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나.”
이상하게 다른 때와 같은 말투며 목소리였지만 이제는 들으면 들을 수록 종인의 목소리가 달달해지는 것 같았다. 경수는 귓가에 내려앉은 종인의 물음에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빠른 속도로 깜빡였다. 갑자기 급 속도로 창피함이 번졌다. 머릿 속으로 눈을 감았던 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경수가 발버둥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왜 눈을 감았지? 뭘 기대했지? 경수가 양 손을 머리에 가져다대고 옆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온 몸이 불타는 것 처럼 화끈거렸다.
종인은 갑자기 일어난 경수의 아담한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키고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중인 경수의 손을 잡았다.
“눈 감길래 졸린 줄 알았지. 근데 너 지금 뭐 하는데.”
“말 시키지 마.”
“……왜?”
옆머리를 쥐어뜯던 경수가 바닥에 나뒹구는 꽃들을 주워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플라스틱 통을 가방에 챙겨 넣고 가방을 등에 메며 신발을 챙겨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멀뚱멀뚱 앉아있던 종인이 아래로 내려간 경수를 정자 위에서 내려다 보며 말했다.
“어디 가.”
“집.”
“벌써? 아, 피곤해? 오래 걸어서.”
“…….”
“정씨 아저씨네 밭이 좀 넓었지? 너 여기서 너네 집 가는 길 알아? 혼자 갈 수 있나.”
가방 끈을 손으로 꼭 붙잡고 서서 경수가 괜히 땅바닥을 신발로 질질 끌었다. 작은 돌맹이들이 신발에 밟혀 직직, 소리를 내었다. 종인이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신발을 챙겨 신은 뒤, 계단을 천천히 밟으며 내려왔다.
“여기서 너네 집까지 얼마 안 걸린다. 자, 봐 봐. 마을 회관. 보이지?”
경수의 옆에 서고 종인이 저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경수가 실눈을 하고 목을 쭉 앞으로 빼었다. 종인이 가리킨 곳에 마을 회관처럼 생긴 흰색 건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경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인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기 시작했다. 마을 회관이 점점 가까워졌다. 종인의 말처럼 정자에서 부터 마을 회관까지는 꽤 가까운 거리였다.
마을 회관을 조금 지나 경수네 집에 도착하자, 종인이 대문 앞에 서서 경수를 쳐다보았다. 경수가 그런 종인을 지나쳐 대문을 밀었다. 종인이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한 쪽 손을 꺼내 흔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경수가 뒤를 돌아 열린 대문 사이에 선 종인을 쳐다보았다. 종인은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해. 들어 가. 피곤하다면서.”
“…….”
“내일 학교에서 보자.”
경수가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종인이 몸을 돌려 집으로 가버렸다. 경수의 입이 달싹이다, 이내 대문과 함께 꾹, 닫혀버렸다.
학교에서 보자는 말, 먼저 하려고 했는데…….
경수가 조금 아쉬운 듯 닫힌 대문 앞에서 멀어지는 종인의 등에 대고 의미 없이 손을 흔들었다.
“경수 왔니?”
현관문이 열리고, 경수의 엄마가 대문 앞에 선 경수를 향해 말했다. 경수가 얼른 현관문으로 달려왔다. 다녀왔다는 말을 하려는데 경수의 엄마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손에 들린 그거. 뭐야?”
“아…….”
“꽃? 뭐하러 꺾어 왔어. 뿌리가 없어서 시들거리잖아. 버리고 들어와라. 꽃 가지고 싶으면 말해. 그냥 하나 사줄테니까.”
“…….”
“그리고 경수 너 점심 약 안 먹었던데 엄마가 다른건 빼 먹어도 약은 빼먹지 말라고 했지? 빨리 나으려면 약을 잘 먹어야 돼. 조금 있으면 저녁 약도 먹어야 하니까 얼른 가서 약부터 먹어. 아, 손 씻는거 잊지 말구.”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경수의 엄마가 차갑게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는 종인이 꺾어다 준 꽃을 손에 꼭 쥐고 서있다가, 먼저 집으로 들어간 엄마의 눈에 띄지 않게 꽃을 품에 숨겼다. 그리고 후다닥, 현관에 신발을 벗어놓고 거실을 빠르게 지나쳐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랐다.
“뛰지 마라! 먼지 날려!”
