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1억
과거_
정국이 집에 온다던 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윤기는 혼자가 아닌 웬 중년의 남성과 같이 왔고
정국은 문을 열어주었다. 거실까지 걸어 들어온 윤기는 괜히 뻘쭘한지 뒷머릴 긁으며 정국에게 말했다.
"그.. 나만 온 게 아니라."
"……."
"이분은.. 서울대학병원 정신과에 있는 음.. 임현중교수님이라고.."
교수라는 사람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선 선하게 웃어보였고, 정국은 어이가 없는지 살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형도 내가 미친 거로 보이는구나."
"그뜻이 아니야. 네가 많이 힘들어보여서.. 계속 우울해보이고 불안하니까.. 한 번만.. 한 번만 상담 해보는 건 어때."
"……."
윤기가 간절하게 부탁하자 정국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정국의 방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의사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도 정국은 대답이 없었다.
몇시간이 지나도 나오지않는 의사에 윤기는 거실 쇼파에 앉아서는 불안한지 손톱을 물어뜯고있었고
곧 의사가 나오자 윤기는 벌떡 일어나서는 의사에게 다가갔다.
"……."
"말을 아껴요."
"…네?"
"말을 잘안 한다구요.."
윤기에게 와보라며 거실 끝으로 간 의사에 윤기는 의사를 따랐다. 의사의 표정이 좋지않자 윤기의 표정도 굳었다.
혹시라도 안좋은 결과가 나올까 두려웠다. 정국이 들을까 작게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에 윤기는 절망적인 눈을 했다.
"대충 중간에 얘기 하는 걸 보고, 눈빛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어요.
하루에 16시간은 자고, 죽고싶다는 얘기도 많이 했다 그랬잖아요."
"…네.저번엔.. 수면제 몇십알 먹고.."
"쉽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람이 무기력해지면 하루종일 자려고 하는 건 기본이에요.
눈도 보면.. 위태해요. 절대 혼자 두면 안 되구요.. 저희 병원에 입원 하는 게.."
의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더 이어지는 의사의 불안한 말들에 윤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 28화_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공허한 마음에 신발장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았다.
앉은 상태로 한참을 멍만 때리다 뒤늦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의 웃음이 그에겐 절망감을 주었고, 상처였다고 한다. 그 말이 나에게도 상처였다.
그는 내가 상처 받을 거란 걸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아직 그를 잘모른다.
왜 나는 그를 잘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더 나는 걸까. 내일부터 나오지말라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또 내 머리를 울린다.
이상하게 심장이 너무 아파왔다. 숨도 잘 안 쉬어지는 게 너무 이상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고 아픈 건.. 내가 받은 상처가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 전정국의 차에서 내린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선 나에게 가라는
전정국의 눈을 잊을 수 없다. 급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전정국의 이름을 찾았다.
"받아.. 받으라고.."
정국은 주머니에 울리는 핸드폰을 무시하고선 운전대를 잡은채로 앞만 보았다.
그쳤던 눈은 어느새 또 잦게 내렸고, 정국은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작은 공간엔 담배연기가 가득찼고 또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자 정국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화면에 뜨는 이름은 익숙한 이름이었고 전화를 받지않고 아무렇게나 뒷좌석에 던진 정국은 하나를 다 피워가자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정국이 엘레베이터에서 내리자 윤기가 집 문 앞에 기대 서있었고, 정국이 아무표정도 없이 가만히 윤기를 바라보자
윤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4시간 기다렸다? 전화는 왜 안 받냐? 어디 갔다와."
"……."
윤기를 지나쳐 비밀번호를 치자 윤기는 야야- 하고 정국을 불러보았다.
정국이 대답도 않고 집으로 들어가면 윤기도 따라 정국의 뒤를 밟았다. 어두컴컴한데도 불구하고
정국이 방으로 들어가려고하자 윤기는 뒤에서 귀찮게 떠들었다.
"야 불은 좀 키고 살아라. 사람이 불을 키고 살아야지. 엉?"
"가."
"우리 얘기 좀 해. 정국아 저녁은 안 먹었지?"
"제발 가.."
"10분만."
정국이 윤기의 말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하자 윤기가 정국의 손목을 잡았고, 정국은 겨우 뒤 돌아 윤기를 보았다.
"나 4시간 기다렸다니까?"
"내가!…."
"……."
"기다리라고 했어? 제발 좀 가라고! 나 좀 그만 괴롭혀."
"……."
2년만이었다. 정국이 소리를 높인 것도, 표정을 다르게 한 것도.
"그래. 차라리 그렇게 화 좀 내."
"……."
"나는 2년동안 너 보면서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그냥 꼭두각시 인형 같더라. 누군가 너를 조종하는 것처럼.
쉬는 날이면 15시간은 기본으로 자고, 스케줄 있는 날에는 억지로 웃으면서 스케줄 하고.
어떻게 사람이 2년동안 한 번도 안웃어."
"……"
"예전에는 수도없이 장난치고, 웃던 애가 갑자기 이렇게 무너져서는 죽을 것 처럼 사는데.
어떻게 네가 가란다고 가냐고."
