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심연
"야아, 성규야."
"어."
"이것도 별로야?"
"그 옷은 아닌 것 같아."
벗어. 단호한 성규의 말에 동우는 입을 삐죽이며 탈의실 문을 쾅 닫았다. 피곤해. 성규는 카운터 옆 조그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무슨 옷을 그렇게 요란하게 갈아입는지, 탈의실 안에선 물건이 쿵쿵 떨어지는 소리와 동우의 짤막한 탄식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부산스러워. 성규는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눈을 살짝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탈의실 문이 끼익 열리고 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 동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무작대기를 종업원에게 건넸다.
"저기, 누나. 탈의실 안에 옷걸이가 떨어졌는데, 어쩌죠…."
"뭐, 괜찮아요."
"헤헤. 감사합니다. 더 둘러보고 올게요."
동우가 꾸벅 인사를 하는 새에, 성규는 이미 옆가게로 쏙 들어가 이 옷, 저 옷을 살펴보고 있었다. 저런 망할 놈. 동우는 혀를 끌끌 차며 성규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등을 냅다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성규가 홱 뒤를 돌아보자, 동우는 나 몰라라 휘파람만 불어댔다. 세상에서 제일 유치한 새끼. 성규를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누구 옷 사는 건데. 나는 왜 오라고 한건데! 진짜. 세 시간은 됐겠다. 돌아다닌 지."
"걔가 너랑 키가 비슷한 것 같아서. 내가 샀다가 길면 어떡해."
"헐. 내가 너랑 차이나면 얼마나 난다고?"
"많이. 야. 이것 좀 입어봐."
가운데에 귀여운 강아지 캐릭터가 박혀있는 후드티를 건네받은 동우는 투덜대면서도 또다시 탈의실로 들어섰다. 성규는 왼 손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4시 16분. 평소대로라면, 지금은 한창 병실에서 남우현과 노닥거릴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실 문을 열었을 때,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우현이 며칠 동안 집에 다녀온대요.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갑작스럽게 그렇게 됐다고 되게 미안해했어요. 7층 로비에 항상 앉아있는 간호사가 터벅터벅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성규를 붙잡고 우현의 얘기를 대신 전해주었다. 성규를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었던 것이, 여기까지 헛걸음을 한 것 같아 괜히 속이 상했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짓는 우현의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괜히 심술이 솟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쁜 놈. 엘리베이터에서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내리꽂히자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남우현을 기다리느라 병원에 꼬박꼬박 얼굴도장을 찍었다. 오늘이 3일 째. 별 것 아니었던 남우현은 어느새 제 삶에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나보다. 하루의 반나절은 병원에서 지내던 성규였기에, 병원에 가지 않으니 그 시간동안은 하릴없이 멍하니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뭐라도 하자 싶어 집을 나섰더니 발길이 멈춘 곳은 우현의 병원 앞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결국 아무도 없는 텅 빈 병실 창가의 먼지를 닦고, 시트를 정리하는 것은 성규의 몫이었다. 티끌만한 먼지도 보이지 않았지만 괜히 그랬다. 저번에 공원 외출은 한 뒤에 다시 열어본 옷장에 변변치 않은 옷들만 허술하게 걸려있는 것을 보고 기똥찬 생각이 떠올랐다. 선물을 해주자. 옷을 받고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기뻐할 우현의 얼굴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옷 고르는 재주가 없어 나름 한 감각한다는 동우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백화점으로 나들이 온 것이, 지금까지 밥 한 숟갈 못 먹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닌 원인이었다.
"성규야."
"응."
"성규야아."
"어."
"김성규!"
"아, 왜!"
"옷 좀 보라고. 네가 무슨 자동응답기냐?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선."
귀여운 후드티를 입은 동우가 성규 눈앞에서 손바닥을 쭉 펴곤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해. 꼭 나사 하나 풀린 사람같이. 동우가 검지를 관자놀이 쪽에 대고 빙글빙글 돌려댔다. 우리 성규가 미쳤어요. 기어코 동우는 성규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빈정거림을 멈추었다. 동우가 입었던 후드 티는 점원의 손길에 의해서 예쁘게 포장되고 있었다. 동우는 드디어 지옥 같은 김성규의 쇼핑에서 해방되었다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예쁘게 입으세요. 점원에게 종이가방을 건네받은 성규는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가방을 오른 손에 꼭 쥐고 동우에게 턱짓을 했다. 수고했으니까 밥 사줄게. 먹고 가던지, 말던지.
