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貪慾)
1.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
2. <불교> 십악의 하나.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을 이른다.
| 알파오메가 세계관 | ||
알파 : 우수한 유전자를 뜻하며 사회 최상위층 계급에 속해있다. 부와 권력을 쥔 이들은 오메가들이 반응하는 특유의 힘을 지녔으며 피라미드 구조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주도한다. 오메가 : 사회 최하위층 계급군에 속한다. 이들은 대개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으며 절대적인 약자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알파와 오메가는 계급군 자체가 나뉘어진다. 상대가 알파일 경우 본인의 성(姓)과 상대방의 성(姓)에 관련 없이 임신할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동성간의 임신도 가능하다. 이들은 알파들이 반응하는 특유의 힘을 지녔다. 관계 시 상대가 알파일 경우 휘둘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타 : 아주 평범한 사람들 (=머글)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대개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며 알파나 오메가가 내뿜는 호르몬(페로몬)을 눈치채거나 알아차릴 수 없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만 반응하게 되는 구조이다.) 물론 오메가가 히트 싸이클일 경우 알파가 아닌 베타에게 매달릴 수도 있겠지만 알파처럼 섹슈얼함에 노출되거나, '거의 반 미친' 상태로 관계를 맺는 일은 극히 드물다. 히트싸이클 : 오메가들의 발정기를 뜻한다. 히트 싸이클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억제제를 먹거나 주사를 맞는 둥 억제할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일단 한 번 히트 싸이클에 걸리면 오메가들은 '발정' 하게 되며, 특히 알파와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된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성적인 의사는 중요치 않다. '탐욕'에서는 오메가를 화인(花人), 알파를 양인(陽人), 히트사이클은 '개화기(開化期)로 표합니다. |
00.
"전생에 그대가 지은 죄가 너무 많습니다"
"...네?"
동생의 수능이 코앞으로 찾아와 108배를 드리기 위해 절로 찾아온 엄마를 따라오며 바람도 쐴 겸, 스님께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 찾아왔던 나였기 때문에 심히 이 말은 나에게 당황스러움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다니, 그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애초에 전생 이야기- 따위를 믿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눈썹을 대놓고 찌푸리며 스님을 바라보았다. 삐딱한 나의 표정을 보며 기분이 나쁘셨을 법도 한데 평온한 미소를 유지하며 나와 눈을 마주하는 스님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나는 사회에서 살기 힘든 계급에 속해있는 오메가였다. 아니, 조금 특이한 특성을 가진 오메가이기도 했다. 알파들의 페로몬을 맡으면 그대로 몸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하는 오메가들과 달리 나는 그들의 냄새를 얕게 맡기만 해도 온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구역질이 나왔다. 실제로 학교에서 몇 없는 알파들이 자신들의 우월감을 뽐내기 위해 장난식으로 복도에서 페로몬을 다량으로 내뿜었을 때가 있었는데, 얼굴을 붉히며 홀린 듯이 그들을 바라보던 오메가들과 달리 나는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뛰쳐 나가 하얀 위액이 나올 때까지 가슴을 치며 토악질을 했다. 차라리 평범한 오메가처럼 알파들에게 반응을 한다면 억제제를 먹으면 될텐데 이건 아예 알파들과 접촉을 하지 말라는 뜻인지 더욱 나를 힘들게 했다. 나를 배려해줄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자신들의 계급에 심취해 페로몬을 멋대로 뿜고 다니는 알파들만 존재할 뿐. 그들 때문에 죽어나가는 건 나 뿐이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조금만 코끝에 알파 페로몬이 스치면 현기증이 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침내 학교에서 매일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자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 말을 하는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베타라 그런가, 가족들은 나를 잘 이해해주지 않았다. 학교는 그만두지 말라는 엄마에 억지로 다니다가 결국 강당에서 옆에서 알파가 대놓고 내뿜는 페로몬을 다량으로 맡아 쓰러진 후 엄마는 자퇴서를 같이 내주러 교무실로 향했다. 돌연변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듯한 선생님의 눈빛도 꼿꼿하게 받아내며 집 안에서만 살았다.
