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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 56 >
“오지 말라고?”
- 어. 좀 천천히 와.
집에 들어가기 일보직전인데 정국이 전화를 걸어서 한 말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요즘 바람 잘 날이 없다.
“무슨 일인데.”
- 집에 누가 있어.
“누가?”
또 스토커? 이 집에 수맥이 흐르나봐 진짜. 누가 있어? 대체 누가? 집 앞까지 도착했는데도 현관문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경험은 또 처음이다. 좁디좁은 자취방에서 스토커가 숨기도 힘들텐데. 문에 귀를 대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귀를 막 떼려는 그 때 한 남자의 괴성이 들렸다. 괴성을 들은 즉시 문을 열어젖혔다. 내 귀가 제 역할을 했다면 호들갑스럽고 높은 톤의 괴성은 정호석이어야 했다.
“헐.”
예상대로 바닥에 나자빠져서 볼따구를 문지르고 있는 남자는 정호석이었다. 맞춘 건 좋은데 왜 하필 전정국 혼자 집에 있을 때에 온 거냐고. 뭐라고 둘러대야 그냥 넘어갈까. 내가 가방을 내려놓자 전정국에게 멱살을 잡힌 정호석이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우리 오빠라고 말해줘야 하는 건 아는데 왠지 모를 통쾌함이 들어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오라고 했는데.”
정국이 정호석의 멱살을 움켜쥔 채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국 뒤의 정호석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저기 이것 좀 놓고…….”
정호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지만 정국의 기에 압도되어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저러고 있으니 안타깝기도 하고.
“전정국, 우리 오빠야.”
“오빠?”
“가족이야. 가족.”
“진짜야?”
“응.”
가족이라는 말에 알겠다는 듯 멱살을 잡은 손을 푸는 녀석이었다. 정호석이 구겨진 옷을 정리하며 내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정국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머리를 굴렸다. 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우리 집에 먼저 있는 놈을 뭐라고 설명해야 오해가 없을까.
“우리 여주랑은 무슨 사이세요?”
“여주 남자친구인데.”
“아……. 네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정호석이 정신을 차린 듯 목청을 높여 당황함이 잔뜩 묻어난 소리를 냈다.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태 수습 어떻게 하나고. 필요 이상으로 정직하신 전정국으로 인해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닫았다.
“같이 살아. 우리.”
녀석이 방금 덧붙인 말에 벌어진 입이 닫히질 않았다. 이건 뭐 방심할 틈도 안 주네. 사태 수습을 위해 어색한 웃음을 열심히 지으며 정국의 입을 황급히 막았다.
“하. 하. 하. 농담이야. 농담.”
내 말을 알아들은 정호석이 대충 알겠다는 의미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때였다.
“농담은 무슨. 같이 살잖아.”
전 정국이 입을 막고 있던 내 손 틈 사이로 잘못 들었다고 우길 수도 없을 만큼 정확하게 말했다. 망했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국이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건드렸다. 너 때문에 다 망했어. 이 자식아. 원망의 눈빛을 쏘았다.
“화났어?”
“화난 것까지는 아니구.”
“표정이 왜 그래.”
정호석이 듣고 있는데 말할 수는 없어 입술만 삐쭉 내밀었다. 튀어나온 내 입술을 녀석이 손가락을 갖다 대며 장난스럽게 밀어넣었다.
“어쭈구리.”
어느 새 팔짱을 끼고 침대 한 자리를 차지한 정호석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정호석이 엄마한테 말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골치 아파. 아까 멱살 잡히던 정호석 씨는 어디로 가신 건지 내 약점을 잡은 지금은 아주 기세등등하다.
“둘 다 거기 앉아보실까.”
정호석이 턱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기분은 더럽지만 지금은 정호석이 갑이니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자리에 앉긴했다. 상황파악을 여전히 못하신 전정국은 직접 잡아서 자리에 앉혔다.
“나도 침대에 앉을래.”
“우리가 지금 그런 거 따질 입장이 아니에요.”
불만이 많은 듯하면서도 바닥에 앉으며 내 말을 따르는 정국이었다. 위에서 느껴지는 정호석의 시선이 따가웠다.
***
“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건지 한참을 말이 없던 엄마의 아들께서는 이마를 짚으며 기가 차다는 탄식을 내뱉었다. 필요 이상으로 빛나는 눈으로 나와 정국을 번갈아 보았다. 골치 아픈 상황에 골머리를 앓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 손에 깍지를 끼기도 하고 손가락을 조물락대기도 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정호석의 눈치를 보며 정국의 손을 내치자 내 손을 더 세게 잡아오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손 힘은 어지간히도 강했다. 전까지만 해도 이런 저런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아 정국은 물론이고 나 역시 정국에게 신경을 쓰느라 정호석의 말을 듣지도 않으니 설교를 늘어놓던 정호석의 맥이 풀린 모양이었다.
“동거는 무조건 반대야.”
정호석의 말에 정국이 장난기를 머금었던 표정을 지우고 싸늘하게 정호석을 노려보았다. 녀석의 기에 눌린 정호석이 아까 정국에게 맞은 볼을 머쓱하게 문질렀다. 겁 많기로 유명한 정호석이 어떻게 안 놀라겠어. 정호석이 정국의 시선을 피해 택한 것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엄마한테 이른다?”
내 손을 잡고 있던 정국의 손아귀에서 힘이 느껴졌다. 곁눈질로 정국을 바라봤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표정의 변화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같이 지내면서 이제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정호석이 상당히 거슬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동거는 아니지!”
“......”
“아니 지이...?”
강력하게 주장하던 정호석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나저나 엄마한테 들키면 끝장인데. 정호석에게 들켜버렸으니 잘못하다간 엄마가 알기 십상이었다.