거실에서 주방으로 가던 경수의 엄마가 소리치자, 경수가 짧게 대답하고 방으로 쏙 들어갔다. 경수는 죽어서 축 늘어진 꽃을 방 창문 옆에 있는 피아노 위에 있던 나무 상자에 넣었다. 나무 상자 안에는 종인이 맨 처음 경수의 귀에 꽂아 주었던 노란색 잡초꽃도 들어있었다.
“…아!”
뿌듯한 눈으로 상자를 내려보던 경수가 얼른 제 귀를 만졌다. 종인이 두 번 째로 귀에 꽂아 주었던 꽃은 없었다. 아무래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경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아쉬운 듯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에게 꽃을 받은게 처음이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경수는 사라져 버린 꽃이 매우 아까웠다.
“경수야.”
경수의 방문이 벌컥 열리고 경수의 엄마가 들어왔다. 경수가 화들짝 놀라 나무 상자 뚜껑을 얼른 닫고 엄마를 향해 돌아섰다. 경수의 행동을 수상하게 여기며 경수의 엄마가 팔짱을 끼었다. 경수는 움츠려든 채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았다.
“뭐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놀라?”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점심 약 먹으라고 가지고 왔어. 가방은 언제까지 메고 있을거니?”
경수의 침대 옆 작은 협탁 위에 가지고 온 약을 올려두며 경수의 엄마가 말했다. 경수는 그제서야 제 가방 안에 종인이 따다 준 자두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경수가 침대 앞으로 와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 문을 열었다.
“엄마, 이거…….”
가방에서 꺼낸 자두 서너 개를 엄마에게 건네고 경수는 가방을 침대에 올려두었다.
“왠거야? 어디서 났어?”
“……친구가 줬어요.”
당연히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의 표정이 조금 무섭게 변하자 또 풀이 죽은 경수가 작게 대답했다. 탐탁치 않은 얼굴로 자두를 가져간 경수의 엄마가 말했다.
“넌 아무 거나 먹으면 안된다고 엄마가 그랬잖니. 이거 먹었어?”
“그……! ……아뇨. 안 먹었어요. 오늘 만난 친구가 줘서 가지고 온 거에요.”
“그래, 잘했어. 함부로 먹지 마. 알겠지? 누가 뭘 주면 이렇게 가지고 와. 먹어도 되는지 확인해야하니까.”
“…….”
“어서 약 먹어라.”
“네.”
“그리고.”
경수의 방에서 나가려다 말고 경수의 엄마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는 익숙하지만 익숙한 만큼 경수의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의 표정을 읽은 경수가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걸 알아차렸다.
“여기 동네 애들이랑 너무 어울리지 마. 너한테 좋으라고 급한대로 시골로 오긴 했지만, 어차피 오래 안 살거야. 정 붙이면 나중에 너만 마음 아파.”
“…….”
“엄마가 지금 더 좋은 곳 알아보고 있어. 곧 학교 방학이지? 방학 동안 병원에 갔다가 검사 받고, 전이랑 별 다를 거 없으면 다시 이사 갈테니까. 효과 없으면 빨리빨리 옮겨야지. 그래야 네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을 거 아냐.”
예상했던 말들이지만 막상 들으니 마음이 아파 경수의 입이 비죽, 앞으로 나왔다. 속으로 반박하고 싶은 말들이 경수의 입 근처까지 올라왔다.
엄마가 알아보는 더 좋은 곳에는 드러눕기 좋은 정자가 있나요? 금복이도 걸어다닐 수 있는 논뚝은요? 엄마의 손에 들린 맛있는 자두가 열리는 넓은 자두 밭도 있어요? 근사한 잉어가 사는 연못이랑, 예쁜 눈을 가진 순이도 살아요? 그 좋은 곳엔 오두막은? 그것도 있어요? 커다란 통에 무거운 시멘트를 가득 담아 열 번도 더 걸어다니면서 만든 시멘트 바닥으로 된 오두막이여야 해요. 종인이랑 저랑 둘만의 비밀 장소인 그곳도 엄마가 알아보고 있는 더 좋은 곳에 있어요? 그런 곳은……세상 어디에 가도 없을텐데.
