇이 보였다.
무시하자.
무시하면 그만이다.
생각하며 묵묵히 걸음을 옮긴 여자가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시간표를 확인하니 지금이 체육시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운동장으로 향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콧대 때문에 뒷목이 뻐근했다.
그저 얼른 책상에 고개를 묻고 단잠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앞에서 킥킥거리며 농담을 따먹고 있는 여자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천천히 책상 위로 고개를 엎었다.
잇닿는 책상의 감촉이 딱딱해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책상에 눈꺼풀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억센 악력으로 인해 고개가 꺾였다.
저절로 컥컥거리는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과하게 꺾인 뒷목이 아팠다.
구부정한 시야를 똑바로 돌리며 여자가 주범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바로 눈 앞을 돌아다니는 담배연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즐거워 보이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툭.
차례대로 담배들이 교실 바닥 아래로 짓눌려졌다.
“이 미친 년이……. 너 아까 교무실 갔다 왔지?”
“…아……!”
빠르게 뒷목을 잡아 내려치는 손길에 여자가 순간적으로 막힌 신음을 내뱉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대여섯의 무리가 일시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누가 몸 굴리는 년 아니랄까봐. 신음 하나는 죽인다?”
“야. 됐고. 너 차학연한테 다 까발렸냐?”
“……이거…. 놔.”
꺽꺽대며 내뱉어지는 문장의 조합에 무리들이 가소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 다음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그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주시하기에 바빴다.
"뭐하는 겁니까."
Adore Scene
흘러가지 않을 우리들의 시간
![[빅스] Adore Scene 2014년 5월 26일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e/e/8/ee8d070fa17cfad4ff9b6c11a736542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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