“자취한지 일 년도 안돼서 동거를 하다니. 정여주 대단하다.”
“동거 아니야.”
“맞는데?”
아, 쫌 전정구욱!!! 아니라고 들키면 안 되는 거라고!! 내 생각 읽고 있어? 제발 읽어라. 평소에는 아무 때나 잘 읽더니 눈치는 더럽게 없어가지고는 꼭 필요할 때는 안 읽어요. 전정국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탄탄한 근육질의 허벅지는 꼬집어도 꼬집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통증은 느낀 모양인지 정국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의 모든 근육을 죄다 움직여서 내 생각을 읽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얼굴을 구길 수 있는 대로 구겨댔지만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는 녀석이었다. 답답해 미치겠네.
“둘이 뭐해?”
정호석이 우리를 향해 물었다. 안면 근육을 위쪽으로 움직이며 억지웃음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동거……. 하는 거 맞아?”
정호석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정국이 입을 열기 전에 절대 아니라고 입을 떼려는데 녀석의 입술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떨어졌다. 오 주여. 하늘이 노래졌다.
“당연히 농담이죠.”
하늘이 노래졌다가 다시 파래졌다. 내가 너무도 원하는 바람에 환청이 들린 건 아니겠지. 정국을 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녀석이 가까이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예의바른 인간인 척 해줄 테니까 저 놈 가면 선물줘야해.”
녀석은 정말로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정상적인 발언을 이어나갔다. 원래 이게 당연한 거지만 전정국이 이러니 이상했다. 이상 할게 전혀 없는데.
“여주랑 데이트하려고 집으로 데리러왔는데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여주가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아…….”
“기다리는 중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서 좀 거칠게 행동했으니 오해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 해요. 안 해. 여주를 아껴주시니 오빠로서 감사하네요.”
급작스레 바뀐 정국의 태도에 정호석은 침대에서 내려와 같이 바닥에 앉아 정국을 대했다. 한시름 덜긴 했는데 정호석이 내게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했다. 나도 웃는 수밖에. 1초에 한 번씩 내려가는 입 꼬리를 올리느라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형님, 저희는 이제 데이트를 좀…….”
“아, 그렇지. 응. 그래.”
이제는 정호석을 형님이라며 깍듯이 부르는 전정국이었다. 항상 제멋대로더니 다행스럽게도 항상은 아니었구나. 이런 걸로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오빠는 이만 가볼게.”
“뭐 때문에 왔는데?”
“엄마가 반찬 주래서. 식탁에 올려놨어.”
“아, 감사.”
“이제 간다.”
“잘 가.”
떠나는 정호석을 무미건조한 인사를 건넨 나와는 달리 정국은 집을 떠나는 정호석을 현관 밖으로 나가는 수고까지 하며 배웅했다. 허리를 숙여 인사도 했다. 정국의 행동이 적응할 수 없는 게 내 탓은 아니겠지.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정호석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오는 녀석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얼굴에서 예의바른 미소를 모조리 거두었다. 괜한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려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녀석은 내 코앞에 서서 목을 빼고는 얼굴을 쭉 내밀었다.
“뭐야?”
녀석의 얼굴이 가까워 내 얼굴을 뒤로 빼며 말했다. 턱살이 신경 쓰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혹여나 턱이 두 개가 된 것은 아닌가 싶어서 다시 얼굴을 바로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녀석에 의해 턱이 들어올려졌다. 내 위에 있는 두 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저 각도에서 내려다보면 완전 못생겼을 것 같은데.
“예뻐.”
녀석의 답이었다. 녀석답게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였다.
“별로 내키지도 않은 짓을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응?”
“선물 받으려고.”
“아……. 뭐 사줄까?”
“사줄 필요 없어.”
사줄 필요가 없으면 대체 뭘 엄청난 걸 시키려고 그러는 걸까.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올 엄청난 말에 마음을 다독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양심이 있으면 이상한 걸 시키지는 않겠지. 갑자기 정국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눈치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정말.”
무슨 눈치? 뭐지? 힌트를 줬었나? 전혀 짚이는 게 없는데.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녀석의 눈을 쳐다보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진짜 미치겠네.”
정국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웃느라고 입술은 움직여도 눈만큼은 아까부터 지금까지 딱 한 곳만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눈동자에 담긴 건 내 입술이었다.
“빨리도 알았다.”
안색에 변화라고는 없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내 두 뺨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턱에 있던 그의 손이 열이 오른 내 볼을 감쌌다.
“먼저 해줘.”
그의 말에 볼이 더 화끈거렸다. 잇새로 더운 숨이 나왔다.
“선물이잖아. 내가 받아야지.”
정국이 무릎을 조금 굽혀 내 키를 맞춰주었다. 때 아닌 배려에 내 눈 앞에 바로 그의 입술이 자리했다. 부끄러움에 시선을 아래로 두기가 무섭게 그가 내 뺨을 감싼 손을 부드럽게 움직여 내 얼굴을 위로 올렸다. 고인 침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언제까지 기다릴까.”
“......”
“전에도 기다렸었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고 앞으로도 기다릴 테지만.”
내 입술에 머물러 있던 그의 눈동자가 내 콧날을 따라 위로 올라와 눈을 맞추었다.
“이건 못 기다리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이 맞닿았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 사이야? 망설일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내 등을 끌어안아 자신과 더 밀착시킨 그가 내 안을 파고들었다. 참고 있었던 내 더운 숨이 그에게로 퍼져나갔다. 빠르게 전해지는 아찔한 기운에 눈은 저절로 감긴 지 오래였다. 아까 깨물었던 입술 근처에 그의 혀가 맴돌았다. 본능에 이끌려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전하는 느낌이 좋았다. 위험할 정도로.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