왜 나만 이러는 걸까, 돌연변이도 아니고. 병원도 찾아가 봤지만 전에 알파들에게 크게 당한 적이 없냐는 물음만 받을 뿐이었다. 전혀 없는데, 알파들과 접촉조차 해본 적 없는 나였는데. 선천적으로 이럴 수가 없다는 것또한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런 답을 꺼내면 괜히 그들에게 조사 대상만 될 것 같아 대충 그런 것 같다고 말한 뒤 병원을 나선 적만 수없이 많았다.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는 이 병같은 증후군을 살아가는 나를 위해 조금은 힘이 되는 말을 해줄 줄 알았기에 용기를 내고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전생에 지은 죄가 많다는 얼토당토치 않은 소리라니. 몸에 저절로 힘이 빠져 지금 108배를 드리고 있을 엄마를 당장 끌고 이 절을 나오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늘의 뜻입니다"
"..."
"재정비할 기회가 온 것 같네요"
바깥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스님을 바라보자니 머리가 저절로 아파왔다. 전생, 재정비, 과거. 모두 내가 처음 들어보는 것이고 그저 미신이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설득력도 없었고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다. 어째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왔는데 더 머리가 복잡해진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괴짜이신 건가 생각이 들기도 전 목탁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미소를 잃지 않는 그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팔뚝을 문질렀다. 오한이 들어서 때문일까,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전혀 빈말이었지만. 어느 정도 비꼬는 뜻을 담았기에 어쩌면 스님 표정이 조금은 찌푸려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인자한 미소를 놓치지 않고 있으셨다. 그 미소를 보니 괜히 내가 쓸데없이 열을 쏟은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워진 것 같았다. 그래, 나를 생각해주셔서 하는 말씀이니깐. 무슨 말인 지는 전혀 모르겠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곱게 받아들이자 생각하고 고개를 숙인 채 등을 돌렸다. 엄마한테 최대한 빨리 집에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악!"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나도 모르게 주저앉게 되었다. 정말 순식간에 몰려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통이었다. 마치 누군가 도끼로 머리를 내려찍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와 입도 제대로 벌리지 못한 채 그 주저앉아 끙끙댔다. 도와달라고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뇌를 누군가 조종하는 기분이었다. 바닥을 긁으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신음을 흘리는데 뒤에서 고운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이렇게 아파서 누워 끙끙 앓는데 도와주지도 못할 망정 한가하게 목탁이나 두드리다니,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목탁만 두드리지 말고, 신고 좀 날리라고 욕이라도 날리고 싶었건만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에 그저 바보같이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머리에서부터 내려와 이제는 가슴을 조여오는 고통에 숨을 쉬기가 어려와 손톱에 피가 맺힐 정도로 바닥을 세게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탁, 탁-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오는 평온한 목탁 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것 같았다.
*
눈을 떴을 때 전혀 처음 보는 곳이라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는 절이 아니라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진 처음 보는 기와가 얹혀진 궁이 있었고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 조차 풀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보자니 서울은 아닌 것 같은데. 지끈 울리는 머리를 붙잡고 비틀거리는 무릎을 겨우 지탱하며 일어서는데 문득 내가 입은 옷차림이 얇은 소재의 한복이라는 것을 깨닫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볼을 세게 잡아 당기자 얼얼한 통증이 반겨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소매를 보자 내가 입고 있던 두꺼운 스웨터는 온데간데 없어진 상태로 팔이 다 비추는 하늘하늘한 하얀 옷이 자리잡고 있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우선 상황이라도 판단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순간 발끝에서부터 몰려오는 열기에 몸이 그대로 굳었다. 저절로 욕을 짓이기며 탄식을 내뱉었다. 히트사이클, 오늘 히트사이클 예정일이었는데 약을 복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스님과 말씀을 나누고 분명 다시 절로 들어가 약을 먹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는데 지금 이 낯선 곳으로 온 탓에 약도 못 먹는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이 곳에서 히트사이클을 맞이하게 될 것 같은데 그건 최악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알파가 지나가지 않을 거라는 보장조차 없었다. 전혀 나오지 않는 해답에 손톱을 깨물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그런 나를 놀리는 건지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여졌다. 본격적으로 히트사이클을 시작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전혀 적응할 수 없는 열기였다. 몸이 뜨거워지자 방금까지 춥다고 생각한 것이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몸이 새빨갛게 물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조금이라도 달래자고 생각했다. 정말, 이대로라면 천박한 꼴을 보일 수도 있겠다 싶어 그저 빨리 꿈에서 깨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밖에 난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여인이구나"
열기에 사로잡혀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한 건지 곧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하얀 피부에 까만 머리를 한 사내. 알 수 없는 이 장소에서 직책이 높은 건지 얼굴과 차림새가 고급스러웠고 곱상했다. 그가 입은 푸른 곤룡포가 밤바람에 휘날려 수려한 곡선을 만들어냈다. 그 선을 타고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알파 향기에 코를 막고 그저 낯선 이를 노려보는 것밖에 난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이상한 점은, 알파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던 내가 향기를 맡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만 할 뿐이지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깊게 생각할 정도로 정신이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몸을 더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이 향기에 휘말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내에게 추한 꼴을 보일 수가 없으니깐.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사내가 반 정도 몸을 숙인 채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개화기를 맞은 여인이 밤중에 돌아다니면 어떻게 되는 줄 모르는 것이냐"
"..."