"제발.. 형."
"……."
"죽어도 내 인생이야. 형은 형 인생대로 살아."
"……."
"주변에 누가 내 앞에 나타나면 죽이고싶어.
아무리 형이라도 죽이고 싶어지니까. 제발.. 부탁이야."
"……."
"가줘… 응?"
정국의 말에 윤기는 초점을 잃은듯한 눈을 했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방에 들어가려는 정국을 잡지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름이가 옆에 있어서 괜찮아진 거 아니었어?"
"……."
"나는 네가 여름이 옆에 두고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어."
"…기분탓이야."
"한 번도 안 웃던 녀석이 여름이 옆에서는 작게라도 웃어주고, 장난 받아주는 게.
그게 기분탓이야?"
"응."
"……."
"노여름. 관두라고 했어."
"……."
"나도 그만할게. 어차피 계약 4개월 남았잖아.
재계약 할 생각도 없었고."
"전정국. 너 팬들은 생각 안 해? 아예 음악을 안 하겠다고?"
"어. 끔찍해."
"……."
"날 사랑해주는 팬들이 가끔은 끔찍하게 무서워. 그 팬들이 내 노래 덕에 생긴 거니까.
그래서 노래도 싫어져. 왜 내가 팬들 생각하면서 관둘지 말지 정해야 돼."
"…너 원래 안 이랬어."
"이제 가."
정국이 문을 닫자 윤기는 머리를 망치로 쎄게 맞은 것 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하게 팬을 생각하던 정국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줄 생각조차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문을 열려다 윤기는 곧 손을 거뒀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복도 벽에 붙어있는 콘서트장에서 찍은 팬들 사진들에 윤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온 화영은 다리가 아프다며 종아리를 주무르다가도 웬일로 집에 있어도 안 누워있는
여름이 신기한지 여름이에게 호오- 하고 장난스런 말투로 말을 걸었다.
"뭐냐? 이불 밖은 위험해~ 하던 애가 앉아있네."
"일은..? 어때."
"그냥 그래. 근데 사장이 별ㄹ.. 너 울었냐?"
"응."
"왜?"
"차에서 내렸어."
"뭐?"
"차에서 내렸다구."
"그래서 울었어?"
"응."
시련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선 더이상 말을 하지않는 여름에 화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에서 내린 게 슬펐다고..? 들어오자마자 속옷을 벗어 바닥에 툭- 던져놓은 화영이 다시금 여름을 보았다.
저 눈이면 몇시간은 운 눈인데.. 다 울고나서 저렇게 멍 때리냐 왜.. 불안하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 시켜먹을까?"
"나 슬퍼."
"왜 왜.. 차에서 내린 게?"
"나보고 이제 나오지말래."
"뭘.. 전정국이?"
"내가 싫대. 내가 웃는 게 그 사람한텐 절망적이었대."
"뭐…?"
"당장이라도 가서 달래주고 싶은데. 내가 정말로 싫어질까봐.
그래서 못 가겠어. 화영아."
갑자기 툭- 하고 터져버린 여름에 화영이 야야.. 하고 여름이의 옆에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었다.
"뭔 이유로 나오지 말라고 해? 뭔 일 있었어? 엉?"
자꾸만 웅얼 거리는 소리는 분명 슬프다는 말이었다. 아무말도 못 하고 끅끅 거리기만 하는 여름을 꼭 안아준 화영은
으휴.. 미친년.. 하고 혀를 쯧쯧 찼다. 그렇게 싫다더니 가서 사랑을 하고 왔네..
여름이 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전정국에게 전화를 걸자 화영이 미친년아! 하고 말리려고 했지만
전정국이 전화를 받지않자 화영은 안심하는가 싶다가도 여름이 걱정 돼 보면
여름이는 석진과 헤어졌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고있었다.
태형은 이틀이 지나서 결국엔 참지 못 하고 밤이 되어 화영이 일하던 술집에 찾아갔다.
술집에서 어슬렁거리자 사람들은 꽁꽁 싸맨 태형을 알아보았다.
유니폼을 입고있는 사람들중엔 화영은 없었고, 태형은 고개를 갸웃 하고선 뒤를 돌아보았고
코 앞에 서있는 키가 태형과 비슷한 여자 알바생이 태형에게 말했다.
"화영언니 관뒀는데."
"네?"
"화영언니 찾아왔잖아요. 맨날."
"……."
"김태형 맞죠? 언니랑 동창이라던 10년 친구."
"아, 네."
"관둔지 얼마 안 되긴 해요. 친구라면서 그것도 모르나."
여자는 태형을 신기해하지도 않으며 콧방귀를 낀채로 방향을 틀었고, 태형은 어이가 없는지 두눈을 크게 뜨고선 그 여자를 보다가도
급히 술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다.
애꿎은 화영의 카톡 프로필만 보던 태형이 '아씨'하고 핸들을 주먹으로 툭- 쳤다가 빠앙- 하고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다 차 안을 들여다보자 태형은 안이 안 보이는 걸 알면서도 얼굴을 가렸다.
