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그리다. 下
w.마침표
공교롭게도 3-4교시가 연달아 미술이였다. 미술선생이라는 정택운 선생은 어제 동아리 시간에도 안들어오더니, 오늘 수업도 "자습" 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덕분에 미술실은 시끌벅적했고 그곳엔 어제보다 조금 더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자리마저 창가였기에 모든 것이 너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너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 너를 처음으로 마주했고 네 이름도 알아내었으며 짧게나마 몇마디 대화도 나누었기때문이다. 문제는 오늘이였다. 오늘도 나는 몰래 너를 보러 그 빈 교실에 찾아가겠지. ― 그런데, 그게 싫었다. 어느샌가부터 작은 욕심이 생겨 그 날처럼 네 옆에서 너를 바라보고 싶었다.
"콩. 맨날 뒤에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제 말도 걸고싶고 가까이 다가가고싶고 그러면 … 어떻게 해야할까"
"왜 너 누구좋아하냐?"
"응."
"…혹시 그 여자 미술부야? 너 진짜 거기 들어간거야?"
"…아마."
혼자서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이홍빈에게 갔다. 점심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은 급하고 이러다간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누워서 음악을 듣고있는 홍빈이의 등을 두어번 두드리자 녀석은 귀찮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빤히 쳐다보자 이어폰을 떼어내며 "왜?" 라고 하길래 그제서야 나는 혼자서 끙끙 앓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얼마안가 눈치빠른 홍빈이는 역으로 내게 질문을 해댔다. 그것도 아주 담담하게.
― 여자는 아니지만 남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그냥 멋대로 오해하게 놔뒀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나을 듯 했으니까. 이제 대충 알아 들었으면 어서 나 좀 도와줘 홍빈아.
"그래서 아직 말은 해본적 없고?"
"해보기야했지…조금."
"근데, 네 그림 보고 비웃지는 않든? 너 그림 발로 그리잖아."
왠일로 이홍빈이 저렇게 잘 들어주나 싶었는데, 얼마안가 이홍빈 특유의 독설이 날아왔다. 물론, 맞는 말이여서 부정할 수 없긴 했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얘기한 건데 느닷없이 장난치는 녀석이 괘씸해서 결국 머리를 한대 쥐어박아주었다. 자기도 잘 못그리면서. 세게 쥐어박지도 않았는데 '아야!머리 깨지겠다!' 라고 생색을 내는 녀석을 보니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나름 괜찮게 잘 그렸는데 그 형한테 4B 받아서…
"헐, 야 고맙다."
그러고보니 내가 아무것도 안들고 가서 네가 그 사슴필통에서 4B 하나를 꺼내서 건내 줬었지 맞다! 내 물건이 아니니까 돌려주는게 당연한거고, 그렇게 네게 다가가면 전혀 이상할게 없을 듯 했다. 고맙다고 말하며 녀석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아 내 품에 들어오게 한 뒤 둥그런 머리를 몇번 쓰다듬자 홍빈이는 의아해하더니 앞머리 흐트러진다며 투정을 부렸다. 귀여운 자식.
점심을 평소보다 더 빨리 먹었다. 교복 바지 오른쪽 주머니엔 네게 받은 4B가 들어있었다. 혹여나 떨어뜨릴까봐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꼭 쥔채 그 교실로 향했다. 너는 오늘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늘은 연필이 아닌 붓을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부지런히 칠했는지 그림은 어느 정도 채색이 되어있었다.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똑똑똑 ㅡ 노크를 했다. 너는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다시 한번 노크를 해볼까 하다가 네가 싫어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된 교실이라 그런지 문이 꽤나 뻑뻑했다. 머뭇거리다가 네게 다가가서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 형. 저 기억나요?"
"응. 원식이? 1학년 7반. 쵸파 그린 애 맞지?"
너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봐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붓을 들고 이리저리 채색을 해나갔다. 뜻밖에도 너는 내 이름과 반까지 기억하고있었다. 네가 머리가 좋아서 기억하고 있었을테지만 너도 내게 관심이 있어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제발 그랬길 바랬다. 앞으로도 쭉 '김원식' 이 세글자를 아니 '나'를 잊어버리지 말아주었으면 했다.