……경수는 속으로 치솟는 투정들을 애써 꾹 눌러 담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의 대답에 경수의 엄마가 한 번 더 약을 먹으라는 당부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경수도 알고있다. 몸이 너무 나빠서 이곳으로 온 것을. 엄마의 말처럼 이 집과 이 동네에서 오래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있었다. 심지어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싫어했던건 바로 경수 자신이었다. 경수에게 시골이란 냄새나고, 깨끗하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고, 촌스러운 사람들이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였다. 시골 특유의 좋지 못한 냄새가 있지만 자두 밭이나 꽃에서 맡았던 향기가 가득하고, 속이 다 비출 정도로 깨끗한 연못이 있으며 강과 개울이 있다. 생각보다 불편하지도 않았다. 학교에 있는 아이들도 서울에서 사귀었던 친구들처럼 멋지고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경수에게 있어서 시골은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서울에서 살던 집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이곳에는……종인도 있었다. 징검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꽃도 꺽어주고, 예쁘다는 말이 남자에게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종인이 있다. 서울에는 종인만큼 잘생기고 멋진 친구는 없었다. 예쁘다는 말은 여자애들한테만 쓸 수 있다고 알고있는 친구들 밖에 없었다. 오두막을 비밀 장소로 알고 있는 친구도 없고, 어른들께 인사를 잘하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종인만큼 좋은……종인만큼 좋아하는 친구도. 없었다.
침대 위에 앉아 협탁에 놓인 약을 집어든 경수는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졌다. 눈에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려졌다. 경수가 인상을 쓰며 울지 않으려 했지만, 서러워져서 그만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엄마가 미웠고, 병을 가진 제 몸도 미웠다. 손에 든 약도 미웠다. 경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몸만큼 약한 경수의 마음이 눈물로 쏟아져나왔다.
그날 밤, 경수는 슬픈 꿈을 꾸었다. 집안 물건을 모두 싣은 트럭에 탄 경수가 트럭이 출발 하기 전 뒤를 돌아보자, 잘 익은 자두를 품에 안은 종인이 서 있었다. 종인의 옆에는 딱 한 번 본게 전부인 금복이도 있었고 순이와 순이의 새끼도 있었다. 종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경수를 향해 가지 마! 하고 외쳤다. 트럭이 점점 속도를 높였다. 종인과 금복이, 순이와 순이 새끼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경수가 울면서 종인에게 가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경수가 꿈에서 깨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종인은 교실로 들어서자, 아직 자리가 빈 경수의 자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수가 한 번도 종인 자신보다 늦은 적이 없었던 이유였다. 자리를 잠깐 비운건가 싶었지만 책상에 가방이 걸려있지 않은 걸 보니 아직 학교에 오지 않은 듯 하였다.
“…….”
이상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가까워지고 담임 선생님도 방금 교실에 들어왔는데, 경수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데도 경수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 이상한건 경수가 오지 않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담임 선생님의 태도였다. 종인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종인의 이름이 불렸다. 넋을 놓고 경수의 자리만 보고 있던 종인이 한 번 더 제 이름이 들려오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김종인이, 잠이 덜 깼나?”
“그게 아니라……. 저, 선생님. 경수가 아직 안 왔는데요.”
“경수? 아, 경수 아프덴다. 그래서 오늘 학교 못 온다고 연락왔어.”
“예에? 아파요?”
“내일이나 모레쯤이나 되야 올꺼다. 자, 다음.”
담임 선생님의 출석이 이어졌다. 종인은 경수에 대한 걱정이 앞서서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주말 내내 동네 이곳 저곳을 종인과 함께 돌아녔던 경수인지라 종인은 경수가 더욱 더 걱정 되었다. 오래 걸어서 피곤하다던 경수의 목소리가 멤돌았다. 무리해서 그런건가? 종인의 머릿 속에 경수가 왜 아픈지에 대한 생각들이 꽉 찼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수업 준비에 한창이었지만 종인은 계속 경수를 생각했다.
하교 시간이 되어 집으로 가던 종인이 징검다리 앞에 서자 느닷없이 경수가 떠올랐다.
……아니. 아니었다. 느닷없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 종일 경수가 보고 싶었던 종인이었다. 점심 시간에도 그렇고, 학교가 끝난 뒤 텅 빈 교실을 봤을 때도 그랬다. 느닷없는 것 보다는 지금껏 보다 더 많이 경수가 보고싶어진 것 같았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경수가 떠올랐고 물속에 있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에도 경수가 떠올랐다. 종인은 징검다리를 건너며 계속 경수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건, 종인의 집 앞이 아니라 경수네 집 앞이였다. 종인은 자신도 모르게 와있는 경수네 앞에 멀뚱히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찡그렸다. 안 그래도 집이 먼데……. 종인은 발길을 돌리려다 멈추고 경수네 집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색 커튼이 쳐있어서 안은 보이지 않았다. 종인은 몇 번 더 집으로 가려다 말고 이층 창문을 보았다. 그러다 경수네 집 앞을 지나가는 어르신의 부름을 듣고나서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너는 왜 이제 오나. 학교에서 벌 섰나?”