"아니. 이 여자가 관두는데 말도 안 해? 내 밀당이 안 통한 건가? 진짜 어렵네."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정국이 만나서 잘 얘기할게."
"…혹시. 오빠 전화는 받아?"
"아니. 전원 꺼져있더라."
"…아."
"내가 이틀내내 찾아가봤어. 불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거 보니 잘 살아는 있더라."
"다행이네."
"스케줄 빼느라 힘들었다. 진짜.. 정국이 하나 안 나온다고 방송국에서 난리 났어."
"이틀 다 뺀 거야..?"
"응. 이틀내내 밥도 안 먹고.. 어제는 하루종일 자더라. 내가 들어와도 몰라."
"……."
"관둔대."
앞뒤 다 잘라먹고 관둔다는 말에 여름이 응? 하고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윤기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선 작게 웃으며 말했다.
"가수 때려친대. 그렇게 좋다던 음악이 무섭댄다. 팬들도 무섭고."
"……."
이유는 대충 알 수 있었다. 팬들이 무서운 건, 채수빈을 떠올려서 일 거라 생각한다.
채수빈을 괴롭힌 팬들은 상당히 많았다. 기사 댓글에 대부분은 정국의 팬들이었고, 모두 수빈의 욕 뿐이었다.
살지말라는 말과, 죽일 거라면 말은 기본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인터넷에 둘의 이름을 치면 기사가 뜨는데
그 기사 댓글을 보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많이 달려있다.
"난 가봐야겠다. 재계약 때문에 요즘 되게 바빠서."
"계약이 끝나가?"
"응. 나는 한달 남았고, 정국이는 4개월. 정국이는 재계약 안 할 것 같고.."
"……."
"아무튼.. 너무 속상해 하지마. 어떻게든 정국이 마음 돌릴게."
"너무.. 힘들게 하지마."
"응?"
"전정국 아무래도 많이 힘들어 보여서.. 너무 건들지 말아줬음 해서.
힘들 때.. 오히려 누가 건들면 더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있으니까. 적당한.."
"알았어. 적당히 괴롭히라는 말이지?"
"……."
"정국이를 잘 아는구만. 걔 귀찮게 하는 거 딱 질색하거든."
"……."
"갈게."
윤기도 많이 힘이 빠져있었다. 그걸 알기에 여름도 별말 않았다.
괜히 여름이는 또 나려는 눈물을 꾹 참고선 얼굴을 두손으로 가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전정국을 본지 겨우 한달이 다 되어갔다. 그 사이에 나는 전정국에게 익숙해진 게 분명했다.
이틀째 그를 못 보자 그의 걱정이 우선이었다.
혹시라도 들을까 전정국에게 음성메세지를 몇통이나 남겼다. 나도 모르는 순간에 말이다.
윤기오빠에게는 항상 연락이 왔다. 오늘도 잘 있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너 전정국 좋아하지."
"…아니야."
"아니라고하면 진짜 거짓말이다 그건."
"……."
"아무리 위태하고 불안한 사람이라도 관심이 없으면 누구던지 신경은 끄게 되어있어."
"……."
"넌 전정국을 어느순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거야. 맞지?"
누굴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상처가 씻겨지지않아 두려웠던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찾아가봐. 그렇게 맨날 핸드폰만 붙들고 있으면 전정국이 아냐?"
"…그 사람은 날 싫어해."
"싫어했음 진작에 잘랐어."
"그 사람은 내 웃음이 괴롭대."
"괴로웠음 진작에 잘랐다니까."
"근데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차에서 내렸어."
"가버린 차는 언제든 잡을 수 있어. 모르는 차가 아니라, 아는 차잖아."
"……."
"무슨일 있냐고 물어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안 알려주는 입 무거운 우리 노여름씨!"
"……."
"얼른 가보셔. 난 안 서운해. 너 이해해. 네 선택은 항상 옳아."
"화영아…."
"아, 나한테 눈물 낭비하지말고. 전정국 그 셰키한테 가서 눈물 쏟아. 여자의 눈물은 무기야.
오케이?"
화영이의 말에 나는 이틀만에 외출복을 입을 수 있었다. 옷을 천천히 입고선 신발을 신는데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에게 가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냥 뒤 돌아 포기하려고 하면 화영이는 먹던 맥주를 마시며 발로 나가란듯이 문을 가리킨다.
"아무래도 못ㄱ.."
말을 끝마치지도 못 한채 창밖을 보았을 땐.. 어두운 거리에는..
"눈..이다."
하얀 눈들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싫다던 눈이 말이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 눈이 싫다던 그의 표정이 떠오르고, 가슴 한켠이 아프면서 쿵쿵 뛰는 게
아마 나는 전정국을 잊지 못 하고 결국 그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안 돼.."
"눈? 왜 안 돼. 너 눈 좋아하잖ㅇ.."
"눈 오면 안 돼.. 안되는데.."
"눈이 오면 왜.. 안 돼.. 어어 야! 핸드폰 가져가!"
화영이가 급히 핸드폰을 던져주기에 그 핸드폰을 받고선 급히 뛰쳐 나왔다.
나는..
"……"
그를 좋아하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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