"네, 아 어제 형이 빌려준 4B 돌려드리러 왔어요."
"너 가져도 돼. 근데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어…그게 그냥 어쩌다 보니까…"
주머니에서 4B를 뒤척거리며 꺼내들고 너를 향해 손을 펼쳤다. 네가 가져가면 나는 "고마웠어요" 라고 말하고 그렇게 헤어지겠지. 그런데, 너는 네 작고 하얀손으로 내 손을 움켜쥐더니 가지라고 했다.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을때 나의 고동은 하늘에 울려퍼질듯 했고 그게 들릴까봐 조마조마해댔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어떻게 왔냐고 묻길래 아차 싶었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하늘색 물감을 꺼내들더니 튜브의 끄트머리를 눌러 물감을 짜냈다. 튜브에서 '퐁' 하는 소리가 들리자 너는 베시시 웃어보였다. 오늘도 너는 귀여웠다. 그런 네 모습을 보자 나도 괜시리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전히 미소를 띈 채, 나를 올려다보고선 더 할말있어? 라고 하길래 그냥 인사하고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네 옆에 늘어선 책상 하나에 올라앉아 말을 건냈다. 이런 걸보면 나도 꽤나 용기있는 놈인듯 싶다.
"형은 그림 그리는 ㄱ..거 좋아하세요?"
"응, 엄청 좋아해."
"왜요?"
"그냥. 제일 재미있으니까?"
말을 씹었다. 형은 그림그리는걸 왜 좋아하세요? 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답해주었다. 그래서 두번째에는 원래 하려던 질문을 내던졌다. 생각보다 단순한 이유였다. 하긴,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였다. 이 문제로 몇일간 끙끙 고민했었지만 나는 그냥 네가 좋았다. 이재환 '너' 자체가.
"이제 네가 좋아하는 거 말해봐"
"……?"
"나도 궁금해!"
"형이랑 잘 어울려요. 그림그리는ㄱ…" 너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않고 느닷없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물었다. 너는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였다. 그나저나 내가 좋아하는거?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이재환' 이였지만 아쉽게도 '축구'로 답을 바꾸어 말했다. 축구도 물론 좋아하니까.
"저는 축구를 좋아해요."
"또?"
"어… 저기, 저 밖에 있는 푹신푹신한 소파요."
"그리고 또 뭐가 좋아?"
"아! 형이 칠하고 있는 그 그림도 좋아요."
"진짜? 고마워 흐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너는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당황스러웠지만, 네가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 듯 해서 아니 그렇다는 확신이 서서 좋았다. 나는 축구하는 걸 좋아하고 그리고 또 … 책상에서 내려와 교실을 둘러보다가 창 너머 항상 내가 앉아 너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교실안에서 보니까 또 색다르네. 나는 네게 이만큼이나 다가갔구나. 너와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도 기분이 좋았다.
이윽고 너는 흰색과 분홍색 물감을 번갈아 가며 칠해 나갔다. 아마도 네 그림 속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저 나무는 벚꽃나무인 듯 싶다. 네 그림도, 그림을 그리는 네 모습도 여전히 좋았다. 그저 이 시간이 나는 너무 행복했다.
― '그림이 좋다'는 말에 너는 고맙다며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웃음만큼 아름다운 봄이 그림 속에서 점점 피어가고 있었다. 너는 그렇게 봄을 그렸고 내 마음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오려는 듯 나를 간지럽혔다.
"있잖아요, 재환이형"
"응?"
"그리고 저는 형도… 많이 좋아해요."
나도 용기를 내어 봄을 그려보려 한다. 부디, 네 그림 속에서 흩날리고 있는 저 벚꽃만큼 아름다운 봄이 기다리고 있길. 그 봄을 너와 함께 맞이 할 수 있기를― fin.
재환이의 그림이 완성이 되고 '봄을 그리다'도 끝이났네요
새롭게 다가오는 여러분의 봄도 아름답길 바래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마침표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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