“벌은 무슨.”
집에 도착해 마당으로 들어선 종인을 보며 장독대로 향하던 종인의 엄마가 말했다. 종인은 백구를 한 번 쓰다듬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야, 야, 종인아.”
“왜.”
“너 혹시 오늘도 저기 새로 이사온 집 아들내미랑 싸돌아 댕기다 늦었나.”
“뭐라?”
스뎅 그릇에 된장을 가득 퍼 담아 온 엄마의 말에 신발을 벗던 종인이 신발을 벗다말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종인의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 된장이 담긴 스뎅 그릇을 놓고 야채가 담긴 소쿠리를 들고 나와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향했다.
“어제 그 누구야, 최씨 아줌마가 늬들 봤다그러데. 징검다리서도 장난치면서 놀고 아주 이짝 저짝 싸돌아 댕겼다고.”
“싸돌아 댕긴거 아냐, 그냥…….”
“맞다, 아니다는 집어 치우고. 왠만하면 그 집 자식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아라.”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왜?”
신발을 마저 벗던 종인이 어이가 없어 화를 내며 물었다. 친구를 사귀는데에 있어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엄마였기에 종인은 엄마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그래야 되는데?”
“그 집 아들내미가 몹쓸 병에 걸려서 왔다고 사람들이 다 수근거리더라. 잘못하다 너도 병에 옮으면 어쩌누. 너도 고생, 이 어미도 고생 아니겠어?”
“그런 거 아냐! 얼마나 펄펄 나는데!”
“날거나 말거나 몹쓸 병에 걸렸다 안 그러냐, 병에. 서울에서 온 거 생색 내느라 그 집 어미고 아비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고, 동네 어르신 만나면 인사도 이렇게, 대충대충 한다던데. 그 아들내미라고 별 수 있겠남? 그 부모에 그 자식이겠지 뭐. 수경이 엄마가 그러더라. 학교에서는 말 한 마디도 안 한담서?”
종인의 엄마가 무심하게 고개만 까딱거리며 대충 인사하는 모양새를 흉내내었다. 그리고는 종인과 같은 반인 수경이네 엄마에게 전해 들은 것을 떠올리며 계속 덧붙였다. 듣다 못한 종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거든? 경수는 인사 잘 해!”
“그 집 아들내미 이름이 경수인가보구만? 이사를 왔으면 왔다고 우리집 애 이름이 뭐라고 얘기를 해야 알지. 어쨌뜬, 마을 회관이랑 가까운데서 사는데 회관 한 번 나오지도 않고 하는 짓이 미운 털 박히게 생겼다드라. 어미가 미우면 새끼도 미운 법이지. 지 아들 아프게 키워놓고 병 낫게 한답시고 여기 까지 왔으면 그래도 잘 부탁한다, 뭐 이런 인사는 해야 할 꺼 아니냐. 서울에서 온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참, 하여튼 우리 아들한테 병 옮기기만 해 봐라, 내가 그냥……!”
“아, 진짜. 엄마!”
“왜? 종인이 너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일찍이 정 떼라. 다른 거는 얻어와도 되지만 병은 안된다. 알았지?”
종인이 버럭 화를 내기도 전에 수돗가에서 야채를 모두 씻어 낸 종인의 엄마가 소쿠리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종인이 씩씩대다가 방으로 가기 위해 마루 위에 올라섰다. 쾅쾅쾅. 마루를 밟는 종인의 발소리에 화가 가득 담겼다.
“어쭈? 그래가지고 어디 마루 부셔지겠나? 더 밟아 보시지!”
종인의 발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나온 엄마가 소리치자, 종인은 들으라는 듯이 제 방문을 일부러 큰 소리가 나도록 열고 닫았다.
“그래가지고 방문도 부셔지겠냐? 저 놈의 자식이 갑자기 왜 화풀이야?”
“됐어! 됐다고!”
