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럼요. 안 그래도 아까 추가 물량 더 넣었어요. 저희가 출판사에 연락을 따로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상혁아! 거기 전화 좀 받아!”
“200부 추가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 주시면 저희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은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마치 마감 하루 전 날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들 정신없는 모습. 택운의 1, 2주 차 인터뷰와 공연 칼럼이 실린 3월호가 발간되자 초판은 금세 완판이었고 갑작스러운 추가 물량 주문에 출판사와 덩달아 원고를 계속 찍어내야 하는 잡지사 역시 발등 위로 기분 좋은 불똥이 떨어진 셈이었다. 모든 언론사에서는 택운을 주목했고 택운의 집 앞에 취재진들이 모여 인산이해를 이루는 등, ‘혐한 피아니스트’ 정택운의 인기는 오히려 역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혐한이라는 꼬리표와 동시에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그의 뛰어난 연주 실력만큼이나 매력적인 외모 탓에 그를 추종하는 여성 팬들마저 생기기 시작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택운의 이름은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택운의 몸값이 오르고 네임밸류가 드높아질수록 택운을 단독으로 맡게 된 잡지사인 Luve에 대한 관심 역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택운의 전속 인터뷰어 이자 칼럼니스트인 학연에게도 여러 콜이 들어왔고 개중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페이를 부르며 학연을 초빙하려는 잡지사도 수두룩하였다. 사실 학연은 택운의 인기를 등에 업고 유명세를 타게 된 자신의 실상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게 죽어라 팝 칼럼을 수 십 편 써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람들이 이렇게 단박에 돌아서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갈수록 실적은 오르고 팀장인 홍빈의 얼굴 역시 환하게 피자 학연은 그저 그들을 향해 최대한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4월 호에는 정택운 인터뷰 5주차까지 실린다면서?”
“이야, 이번보다 4월호 물량이 훨씬 더 세겠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정택운 전속 맡는 건데, 괜히 뺐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씩 나눠서 5월 호까지 넣는 게 어때요?”
“정택운 쪽에서 퍽이나 허락해주겠다. 안 그래도 지금 그쪽 에이전시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텐데.”
그도 그럴 것이 택운의 인터뷰를 담당했던 잡지사나 출판사도 이 정도의 인센티브를 얻고 있는데 택운 측은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상황은 선했다. 에이전시 주가는 아마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까지 올랐을 테고 도저히 피아니스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인기를 얻고 있는 택운을 이제 거의 톱스타 마냥 대우 할 테니. 남은 인터뷰 일정이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가 만무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잡지 발간 전에 인터뷰를 여러 편 뽑아 놓는 건데, 라며 입을 모으는 사장님과 편집장님. 그 뒤로도 학연을 축으로 다들 축배를 드는 회식 자리가 이어졌고 오로지 학연만이 불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 뒤로 택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TV를 틀거나 인터넷을 켜면 쏟아지는 택운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할 뿐. 차마 별 다른 연락도 하지 못했다. 요즘 누구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택운임을 알기에. 인터뷰조차 하기 귀찮아하던 택운은 한참 인기 있는 배우들이나 촬영하는 고급 의류 브랜드나 전자제품 CF를 짧은 기간 동안 몇 편이나 촬영했고 피아니스트답게 악기 관련 CF도 굉장히 많이 촬영한 것 같았다. 믿기 힘든 점은 그렇게 많은 인기를 얻고 하루에도 수 백편 씩 쏟아지는 기사에도 택운은 절대 다른 잡지사나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그 점을 궁금해 했다. Luve와는 공연 기획 인터뷰도 5주 분이나 계약했는데 더 좋은 잡지사와 특별히 계약하지 않는 점이라 던지, 짤막한 Q&A 시간도 갖지 않는다던지. Luve는 그런 택운이 아마 의리를 지키고 있는 것쯤으로 치부했지만 학연은 그렇게 단순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거울 앞에서 학연은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꽤 오랜만에 인터뷰를 위해 택운을 만나러 가는 길. 일정을 잡는 동안 택운과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홍빈과 재환이 연락을 하고 학연은 홍빈에게 스케줄을 전해 받았다. 핸드폰 속에서는 시시때때로 뜨는 기사 사진에 그렇게 자주 보았던 얼굴인데. 이제 온연히 스타 취급 받는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이니 이렇게 떨리는 건가, 라며 자조하는 학연. 그래, 사실 택운은 10년 만에 만났던 그 날부터 이미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손닿으면 닿지 않을 것처럼 먼 곳에 서있던 택운. 애초부터 자신과는 멀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차라리 속편할 것이다. 택운의 에이전시로 향하기 위해 차에 오르고 평소와 같이 막히는 도로에 신경질이 날 쯤,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홍빈의 연락이었다.