"밥을 사준다는데 왜 거절을 하겠어?"
김성규 장군이, 쏜다, 쏜다, 쏜다!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한 동우는 성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방정맞게 웃어댔다. 성규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은 친구지만 정말 시끄러운 놈이라고.
* * *
'형.'
'어, 우리 우현이 왔어? 잠, 잠깐. 왜 울어? 누가 우리 동생 울렸어!'
'오늘 또 선생님한테 혼났어.'
'아씨, 그 노처녀 진짜….'
'역시 피아노는 형이 최고야. 형, 피아노 쳐 주면 안 돼?'
'어…. 안 돼. 형은 피아노 못 쳐.'
'거짓말!'
우현은 형의 가슴께를 콩콩 두드렸다. 형이 훨-씬 잘 치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빨리 쳐 줘. 얼른, 얼른! 우현의 손에 이끌린 형은 마지못해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우현을 위해 2층 거실에 놓아둔 까만 그랜드 피아노. 형은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 아무도 없어. 1층엔 아주머니 밖에 안 계실거야. 둘 밖에 없는데도, 우현은 형의 귓가에 바싹 붙어 개미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쳐 줘. 비밀로 할게. 우현이 작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쉿, 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피식 웃은 형은 우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우현을 자신의 옆에 앉혔다. 살짝 떨리는 손가락이 날렵하게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우와. 우현은 입을 크게 벌리고 넋을 놓고 건반을 바라보았다. 역시 형이 최고-
'…뭐하니, 너.'
'아, 아버지.'
'네 것이 아니다.'
볼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형의 얼굴이 왼쪽으로 홱 돌아갔다. 헉, 하고 우현이 짧은 숨을 토해냈다. 다시 한 번 올라가는 아버지의 손에 놀란 우현은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려 엉엉 울어댔다. 제가 쳐달라고 했어요, 형은 안 한다고 했는데, 내가, 내가…. 아버지는 우현의 형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우현을 매몰차게 떼어내고는 쿵쿵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에 구급약통을 들고 온 누나가 엉망이 된 동생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약을 발라주며 울었다. 형은 부어오를 대로 부어오른 붉은 볼에 얼음주머니를 대고 킥킥대며 웃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공허한 눈이 피아노에 가 머물렀다. 제 손을 붙잡고 눈물콧물을 다 짜내며 찔찔거리고 있는 동생이 미웠다. 온갖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막내 동생이 미웠다. 뜨뜻한 더운 눈물방울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우현이가 좀 더 실력이-. 어머니와 레슨 선생님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자신이 피아노를 그만 두게 된 것은 그 때였다. 아무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후엔 도저히 피아노를 칠 수 없었다. 누나는 공부를 잘 했다. 동생은 피아노 영재였다. 나는? 아무 능력이 없었다. 늘어나는 것은 잘난 남매들 사이에 낀 둘째의 소외감과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차별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 저는 그저 아버지 눈엔 쓸모없는 인형이었다. 그 대단하신 아버지의 위신을 세워줄 꼭두각시 인형이 되지 못하였다. 그 때부터 잘못 끼운 단추처럼,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자신은 친척들 입에서 잘난 동생을 미워해 일부러 눈을 멀게 한 파렴치한이 되어 오르락거리고 있었다. 사실이었다. 일부러 우현의 눈가에 불꽃을 가져다 대었다. 그 잘난 네가 없어지면 내가 다시 사랑받을 것이라고. 쓰러진 우현을 부축하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냥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머릿속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모두를 속일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든 연극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안에서 꼭두각시처럼 움직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바라는 대로. 연극은 절반쯤 성공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 옆에 붙어 있게 되었다. 누나는 우현 옆에 붙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얻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예 가족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사랑을 독차지하던 우현은, 이제 방에 갇혀 누나나 안내견 따위가 없으면 한 발짝도 나올 수 없었으니까. 한 밤중에 피아노 의자에 앉아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던 우현을 보고선 차갑디 차가운 조소를 내뱉었다. 넌 그냥 눈 먼 병신일 뿐이라고.