종인은 화가 치밀었다. 엄마가 갑자기 저런 말들을 쏟아내는게 짜증났다. 병을 옮기다니. 경수가 무슨 바퀴벌레나 파리도 아닌데, 병을 옮긴다고 하다니. 종인은 화를 참을 수 없어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벗어버렸다. 그래도 화는 가라 앉지 않았다.
“경수가 무슨 병을 옮긴다고. 이틀 내리 놀아도 멀쩡 하기만 한데.”
종인은 답답했다. 오늘 경수를 보지 못해서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더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경수가 무척 보고싶었다. 짜증이 잔뜩 묻은 손길로 바닥에 깔린 이불을 끌고 와 머리 끝까지 덮고 엎드린 종인이, 벌떡 일어나 이불을 내팽겨 치고 말했다.
“……그래! 김종인 넌 사나이다.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돼지.”
종인은 방에서 나와 마루로 향했다. 경수네로 가기 위해 신발을 챙겨 신었다.
된장이 부족했는지, 장독대에 있는 된장을 푸러 부엌에서 도로 나온 종인의 엄마가 신발을 신는 종인을 발견하고 언성을 높였다.
“너 지금 어디 가는데?”
“갈 데가 있다. 신경쓰지 마라.”
“뭐라? 시위하나?”
“시위는 뭔 시위.”
“엄마가 말 몇 마디 했다고 삐졌나? 그래서 성 내는 거여?”
“아, 진짜! 숙제 가지러 학교 간다!”
“허이구? 너는 뭔 놈의 숙제를 허구한 날 학교에 빠뜨리고 와!”
신발을 다 신자마자 종인은 대문으로 냅다 달렸다. 엄마의 잔소리가 줄줄 이어졌지만, 대문을 닫으면서 잔소리를 뚝 끊어버리고 경수네로 향했다.
경수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져 종인은 달리고 또 달렸다. 저번 주말에 약속에 늦어 뛰어갔을 때는 그저 숨이 차오르는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똑같은 길을 똑같이 뛰어도 이번엔 설렘이 가득했다. 종인은 뛰어가다 무심코 지나친 어르신들에게 뒷걸음을 쳐 인사를 하고 다시 경수네로 뛰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경수네 집 앞에서 종인은 고민 할 것도 없이 줄기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쿵쾅쿵쾅. 두드린 대문에서 나는 소리와 똑같이 마음이 쿵쾅쿵쾅 뛰었다.
“경수야! 도경수!”
열 댓 번도 더 넘게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짜증이 약간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황한 종인이 대문을 두드리던 손을 뚝 멈췄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선 경수의 엄마가 날카로운 말투로 대문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아, 저 경수 친구 김종인 인데요!”
종인이 냉큼 대답했다. 대문이 열렸다. 들렸던 목소리에서 그랬던 것 처럼 경수의 엄마 얼굴은 미간에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채였다.
경수의 엄마가 제 앞에 선 종인을 위아래로 훑은 뒤에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누구라고?”
“경수 친구 김종인이요. 같은 반이에요. 아, 경수 짝꿍이기도 하고요.”
종인이 힘주어 말했다. 경수의 엄마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지만 종인은 상관하지 않고 경수 엄마의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왜 왔니?”
“경수 보러왔어요.”
“……경수가 많이 아파서 지금 자고 있거든?”
“네! 아프다고 그,”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가줄래?”
단호한 말투에 종인이 살짝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경수의 엄마가 종인이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대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머쓱해진 종인이 닫히려는 대문 사이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어른의 말은─엄마 빼고─곧이 곧대로 듣는 종인인지라 다른 사람도 아닌 경수 엄마의 말이기에 돌아가기 위해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거의 다 닫힌 대문이 다시 열리더니 경수의 엄마가 종인을 불러세웠다.
“얘.”
종인이 몇 걸음 옮겼던 발길을 돌려 경수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표정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니가 혹시 우리 경수한테 어제 자두 따줬니?”
“예? 아……네.”
경수의 엄마가 아까보다 더 미간을 찡그리고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다시는 우리 경수한테 멋대로 먹을 거 주지 마렴.”
“……예?”
“우리 경수는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안되는 몸이야. 잘못 먹으면 큰일 나. 큰일 나면 네가 책임 질거니? 게다가 자두 같은 과일은 잘못 먹으면 벌레도 먹을 수 있다구. 마음은 고마운데 다시는 그러지 마.”