“또 스케줄 확인 때문에 한 거죠?”
- 하여튼 학연씨 까칠하기는. 전화 받자마자 그게 할 소리세요?
“왜요. 나 지금 무지하게 바쁜데.”
- 맞긴 맞아요. 잘 가고 있나 확인하려고 전화했죠.
이 철두철미한 남자의 마음을 내가 꿰뚫지 못할 리가 없지. 학연이 첫 전속을 맡게 된 뒤로 홍빈은 학연의 스케줄이 생길 때 마다 꼭 미리 연락을 넣어주고 스케줄 시간이 가까워지면 따로 확인 연락을 해주었다. 꼼꼼한 성격의 학연이 스케줄을 잊을 리는 없지만 그보다도 훨씬 관리가 철저한 홍빈은 그런 학연을 신경 써 줄 정도로 학연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고 있었다. 택운과의 관계를 알게 된 뒤로는 원식이와 잘 해보라느니, 언제까지 원식이를 곁에만 두고 있을 생각이냐 등등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았지만. 안 그래도 지금 달리고 있다는 학연의 대답에 홍빈은 여느 때와 같이 따뜻한 목소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학연은 차 안에 내장된 시계를 한 번 흘긋 보았다. 약속했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초조한 마음에 핸들을 자꾸 두드리게 된다. 그리고 홍빈과 전화를 끊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고새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아마 추측컨대 이번 전화는 홍빈이거나, 학연을 찾는 타 잡지사의 콜 이거나..그러나 액정을 확인했을 때 떠오르는 원식의 이름에 학연은 꽤 반가운 마음으로 핸즈프리를 다시 연결하였다.
“우리 동생,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 그냥 해봤죠. 형 요즘 바쁜데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나 하고.
“하여튼 내 생각해주는 건 우리 원식이 밖에 없다니까.”
- 뭐 해요?
“스케줄 하러 갑니다. 나 지금 택운씨 만나러 가. 인터뷰 하러.”
이내 학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택운의 이름에 잠시간 흐르는 정적. 에이 씨, 진짜 이놈의 도로는 대체 몇 차선인데 이렇게 막히는 거야..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답답해지는 차 안 공기에 결국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아무렇게나 뺨을 때렸다.
- 나 사실 형한테 비밀 있어요.
“비밀? 네가 나한테 비밀이 어디 있어.”
-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에이. 뭔데? 일단 말해 봐.”
- 약속 먼저 해요. 지금 당장 달려와서 나를 때린다 던지, 욕을 한다 던지, 일절 금물.
“걱정 마. 요즘 하도 피곤해서 너 때릴 기력도 없어.”
학연은 가끔 자신이 흡연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앞뒤로 꽉 막히는 러시아워에 갇혀있을 때면 개운하게 담배 한 대나 피웠으면 시간이라도 얼른 갈 텐데. 하지만 담배가 얼마나 백해무익한 기호식품인지 익히 알기에 애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다리를 망가뜨려놓은 그녀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개 비흡연자였던 남자들이 담배를 배우는 곳인 군대. 학연은 박살난 발목 탓에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도 신검 4급 판정을 받고 공익 근무 요원으로 2년을 보냈었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도 담배를 손에 대지 않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지도.
