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베어버릴 듯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밤.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지를 알려주듯이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도 모두 따뜻한 집으로 가기 위해 발을 재촉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추위 속에 한 남자가 가로등 빛 아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서있던 것인지 남자의 코와 볼은 눈에 띄게 빨갰다. 남자는 휴대전화로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하얗게 질린 입술로 낮게 욕을 읊조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의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누군지 확인하려는 듯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퍽-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졌고 누군가 그를 대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남자는 아까 맞은 곳이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뿌옇게 보이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자신이 실내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완전히 들자 자신 의자에 묶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목 또한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남자는 혼란에 빠져 의자에 묶여 있는 손을 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남자는 긴장하여 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발소리를 낸 자는 탁자에 비스듬히 앉아 묶여 있는 남자와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밝게 웃었다.
"우현아. 나 기억해?"
우현이라 불린 남자는 놀라 크게 눈을 떴다.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는 눈빛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우현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나 기억 못하나 보네. 우현은 자신의 이름을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친근하게 부르는 남자가 누군지 생각해 내기 위해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본 것처럼 익숙한 얼굴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필사적으로 누군지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남자는 여유롭게 콧노래를 부르며 우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판단을 내린 것인지 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성규야, 김성규. 이래도 기억 못한다고 하면 나 상처 받을 거야."
성규의 말을 들은 우현은 아까보다 더 크게 눈을 뜨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성규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크게 웃었다. 눈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웃자 우현은 인상을 크게 구겼고 그 모습을 본 선웅이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웃음을 멈췄다. 내가 왜 이러는 지 정말 몰라? 상처받은 얼굴을 한 성규가 우현에게 물었다. 우현이 얼굴을 굳히고 대답이 없자 성규의 얼굴도 따라 굳어진다.
"설마 내가 너를 떠나서 그러는 거냐?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이라니. 나는 너 없으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우현의 고작이라는 말에 상처 받은 얼굴을 한 성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규는 연신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탁자에서 일어나 우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현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성규는 그런 우현의 행동에 귀엽다는 듯 웃으며 우현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그 여자가 너 힘들게 하지? 피부 까칠해진 것 봐. 성규는 연인을 걱정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우현은 성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고 얼굴을 굳혔다.
"헛소리 그만하고 선우는 어디있어. 선우를 데리고 있다는 문자 보낸게 너지?"
"..... 이런 상황에서도 넌 그 여자를 찾는구나."
성규는 입술을 깨물고는 우현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우현이 볼 수 없는 부엌으로 향했다. 우현은 성규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손목에 묶여있는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엌 식탁에는 우현을 기절시키고 빼놨던 우현의 휴대전화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고 다시 우현이 있는 곳으로 가다가 우현이 밧줄을 풀기 위해 바둥거리는걸 지켜보던 성규는 우현의 손목에 피가 맺히자 눈쌀을 찌푸렸다. 너는 왜 항상 그렇게... 성규는 입술을 다시 잘근거리며 우현이 자신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섰다.
"그만해. 피나잖아."
"...."
"거짓말인게 뻔한 협박문자인걸 알면서도 이 추운 날 밖에 서있을만큼 찾던 그 여자가 멀쩡하다는거 알려줄게."
우현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성규를 바라봤다. 우현은 성규가 잠금이 걸려 있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풀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고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미친 새끼. 우현이 화가 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성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 전화 받았다. 성규는 상대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못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귀를 막으며 우현의 귓가에 휴대전화를 가져다댔다.
[우현아! 너 어디있어!]
"선우야!"
[지금 어디있어? 내가 갈-]
성규는 우현의 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멀리하고는 통화종류 버튼을 눌렀다. 우현이 자신을 째려보자 성규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그 여자가 멀쩡하다는 건 알았잖아? 우현은 화가 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넌 미쳤어!
성규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난 미쳤어. 난 널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데 너만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는데 너는 날 버렸어. 그래서 복수하려고. 이래저래 많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이 방법이 니가 날 가장 오래 기억할 것 같아."
성규는 우현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으로 우현이 볼 수있는 곳의 방문으로 향했다.그리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안 천장에는 밧줄이 묶여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의자가 있었다. 성규는 말설임없이 그 의자 위로 올라가 매달려 있는 밧줄은 자신의 목에 걸었다. 우현은 성규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내려오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성규는 우현이 눈을 떴을 때처럼 밝게 웃었다. 드디어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날 잊지마. 사랑해 우현아."