고맙다는 말이 무색하게 들릴 정도로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대들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 종인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과일에 벌레 있는건 좋은건데요. 그만큼 깨끗하고 맛있다는 건데. 벌레가 있으면 발라내면 되고요.”
“어머, 얘 봐라?”
경수는 맛있게 먹었는데,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종인에게 화를 내려던 경수의 엄마가 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우리 경수 아파서 아까 겨우 잠들었어. 여기서 계속 시끄럽게 굴면 더 아파. 학교에 못 나가.”
“…….”
“그러니까 어서 가 봐. 내일 학교에서 보렴.”
종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종인이 허리를 미쳐 들기도 전에 대문이 매정스런 소리를 내며 쾅 닫혔다. 처음 봤을 때는 어여쁜 대문이였는데 이제 보니 그닥 예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닫는 사람에 따라 예뻐 보이고, 미워 보이는 대문은 처음이었다.
종인은 금방 자리를 뜨지 못하고 집 앞을 서성였다.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하늘색 커튼이 달린 이층 창문을 쳐다보았다.
“에휴.”
계속 서서 창문만 보던 종인이 제 행동은 부질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보다 가자, 하는 마음으로 하늘색 커튼을 보다 이제 막 발걸음을 옮기려 고개를 돌리던 그 때. 하늘색 커튼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잘못 본건가 싶어서 종인이 실눈을 뜨고 커튼을 보았다.
“어!”
종인이 짧은 소리를 내었다. 커튼이 조금 움직이더니 경수가 걷힌 커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경수를 보게 되자 그새 마음이 밝아져 종인이 경수를 따라 활짝 웃으며 경수를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커튼을 붙잡고 선 경수가 얼른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경……!”
종인이 경수의 손가락을 보고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종인을 본 경수가 조금 웃었다. 종인은 이름을 부르는 것 대신 두 팔을 벌려 크게 흔들었다. 경수도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들어 살살 흔들었다. 종인은 경수를 보긴 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내 멀뚱히 경수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건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잠에 막 들려던 참에 바깥에서 들리는 종인의 목소리에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그 때부터 경수의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엄마가 짜증을 부리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을 땐 경수는 자는 척을 하였다. 뒤척이지도 않고, 숨도 작게 쉬면서 깊게 잠든 척을 하였다. 엄마가 방에서 나간 후에야 경수는 살금살금 걸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커튼을 쳐 본 것이었다. 아직 가지 않은 종인이 고마운 것도 잠시. 소리를 내면 혹시라도 엄마가 올라올까싶어서 하고싶은 말이 많지만 전할 수 없음에 경수도 답답하기만 했다.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기만 몇 분. 종인은 갑자기 커튼을 치고 사라진 경수에 놀라 반사적으로 발이 앞으로 나갔다. 주먹을 꽉 쥐고 종인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발을 동동 굴렸다. 쓰러진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다시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경수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경수가 더 아플 것이란 경수의 엄마 말이 떠올라 그러지도 못했다.
잠시 후. 커튼이 다시 걷히고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경수였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종인의 걱정처럼 쓰러지진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종인이 주먹을 쥐었던 손을 펴고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경수는 또 한 번 입술 위로 손가락을 대었다가, 방문 쪽으로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종인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리고는 종인에게 급하게 인사하며 다시 조용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경수가 종인에게 던진 건 종이비행기였다. 팔랑팔랑. 종이비행기가 조금 날다가 힘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어, 종인은 얼른 종이비행기를 낚아채었다. 종인은 경수의 방인 이층과 경수가 던진 종이비행기를 번갈아보았다. 종이비행기 위에는 경수를 닮은 작고 귀여운 글씨체로 ‘펼쳐 봐’ 라고 쓰여있었다. 종이비행기를 펼쳐보기도 전에 종인의 입가에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역시 똑똑하네. 이런 방법을 다 생각하고.”
종인은 집방향으로 걸어가며 경수가 비행기를 접어서 날린 쪽지를 읽어내려갔다.
「와 줘서 고마워. 나 별로 안 아파. 그리고 우리 엄마가 한 말은 신경쓰지 마. 자두 또 따 줄꺼지?」
짧은 내용이였지만, 종인은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정도로 계속 읽었지만 종인은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경수가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음이 간질거렸다. 약간은 생소하지만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은. 그런 간지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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