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antom W. 핀아 01. 향연의 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버킹엄 궁전 옆에 있는 세인트 제임스 궁전(St. James’s Palace)은 향연의 밤 준비로 바빴다. 붉은 벽돌로 쌓여진 궁전 안에서 수많은 챔버들과 메이드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린넨 천을 몇 겹씩 휘감아 들고 걸어 다니던 메이드들은 궁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예를 갖췄다. 화려한 보석 장식이 달린 쥐스또꼬르와 하얀 퀄로트 바지를 입은 디오는, 안에 브라운 색 질레 조끼를 입고 구두 소리를 내며 왕궁 복도를 걷고 있었다. 상의 한 쪽에 회중시계를 넣어 둔 디오는 시간을 흘긋 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디오의 뒤에서 카이가 단정한 연미복을 입은 채 따라 걸었다.
“공연은 어떻게 됐어?” “에일즈버리(Aylesbury)에서 공연 중이던 베릴로브(Barilov) 극단을 초빙했습니다.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유랑 극단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디오는말 없이 계속해서 걸었다. 카이가 하는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 처리에 만족한다는 디오 나름의 긍정의 의미였다. 조지 3세는 향연의 밤 준비에 앞서 잠시 왕실을 비운 상태였다. 출타 때문에 미리 왕에게 부탁을 받아 놓은 디오는, 사전 점검을 위해 궁에 미리 와 있었다. 테이블 보와 커튼 하나까지 꼼꼼히 확인하며 챔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평상 시처럼 깔끔하고 정확한 성격이 돋보였다.
세인트 제임스 궁전은 화이트홀 궁전이 불 탄 후 조지 3세와 왕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왕궁이었다. 버킹엄 궁전은 조지 3세가 관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별궁 정도로 쓰고 있을 뿐이다. 워낙 버킹엄 궁전에 있기를 좋아하는 왕이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머무르곤 하지만 디오는 사실 버킹엄 궁전을 더 좋아했다. 세인트 제임스 궁전처럼 붉은 색은 별로였다. 커다랗게 위로 솟아 있는 창문 틈새의 먼지까지 확인하던 디오의 뒤로, 아치형 문 앞에 한 남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볍게 걷던 남자는 홀 안의 디오를 보고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아치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다소 낭랑한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디오! 이른 점심부터 여기는 웬일이야?” “아, 리오.”
낯익은 목소리에 디오가 뒤를 돌아 보자, 녹스 리오마이가 끝이 뭉툭한 창 하나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디오는 처음 보이는 환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리오를 반갑게 맞이했다. 본래 이름은 녹스 리오마이(Nox Riomai) 백작이었지만 디오는 친근하게 리오라고 부르곤 했다. 뒤 쪽에서 카이가 살짝 경례를 했다.
리오는 군청색의 깔끔한 프락(Frac : 오늘 날의 연미복과 비슷함)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넘긴 모습이었다. 하얀 얼굴에 짙은 쌍꺼풀과 눈썹. 남성미 넘치게 생긴 얼굴을 가진 리오는 웃을 때면 하얀 이가 드러나는 미남이었다. 이미 수많은 귀족 영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는 상냥한 웃음과 동시에 사람들을 아우를 줄 알았다. 어디를 가던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디오는 필요에 의해 사람을 사귀는 타입인지라 겉으로는 친해 보여도 속까지 친해지지는 못하는 편이었는데, 유일하게 리오 만큼은 디오가 아끼는 자였다. 자신이 사라졌었던 반년 간 자신의 가문을 지켜주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향연의 밤 준비를 대신 하느라. 폐하께서는 왕비님과 함께 잠시 출타하셨어.” “향연의 밤 준비까지 네가 직접 한단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왕명인데.” “폐하는 가끔 보면 너를 막 부려먹는 경향이 있어. 너도 폐하께 좀 부드럽게 굴어봐. 매번 딱딱한 어투로 뎅겅뎅겅 무 자르듯 말하니 그렇지. 무식한 사람이나 궂은 일을 떠맡는 거야. 날 봐, 얼마나 부드럽냐.” “궂은 일 다 하더라도 이게 내 체질에 맞아. 적당히 대할 순 있어도 너처럼 부드럽게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리 내가 이중적인 면이 있다지만 철면피까지는 아니야.” “왜? 내가 볼 땐 충분히 부드러운데.”