성규는 올라서 있던 의자를 찼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도 웃고 있는 성규를 보며 우현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도망가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우현의 정신은 이미 반쯤 미쳐있었다. 숨이 끊긴 것인지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축 늘어져 있는 성규를 보며 우현은 눈도 감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은 성규의 입에서는 아직도 잊지마 나를 잊지마 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우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소리를 질렀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00아파트에서 한 20대 남성 K씨가 같은 나이의 N씨를 납치해 눈 앞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우현은 며칠 후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민원에 성규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 경비원에게 발견되었다. 성규의 집에서 일어난 일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떠들썩하게 했다. 우현은 그날 이후 극심한 정신 불안 증세를 보였고 가족들은 우현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딱히 우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치의와 간호사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거나 허공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면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등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밤이 되면 우현의 불안 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조금이라도 몸이 닿을까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앉아 불안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둘러보다가 이내 얼굴을 팔에 뭍었다.
"또 여기 계시네."
아침이 되어 밥을 주기 위해 온 간호사가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우현을 보며 혀를 찼다. 늘상 있는 일인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남자를 깨웠다. 우현은 간호사의 손길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간호사의 손을 세게 쳐버렸다. 간호사의 낮은 신음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우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마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간호사는 손을 어루만지며 괜찮다고 했다. 간호사는 남자의 손에 음식이 담긴 식판을 주며 말했다.
"오늘은 꼭 드셔야 해요. 그렇게 게속 드시지 않으면 큰일 나요."
식판을 받아든 우현의 손은 뼈가 다 들어날 정도로 말라 가죽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우현의 얼굴은 이미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었고 눈은 깊게 패여 있었다. 우현의 몰골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밥을 먹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현은 식판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우현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간호사는 이내 다른 병동으로 가기 위해 나갔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우현은 식판을 멀리 치워 버렸다. 그리고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침대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침대의 시트를 붙잡고 소리 내어 울었다. 침대 시트 자락을 붙잡고 한참 울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현은 자신의 주치의라고 생각 했는지 미동이 없었다.
"형 거기서 뭐해요?"
의사의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가 들리자 놀란 우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가 서 있어야 할 곳에는 9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와 목소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9살짜리 아이와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같다면 이상하겠지만 분명 아이의 목소리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우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바로 내 눈 앞에서 죽었어. 중얼거리던 우현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점점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오르자 우현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발악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주저하면서 우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아요?"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우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간신히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다행이라며 밝게 웃었다.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본 우현은 왠지 모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죽기 전에 보여 줬던 미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현은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아이는 남자에게 질문 세례를 했다.
"형 이름이 뭐에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여기에 형 혼자만 있어요? 나도 혼자 있는데. 나 여기 계속 놀러 와도 되요?"
아이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던 우현은 피식 웃었다. 이런 어린 아이를 보고 '그'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우현을 바라보던 아이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우현은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많이 힘들구나? 그쵸? 내가 편하게 해줄게요."
아이의 작은 손이 남자의 목을 잡았다. 우현은 아이를 쳐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거렸다. 아이의 악력이 제법 강했던 것인지 우현의 얼굴은 점점 빨개지고 숨도 거칠어 지고 있었다. 우현이 가만히 있자 아이는 재미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우현아. 왜 가만히 있어? 또 나를 기억 못하는 거야?"
우현의 눈이 커지자 아이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우현은 말도 안된다는 눈빛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우현의 목을 조르고 있는 사람은 성인의 모습인 '그'였다. 우현아. '그'는 낮은 목소리로 우현을 불렀다.
"사랑해. 나랑 같이 가자."
우현의 목을 조르는 힘은 점점 강해졌고 우현은 호흡곤란이 온 듯 컥컥 거렸다. 우현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손을 치워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현은 고통스럽게 끅끅 거렸고 눈앞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우현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우현아. 이제 나랑 같이 가자."
이내 우현의 눈은 감겼다.
"302호에 있던 남자 자살했다면서?"
"그랬대나봐. 목에 침대 시트가 감겨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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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글 올리는건 처음이라 긴장되네요.. 예전에 썼던 글 울궈먹기는 제 특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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