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비밀
세훈x준면
w.BM
폭풍 같았던 밤이 그저 꿈인 줄 알고서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 누워있는 다부진 상체의 세훈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깊게 잠든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완전히 몸을 틀어 세훈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반듯한 이마도 보고 콧날도 손으로 만져보고,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한 입술에 손을 대었다.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입술에 손을 대었을 때, 온 몸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떠오르는 것 같아 순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갈증과 더불어 더위가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나 손부채질을 했다. 그제야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일단 주변에 보이는 옷가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찝찝한 느낌도 있는 것 같아, 방을 나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병 채로 입에 대고 마신 뒤에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에 있는 거울을 통해 본 맨 몸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밤에 있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절정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종인도 사실이었을까?
문득 뇌리를 스치는 종인의 시선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몹시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며 천박하다고 중얼거렸던 동생. 하지만 동생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에 곧 그것은 그저 잘 못 본 환영일 뿐이라 치부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을까 라고 생각한 스스로가 어이없어 픽, 웃으며 물을 틀었다.
씻고 나왔음에도 세훈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세훈이 깨어났을 때 간단히 먹을 요깃거리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가려고 했을 때 문득, 살짝 열린 것 같은 동생의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방문이 열려있었던가? 어딘지 찝찝한 기분에 뒷머릴 매만지며 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훈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트렁크 외에는 생전 동생이 쓰던 방 그대로였다. 기분 탓에 별게 다 신경 쓰인 것 같아 다시 방을 나가려는 찰나, 책장 밑에 떨어져있는 꽤 두꺼운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가 싶어 그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주저앉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공책이 아니라 일기장 같은 것이었다. 종인이가 일기도 썼다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동생이 죽은 뒤로 유품 정리를 한 적이 없기에 처음 보는 물건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일기장의 앞장을 넘기려는 찰나, 등 뒤에서 무게가 실리며 뒷덜미에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간지러움에 목을 움츠리며, 활짝 웃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세훈을 향해 돌아보며 손에 들고 있던 일기장을 등 뒤로 감췄다.
“깼어?”
“옆자리가 비어서요. 깜짝 놀랐잖아요, 사라진 줄 알고.”
“어유, 그랬어? 애기네, 애기.”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세훈의 목에 팔을 두르며 웃는 낯을 감추지 않은 채로 잠깐 입을 맞췄다가 뗐다. 아침부터 유혹하는 거예요? 세훈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으니, 웃음소리가 퍼졌다. 배고프다, 밥 먹어요. 세훈이 먼저 일어서 손을 내밀었다. 코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빙긋 웃으며 그 손을 마주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폭풍같이 지나갔던 밤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등 뒤로 감췄던 동생의 것으로 보이는 일기장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그 내용이야 언제든 볼 수 있으니 현재로썬 세훈과의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세훈은 가야할 곳이 있다 하고선 집을 나섰다. 집을 나가는 세훈을 마중하고 난 뒤에 거실에 앉아 시계를 보니, 일을 하러 가기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세훈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동생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동생의 방문을 여니 일기장은 아침에 놔뒀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곧장 일기장을 주워들고는 방문을 닫고서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부드러운 가죽재질의 평범한 일기장 이었다. 무난한 아이보리색에 약간의 손 떼가 탄 것을 보아, 종인이 꽤나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취미도 있었나 싶어 비싯비싯 웃음이 나왔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을 썩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내용이 궁금했다. 어쩌면 나도 잘 모르는 동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은 무작위로 일기장을 펼쳤다.
오세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오세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타 다른 말 하나 없이 일기장에 떡하니 적혀있는 문구가 낯설었다.
세훈은 종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종인이의 일기에는 세훈이 종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서로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같았지만 분명 다른 말이었다. 그렇다면, 세훈이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만약 세훈의 말이 거짓이라면 꽤나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배신감이 들어 치를 떨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훈이 해주었던 말이 사실인지, 종인이 일기에 쓴 것이 사실인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은 나 자신이 과연 종인의 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안 되지만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김종인’도 내 동생이고, 세훈의 입에서 나오는 ‘김종인’도 내 동생이며, 일기를 쓴 ‘김종인’도 내 동생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도대체 진짜는 누구인 걸까. 동생은 이 일기를 언제 썼으며, 무슨 의미로 이것을 일기에 썼을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종인아, 넌 누구니?
과연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종인이가 진짜 종인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끝내는 동생의 죽음까지 의심하고 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
조금은 멍한 상태로 출근을 했다. 같이 일을 하는 종업원들이 건네는 인사에도 건성으로 답해주며 넋 나간 사람마냥 앞치마를 손에 쥐고 탈의실에 앉아있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죽은 내 동생 ‘김종인’에 대한 생각으로 인해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사슬을 끊어낼 수 없어 결국 머리를 쥐어 싸매며 고개를 숙였다.
“어디 아파?”
“어? 아…….”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들리는 낮은 찬열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잊고 있었던 찬열과의 입맞춤이 재생되었다. 멍하니 찬열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찬열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너무 뚫어져라 쳐다본 건가 싶으면서도 찬열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한참을 대답을 망설였다. 찬열은 딱히 대답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는지 입고 왔던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앞치마를 걸쳤다. 일하러 안 가? 또 다시 넋을 놓아버린 나를 보며, 찬열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었다. 황망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찬열의 뒤를 따라 나서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에 몰려있었다.
잦은 실수가 반복되었다. 때때로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기도 해서 몇 번이고 컵을 손에서 놓쳤다. 결국 보다 못한 찬열이 안으로 들어가 쉬라고 했지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각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한사코 거절했다. 스스로도 한계가 느껴졌지만 꿋꿋이 손님에게 줄 얼음을 조각하던 도중 결국 손을 다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따끔한 고통에 붉은 피가 흐르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질적인 느낌에 몸서리를 치며 찬열이 쥐어주는 수건으로 지혈을 하면서 탈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세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탈의실로 들어왔다. 매번 데리러 오는 세훈으로 인해 낯이 익은 종업원이 들여보낸 것 같았다. 다쳤다면서요? 종업원들에게서 들었는지 세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곁에 앉았다. 세훈을 보니 울컥하는 마음에 미간을 좁히고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세훈아 난 정말… 못난 형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종인이 죽은 거 맞지?”
“……네.”
“그래, 종인이는 죽었어. 죽은 지 한 달 정도 지났어. 응, 맞아. 종인이는 죽었어.”
“…….”
넋두리처럼 말을 늘어놓는 나를 보던 세훈의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었으나, 말없이 팔을 들어 어깨를 감싸 다독이는 손길이 한없이 다정했다. 괜찮아요. 머리 위에 얹어지는 목소리마저 다정하게만 들렸다.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차근차근 다 읽어봐야만 해답이 풀릴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BGM. 쇼팽 - 겨울바람 (Op.25 No.11)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선 저번편에 답글 일일히 다 달아드리지 못 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죄송해요ㅜㅜ 아 그리고 이번 편에서 ‘일기장’을 기억해주시고 눈여겨 봐주셨으면 해요. 아마 글이 전개됨에 있어 중요할 겁니다(일종의 스포랄까요) 이번 편 이후부터 여러분을 의문에 빠지게 했던 여러 비밀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보일 예정입니다. 쓰는 저는 죽을 맛이구요..^_T 그래도 많이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내일 부터 설 연휴라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즐겁게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설 연휴에도 세준과 함께... (의미 심장한 미소)ㅋㅋㅋ 댓글 늘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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