너한테나 그런 거고. 디오의 말에 리오는 싱긋 웃었다. 뒤 쪽에 서 있던 카이에게도 반가움의 표시를 했다. 귀족들은 본디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지만 카이는 조금 달랐다. 어찌됐건 디오를 데리고 돌아와준 사람이기도 했고, 적어도 리오는 카이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워낙 디오가 어디를 가도 카이를 대동하는 바람에 이제는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 수도 있다. 리오는 뒤에서 움직이는 메이드와 챔버들을 흘긋 보고는 디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작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향연의 밤이 시작되면 3층의 홀로 와. 네게 소개시켜 줄 사람들이 있어.” “식사가 시작되면 자리 못 뜨는 거 알잖아. 누군데?” “와 보면 알아. 네게는 아주 좋은 정보가 될 지도 몰라.” “무슨 정보.”
리오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고개가 디오의 귓가로 다가갔다. 카이는 앞 쪽으로 나와서 잠시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리오의 목소리가 들리고, 디오의 동공이 작게 움직였다.
“네 어깨에 있는 초승달 문양의 상처에 대해서.”
* * *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밤은 점차 깊어져 갔다. 붉은 벽돌은 어둠에 쌓여 검게 물들어갔고 입구부터 왕실 파티 홀 안쪽은 기사들로 가득했다. 왕궁에서 여는 파티인지라 보안도 철저했다. 복잡하고 사람들이 많을수록 침입하기 좋으니 보안은 더 철저히 해야 했다. 수많은 귀족들과 사람들이 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입구부터 길게 늘어진 테이블 가운데에는 구운 닭 요리와 송아지 고기, 절인 염소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양 끝에는 옥수수와 크림을 넣은 수프와 생선, 그리고 커스터드가 있었고 고기와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크림이 접시 위에 한 가득 있었다. 테이블 옆 금색 콘솔 위에는 온갖 소다수와 와인, 맥주, 에일 등이 가득했고 챔버와 메이드들이 트레이와 접시로 귀족들에게 나르고 있었다. 작은 접시 위에는 말린 과일과 치즈가 와인 옆에 안주처럼 곁들여 먹도록 놓여 있다. 음식 냄새가 홀 안에 가득했다.
디오는 입맛이 별로 없었다. 귀족 영애들의 화려한 레이스와 꽃 모양 루프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리본과 자수가 박힌 스커트와 드레스는 언제 보아도 익숙하지 않다. 꽃 모양의 장식을 보다 보니 정말로 꽃 향기가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아 역겨워 할 정도로, 디오는 여자들의 행색에 질겁하는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여자라면 진저리 치며 싫어하던 디오 때문에 아버지인 루멘도 늘 혀를 차며 걱정하곤 했었다. 오르도 가의 후계가 끊기지는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한 손에 사자가 세공 된 금빛 술잔을 들고 있던 디오는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리오와 디오는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갖춘 만큼 항상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행동거지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쉐리 와인을 조금씩 음미하면서 언제 나갈까 타이밍을 엿보고 있던 디오의 눈에, 붉은색 크라바트를 목에 두른 채 한 쪽에서 백작들과 이야기 중인 리오가 보였다. 입에 술잔을 대롱대롱 물고 장난을 치던 디오는 피식 웃었다. 리오는 역시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몇 마디 하던 리오는 모습을 감췄다. 옆에 서 있던 카이에게 손 끝으로 신호를 보낸 디오가 술잔을 카이에게 넘겼다. 술이 잔 너머로 찰랑였다. 커프스 버튼을 다시금 매만져 채운 디오는 기둥 뒤 쪽으로 돌아 살며시 홀을 빠져 나갔다. “카이. 너는 문 앞에 있어. 혹시 누가 오는 것 같으면 바로 신호 보내고.” “네, 알겠습니다.”
붉은색 카펫이 깔린 계단 위를 올라 3층 홀로 올라온 디오는 커다란 버치 문 앞에서 카이를 세웠다. 양 쪽으로 개선문처럼 서 있는 문은 아득히 솟아있는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랬다. 디오는 카이에게 단단히 일러둔 후 금빛으로 도금된 문고리를 힘껏 밀어 젖혔다. 끼이이, 하는 괴상한 소리가 고요한 홀에 울렸다. 디오는 동그란 눈을 홀 안으로 굴렸다. 홀 한 가운데에 적갈색 체스터필드 소파와 마호가니로 만든 테이블 놓여 있다. 소파 뒤 쪽에는 붉은색과 갈색 벽돌이 뒤섞인 벽난로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소파 위에는 리오가 다리를 길게 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청색과 금색이 섞인 치파오를 입고 있는 남자와 적색 옷을 입은 남자두 명이보였다.