"옷차림을 보아하니 후궁 같은데"
"..."
"누구에게 가려던 것이냐"
짐에게 오던 것은 아닌 것 같고. 위압감이 담긴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거짓말이라도 해서 대답을 해야할 것 같았지만 난 애석하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짐, 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왕... 이라고 표현되는 것 같은데 저절로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설마 내가 떨어진 곳이 낯선 곳의 궁이라는 말인가. 꿈이라고 해도 너무 생생한 것만 같아 입술만 깨물고 이미 새하얗게 물들여진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는데 도무지 말이 되지가 않아 사고회로는 정지된 상태였다.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데 여기서 거짓말을 할 정도로 머리가 굴러갈 리가. 이 상황조차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머리가 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다가오지 말라는 표현을 하기 위해 팔을 들어 엑스 자를 그리자 눈썹이 묘하게 찌푸리는 사내였다.
"오지, 오지 마세요"
"..."
"올 때마다 향, 향이..."
실제로 그가 이렇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상태라도 달콤하고 자극적인 향이 코끝에 스쳐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진심으로 앙탈, 이런 것이 아니라 오지 말라는 뜻으로 적대감을 뿜자 이해가 되지 않다는 듯 헛웃음을 뱉은 사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이기도 했지만 워낙 눈동자가 깊어 꿰뚫리는 기분에 시선을 피하여 밤바람에 휘날리는 풀꽃들만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 사내가 장난이 반 정도 담긴 미소를 짓기 위해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
"정녕 짐의 도움이 필요 없는 것이냐"
알파들은 오메가들의 히트사이클을 그저 관계를 맺는 것으로 잠재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했다. 바로 자신의 날카로운 페로몬을 흘려 오메가에게 충격을 가해 몸의 열을 없애는 것. 정말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상대방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알파들이 하는 방법이었는데 애초에 오메가들을 하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그들이 오메가들에게 이런 방법을 쓸 리가 없었다.
"여기서 계속 가만히 있으면 지나가던 병사들이 너를 탐할 수도 있을텐데"
"..."
"짐의 여인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볼 수만 없지 않겠느냐"
짐의 여인? 방금 나를 자신의 여인이라 칭한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냐는 듯 나와 빤히 시선을 마주한 그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약을 올리는 건지 그가 일부러 천천히 오는 것 같아 마침내 눈에 눈물을 매단 채 그를 쏘아보자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나와 시선을 마추며 다시 무릎을 꿇은 그가 조금씩 강한 페로몬을 흘리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코끝을 스치는 날카로운 페로몬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아래서부터 점점 몰려오는 고통을 참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그럴수록 코끝에 스치는 강한 알파의 향기와 온몸을 휘감는 뜨거운 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덜덜 떨자 겁먹지 말라며 낮게 속삭여준 그의 팔이 나의 어깨에 둘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만 참거라"
"아...!"
"쉬이, 조금만. 그렇지"
곧 가슴을 조여오는 큰 고통에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크게 들썩이자 그런 나의 부드럽게 등을 토닥여주며 나를 품에 더욱 꽉 끌어안는 사내로부터 청량한 비누향기가 미세하게 나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바들바들 떨 때마다 겁먹지 말라는 듯 등을 쓸어내리며 괜찮다고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잔잔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고통을 참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큰 통증에 시달렸기 때문일까 몸이 가벼워지며 히트사이클의 존재가 몸으로부터 천천히 떨어질 때즈음 머리가 어지러우며 눈꺼풀에 돌이 올려진 것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 건가. 탄식을 흘리며 꿈 치고 너무 생생하게 꿨다, 이 생각을 하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끝까지 나의 어깨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그렇게.
