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전공책을 덮고 안경을 벗은 채 책상위로 엎드렸다. 시간은 새벽 두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독서실에 남은 사람들은 대충 어림잡아 서너명도 안되는 것 같았다.가방을 싸고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 다시 유리문을 닫고 계단에 앉아 바깥을 쳐다보았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움직이지를 않아 주머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1번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 응
"나 여기 독서실인데 너무 춥다. 데리러 오면 안돼?"
- 나 방금 술먹고 들어 와서 운전 못해. 택시 타고 와.
"나 돈 없는데."
- 도착하면 연락해. 택시비 들고 나갈게.
"……응."
꺼져버린 까만 액정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콜택시에 전화를 걸었다. 택시는 삼분만에 도착을 해 뒷좌석에 타고 오피스텔 이름을 부른 다음 눈을 감은 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에 도착 할 때 까지 죽은 듯 숨만 쉬었다.
_
모르겠다, 이 생각의 시작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고 지금 까지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대화를 자주 나누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 할 수는 있었다. 밥을 몇번 같이 먹은 것 만으로도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고, 술자리에서 주고 받은 몇마디 말로도 어떤 성격인지 짐작 할 수 있었다. 처음 해본 섹스에서도 얼마나 자상하고 따듯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네가 내게는 어리숙함을 숨기려 억지로 입꼬리만 올리는 소년처럼 보였다.
처음 봤을땐 지금 보다 머리가 좀 더 길었고, 청바지에 남방을 걸치는 것 밖에 못하던 찌질한 소년이였다. 역시 아직 고등학생 티를 못 벗었구나 싶었고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센스에 재밌는 아이인 듯 싶어 관심이 갔었다. 선후배 사이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 동아리에서, 그것도 무섭기로 소문난 기획부에서 서로 말을 놓은 사이는 너와 내가 최초였던 것 같다. 대학가면 친구 사귀기 어렵다던 형들의 말은 내겐 맞지 않았다. 얼굴을 익힌지 반년도 되지 않아 같이 자취를 시작하고, 동기생인 친구들 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너에게 의지 하는게 더 힘이 됐다. 그래서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특별한 마음으로 담아두던 감정을 터뜨리고 될대로 되라지라는 식으로 던졌던 추파를 넌 아무렇지도 않게 모르는척 넘어와주었다. 솔직히 나도 우리가 가까워지면 더 가까워졌지 멀어질 거란 생각은 안했다.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들과는 전혀 달랐다. 사랑보다 더 큰 것 같은 이 무언가는 이름을 찾을 수 가 없었고, 그냥 네가 너무 필요하고 소중하고 좋아해서 널 누군가에게 보내기가 싫어 채워둔 족쇄를 미화 시켜 사랑이라 표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 또한 나와 같은 것 이라고 말해주었다. 네가 일부러 나를 맞춰 주려 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네 옆에서 만큼은 내가 중심이 되었으면 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은 생각을 입는 우리가 닮아가는게 만족스러웠다. 마치 너의 모든게 다 내 것이 되어 내 살이 네 몸에 덧 난 것 같았다. 너를 닳고 닳을 때 까지 찾고 부르고 보아도 이런 나를 넌 질려하지 않았고, 집착이라 말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 하듯 덜도 더도 아니고 딱 나만큼만 너도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육년째 변함없는 감정선에 의지 하며 우린 지겨울만도 한 연애를 아직도 진행하고 있다.
_
"어떻게 하면 바가지를 그렇게 써."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 입자마자 종인은 침대위에 날 앉혀두고는 혼을 냈다.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아마도 돌고 돌아서 도착해 택시비가 만 이천원이나 나와버렸다. 무념에 빠지는 동안 택시기사가 딴 길로 빠졌던 것 같다.
종인은 굳은 표정을 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찌푸린채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만 쉬었다. 만 이천원이 그렇게 아까운건지, 내가 바가지를 쓴게 이렇게나 잘 못 된 일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도 속상한 마음에 반발하려 입을 때려하자 종인은 됐으니까 그만하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속상했다. 그냥 억울하고 속이 답답해서 숨만 여러번 쉬어댔다. 불을 끄고 종인을 등지고 누워 몸을 웅크렸다. 살짝 닿아오는 종인의 등이 미워 눈을 부릅뜨고 울컥하는 것을 애써 가라 앉히려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무심결에 나와버린 눈물에 당황하다 그냥 대놓고 울어버렸다.
"……형."
몸을 돌려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종인의 손길을 거부하고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종인을 돌아보았다.
"그래, 택시비로 만 이천원이나 써서 미안하다. 그게 그렇게 아까웠냐?"
종인 역시 몸을 일으켜 나를 마주보았다. 서러워서 나오는 눈물은 서러움이 끝날때가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우는데. 내가 뭐라했다고 지금 우는거야? 원래 이런거로 막 울고 그런사람이야?"
"나도 너한테 화나는 거 있어. 너 요즘 나한테 말도 안하고 늦게까지 술 마시러 다니잖아. 신경쓰여도 말 한마디 않고 넘어가는데 왜 너는 이런걸로 성질내서 사람 짜증나게해?"
"그럼 형도 뭐라하던지. 형은 왜 갑자기 울어서 사람 짜증나게하는데."
"……내가 우는게 짜증나?"
"……."
종인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 없이 거실로 나갔다. 대화를 하긴 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았다. 저렇게 갑자기 화를 내는 종인도, 그런 종인이 미워서 우는 나도, 갑자기 모든게 낯설어 보였다. 보통 때 같으면 내일이면 풀리겠지 싶어 그냥 잠을 청했을 텐데 서러워서 눈물이나고 내가 울면 가만히 달래주었을 종인은 나를 두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방금한 내 행동이 너무 애 같아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장롱에서 이불을 하나 꺼내들고 거실로 갔다. 쇼파 등받이 쪽을 보고 팔을 베고 있는 채 누워있는 종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팔을 빼 이불안으로 넣어주었다. 내게 화를 낸 너는 아직 미웠어도 네가 잘못했다고 하면 내가 잘못한게 맞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들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종인의 머리를 쓰다듬고 사과를 한 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되게 낯설고 어색했다. 별 것도 아닌 이런 사소한 일로. 네가 화를 내고 내가 울었다.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넘어갈 만 한 기분이 아니였다. 이미 지나버린 사춘기를 다시 겪는 것 같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계속 늘어났다. 결말은 없이 의문만 늘어간다. 툭 하고 머리 한 쪽에서 무언가가 꺼진 것 같다.
아.
혹시 우리가
변했나.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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