“오, 왔어? 이 쪽으로 와.”
먼저 빠져 나와 있던 리오가 손짓했다. 디오는 연미복을 손 끝으로 다시 정돈하고 테이블 쪽으로 걸었다. 아시아인 두 명은 디오를 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인사 해. 이 쪽은 변백현. 이번에 영국에 들어온 중국 무역상 중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상주로, 중국계 조선인이야.” “처음 뵙습니다. 메이화(梅花) 상업의 대표 변백현이라고 합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게 생긴 남자가 디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드럽고도 뻣뻣해 보이는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단정히 내려 앉아 있었다. 디오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일 뿐 백현의 손을 잡지 않았다. 한낱 상인 따위가 제 손에 닿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백현 또한 익히 귀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디오의 무시를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예의를 표했다. 백현은 오른쪽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끌고 와 디오에게 소개시켰다.
“이 쪽은 제 동업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박찬열 이라고 합니다. 역시 중국계 조선인이죠.” “박찬열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르도 백작님.”
키가 크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남자가 적색 비단 옷을 입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역시나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디오는 피곤하다는 듯 소파로 가서 리오의 옆에 앉았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신호를 간절히 보냈다. 백현과 찬열이 다시 의자에 앉고 나서야 리오는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저는 편하게 수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같은 아시아 이름이니 그게 편하시겠죠?” “별로 상관은 없습니다만, 호의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백현이 입술에 호선을 그렸다. 디오는 눈썹을 찡그리며 리오에게 그 이름은 뭐냐며 물었다. 리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의 입술에 장난기가 어렸다.
“왜? 너도 이번 기회에 아시아 이름 하나 지어 봐. 세계로 뻗어나가야 하지 않겠어?” “이야기나 계속 해.”
디오는 무심하게 대답하고 턱을 괴었다. 소파에 기대어 몸을 걸친 디오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 설탕 절임을 집어 들었다. 앞 이빨로 잘게 씹었다.
“이번에 녹스 가에서 팽풍차(膨風茶)를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서 쓰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상호야. 몇 번 이야기 하다가 친해졌는데 우연히 네 이야기를 하게 됐어.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
리오가 백현을 향해 손짓했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던 디오는 별안간 치파오를 어깨 밑까지 내리는 백현의 행동에 당황했다. 입술에 과일 절임을 물고 보던 그는 치파오를 가슴께까지 끌어내린 백현을 멍하니 응시했다. 새하얀 등이 벽난로 불빛 사이로 보였다. 백현은 일어서서 뒤돌았다. 그의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리오가 작게 중얼거렸다.
“목 뒤를 봐.”
디오의 시선이 백현의 목으로 향했다. 뒤로 누워 있던 디오의 상체가 벌떡 일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백현에게로 향했다. 하얀 등을 천천히 쓸었다. 깊게 파인 등골부터 타고 올라간 손이 백현의 목 뒤로 향했다. 작은 초승달이었다.
“이건…” “네 어깨에 있는 거랑 똑같지?”
디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백현의 목 뒤를 쓸었다. 익숙하게 보아 오던 어깨의 상처와 너무나도 똑같았다. 실수로 만들어진 상처가 아닌, 분명히 고의적으로 낸 상처였다. 둥그런 호선으로 찢은 후 가운데가 푹 파인 모습. 분명한 초승달 모양이었고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 어려울 정도로 똑같았다. 백현은 조용히 치파오를 다시 올렸다. 목 끝까지 다시 올려 입은 후, 허리 선을 정돈했다.
“약 반년 정도 실종되었다가, 돌아오셨을 땐 기억을 잃으셨다고 했죠.” “….”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저는 반 년이 아니라 약 한 달 정도이긴 했지만요. 다만, 백작님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저에게는 단편적인 기억이 남아있다는 것이죠.”
실례가 아니라면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백현의 말에 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찬열이 허리 춤에 채워진 작은 주머니에서 짧은 파이프 하나를 꺼냈다. 앞 쪽에 뚜껑을 열고 담배 잎에 불을 붙인 찬열이 가만히 백현의 입술에 담배를 물려 주었다. 백현의 붉은 입술이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가 홀 안을 가득 채웠다. 벽난로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백현의 입술이 천천히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천천히 얘기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 때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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