*
"폐하, 어디를 다녀오시는 겁니까!"
얌전히 호롱불 하나에 의존한 채 서책을 읽으시길래 마음을 놓고 잠시 외출을 했건만, 갑자기 사라진 황제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귓가에 카랑카랑 울리는 신하의 높은 목소리에 잠시 눈썹을 찌푸린 정국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에 가져다댔다. 곧 푸른 곤룡포를 다 구긴 채 창백하게 질린 여인을 들며 안으로 들어오는 정국을 발견하자 신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그런 신하의 반응을 이해하는 건지 머쓱한 표정으로 잠시 웃음을 터뜨린 정국이 추욱 늘여진 여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내 잠시 밖에 나갔다가 개화기를 맞이한 여인을 마주했다네"
"이 여인은..."
"아는 것이라도 있느냐"
신하도 어쩌면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흐음- 탄식을 내뱉은 정국이 침소 위에 여인을 곱게 눕혀두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느 하나 특별하지도, 딱히 끌리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후사를 책임지기 위해 아마 신하들이 무턱대고 뽑은 가련한 운명을 맞이할 후궁들 중 한 명일 것이다. 딱히 여자에 관심이 없는 정국의 관심을 갖기 위해 긴 세월을 바치다가 시름시름 앓을 꽃들 중 하나. 그런 정국을 잘 알기에 신하 또한 이게 꿈인가 싶어 눈만 끔벅끔벅 뜨며 조용히 여자를 내려다보는 정국의 곧은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히 처음이었다. 정국이 저렇게 오래 여인을 바라보는 것을. 개화기를 맞이한 후궁들이 달콤한 향을 내뿜으며 곱고 하얀 살결을 보일 때마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정조를 지키라며 호통을 쳤던 그였는데 개화기를 맞이한 여인을 직접 들고 침소로 옮겼다고? 그를 오랜 시간동안 옆에서 봐왔기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진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 관심이 아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저 향기가,"
채 끝맺음을 맺지 못하는 문장을 말하며 입을 꼭 다문 정국이 그만 나가보라고 말을 하자 살풋 웃음을 숨기며 방을 나서는 신하였다. 정국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 복잡하기만 했다. 그저 자신은, 서책을 읽다가 코끝을 스치는 처음으로 맡아보는 강렬한 단 향기에 꿀을 찾는 나비처럼 그것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 것 뿐이었다. 본래 딱히 개화기를 맞이한 여인의 향기를 맡아도 전혀 동하지 않았던 정국이었는데 처음으로 곤룡포가 흐트러지도록 발걸음을 빨리 하며 그 향기를 따라가는 자신을 발견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체통을 지키기 위해 향기가 가까워지자 옷을 단정히 정리하며 무성한 풀을 밟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그 끝에는 개화기를 맞이한 여인이 있었다.
''오, 오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을 취해달라는 건지 그 달콤한 향기를 잔뜩 내뿜으며 자신을 거부하던 그 모습이 다시 떠오르자 정국이 실소를 터뜨렸다. 이 궁에서 후궁들이 얼마나 자신의 애정이 고파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옷을 벗으며 찾아오는 지 잘 알고 있던 정국이었기에 오히려 자신을 거부하는 여인이 조금은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이마냥 심술궂게 자신의 페로몬을 더 흘렸고 자신의 페로몬에 이성을 잃으며 헐떡이는 여인을 보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가학심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해 자신마저 당황스럽게 했다. 엄격한 황궁 안에서 페로몬을 흘리는 것은 하늘같은 황제가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화인 페로몬에 익숙해지고, 자신의 페로몬을 조절하는 법을 철저하게 배웠던 정국이라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영문도 모른 채 곤히 잠든 여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자니 혼란스러웠다.
"잠을 잘 때조차 향을 흘리면 어쩌자는 것이냐"
숨을 마시고 뱉을 때마다 달콤한 향이 정국의 코끝을 괴롭혀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쩌다가 내가 꽃에 휘말려서. 실소를 터뜨린 정국이 손을 조심스레 들어 여인의 턱선을 훑었다. 찰나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
재업 맞습니다 예전에 보신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오메가 전쟁이 수위가 좀 있어서 다른 공간에 연재할까 고민이 많은 상태입니다 ㅜㅜㅜㅜ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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