그 이후였다. 잠이 들고 일어나면 세상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강박증에 사로잡혔다. 꿈속에서 우현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깊고 긴 마음속의 그 무언가까지 읽어낼 것 같이. 나도 눈이 멀어버릴 거야.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튕겨나가지듯이 몸을 일으키면, 물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달라고 우는 어머니가 있었다. 눈은 멀지 않았다. 눈이 먼 것은 우현뿐이었다. 누나도 회사일 때문에 떠난 마당에 우현을 외톨이로 만든 것은 완벽했다.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병실 안에서 그냥 죽어버렸으면 했다.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없이.
하지만 며칠 전에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우현의 눈 수술 일정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이었다. 초조했다. 우현이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다시 어머니의 사랑을 뺏길 것이 틀림없었다. 몰래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서 이식 수술에 필요한 동의서들을 죄다 훔쳐내었다. 마당 한 구석에서 모든 것을 불태웠다. 남우현에게 다시 빛을 보게 할 수 없었다. 평생 어둠 속에 갇혀서, 그렇게 살아야 마땅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내 유년시간을 생각해보면 네깟 것이 겪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서자 아버지의 매서운 손이 날아왔다. 아버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삐뚤어졌냐고 화를 내었다. 삐뚤어져? 누가? 내가? 천만에. 삐뚤어진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위압감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곤 집으로 들어서려하자 아버지가 팔을 붙잡았다. 얼마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팔에 멍이라도 들 것 같았다. 아파요, 아버지. 힘겹게 내뱉은 말은 아버지가 대답한 말에 의해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우현이의 눈이 먼 것은 네가 한 짓임을, 모두 알고 있노라고.
* * *
"야, 너 이렇게 비싼 데와도 돼?"
"사줘도 지랄이야."
"나야 물론 땡큐지. 근데 너 완전 거지잖아."
"불만이면 쳐 나가."
"사랑합니다. 김성규 고객님."
동우는 먹기 좋은 사이즈로 스테이크를 잘라 성규의 입 근처에 갖다 댔다. 성규야, 아-. 남자 둘이 이게 무슨 남세스러운 꼴이냐며 성규가 툴툴댔다. 동우는 친구끼리 뭐 어떠냐며 자신도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배고팠던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게걸스럽게 접시를 비우던 동우가 꺽, 하고 트림을 하자 성규가 동우를 확 째려보았다. 장동우, 더럽게 진짜. 에이, 친구니까! 동우의 어이없는 대답에 성규가 허,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실실 웃던 동우가 갑자기 표정을 싹 바꿔 음료수를 쪽쪽 빨아먹으며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런데 성규야."
"왜."
"너, 복학 안 해?"
어. 안 해. 역시나 칼같은 성규에 대답에 살짝 기운이 빠졌지만 동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너 이번에 복학 안하면 제적이야. 4년 전액 장학금에, 과탑 달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래.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간만에 진지하게 물어오는 동우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성규는 묵묵부답이었다. 성규가 영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자 동우는 앞으로 바짝 당겼던 몸을 의자에 편히 기대었다. 저 놈의 똥고집 누가 말려.
"자퇴할거야."
"어엉?"
갑자기 튀어나온 성규의 돌발선언에 동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퇴? 자퇴라고 했냐, 너 지금? 동우가 말도 제대로 못 잇고 어버버거리는 반면에, 성규는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겨워. 고향 집에 가서 농사일이나 도와드리려고. 아님 굴이나 까던지….
"갑자기 왜!"
"그냥,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너 저번에 캐스팅도 들어왔었잖아. 그렇게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데였잖아!"
"흥미 없어졌어. 알잖아, 너. 나 금방 타오르고 금방 식는 거."
"야아, 성규야."
"나 가봐야겠다. 일어나자. 다 먹었지?"
"김성규!"
동우가 성난 표정으로 성규를 부르자, 성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니지."
"내가 뭘."
"너, 거짓말 하면 다 티나."
"아아."
"아무 일…. 없는 거지?"
묘하게 위태위태해 보이는 성규의 모습에 동우는 불안했다. 그대로 훅, 불면 날아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성규는 무언가 고심하더니, 동우의 코앞까지 걸어와선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