원식은 한참을 뜸을 들였다. 학연은 원식을 재촉하지 않는다. 이 럭비공 같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닌 남자는 옥죌수록 도망가려 들 뿐이다. 그저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상책.
- 얼마 전에 정택운씨 만나러 갔어요.
“…어?”
- 그리고 형 대신 전했어요. 형이 정택운씨를 떠난 게 아니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
- 차마 이유까지는 말 못했어요. 형한테 뺨이라도 맞을 것 같아서.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도로가 뚫려있었던 모양이다. 뒤차가 소란스럽게 학연의 차를 향해 클락션을 울려대었다.
- 정택운씨한테 아무런 연락 없었어요?
“…어.”
-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그 사람.
“……”
- 나 때릴 생각은 말아요. 난 온전히 형 생각해서 대신 전한 거니까.
원식의 마음을 안다.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원식은 학연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보다도. 원식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 일방적인 애정이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진 적 없었다는 것도 안다. 원식은 제 사랑보다도 학연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학연은 원식을 원망하지 않았다. 원식이 아니었더라면 소심한 학연은 택운이 출국하는 날까지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을 것이다.
- 듣고 있어요?
“어. 듣고 있어.”
- 형 화났죠.
“어. 완전. 각오하고 있어. 복날 개 패듯이 패 줄 테니까.”
핸드폰 너머로 원식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원식은 제가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 복날에 봐요. 원식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어느새 터있는 도로에 학연은 작게 웃으며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이제 택운의 에이전시까지 향하는 길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더 이상 재환의 안내 없이 택운이 있을 연습실로 향했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연습실의 문을 열었다.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온 학연에 택운은 소파에 길게 누운 채로 학연을 맞았다. 며칠 만에 만나는 택운은 그 사이 더 멋드러져 있었다. 확실히 카메라 마사지가 중요하긴 하지. 헤어스타일도 바뀌었고 올라오다 보니 에이전시도 내부공사 중이었다. 아무래도 확장 리모델링을 하는 듯. 하지만 갑작스럽게 늘어난 스케줄에 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힘겹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고 학연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택운에 학연은 애써 그와의 시선을 회피했다.
“잡지 잘 팔리던데요. 학연씨 앞으로 전속 많이 들어오겠어요.”
“..다 택운씨 덕분이죠. 어디 저 때문인가요.”
분명 화기애애한 말들이 오감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에 학연은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새로 뽑아온 질문지들을 택운에게 건네었다. 3월호 잡지가 완판이 되자 더욱 높아지는 기대치에 질문지를 뽑는데도 평소보다 훨씬 심혈을 기울였다. 피곤한 와중에도 택운은 학연이 건넨 질문지들을 꽤 꼼꼼하게 체크했다. 오랜만에 찾은 택운의 연습실 분위기와 택운의 관련 된 이야기들을 타이핑해 나가는 학연. 학연은 문득 제가 건넨 질문지를 쥐고 있는 택운의 손으로 눈길이 갔다. 언제 보아도 하얗고 예쁜 손. 남자 손 치고 저런 섬섬옥수가 따로 없다. 어렸을 적부터 학연은 택운의 손을 좋아했다. 제 투박하고 까만 손과는 확연히 달랐던 건반 위의 열 손가락.
‘운아..나 할 말 있는데.’
‘무슨 말?’
‘손 한 번만, 잡아 봐도 돼?’
학연의 서툰 표현에 피식 웃던 택운. 고등학생 소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풋풋했던 그 목소리. 택운은 별다른 대답 없이 먼저 학연의 손을 꽉 잡아왔었다. 오히려 학연이 깜짝 놀랄 정도로.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의 택운은 여전히 손이 참 예뻤다. 피아노를 매만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다들 손이 예쁠까. 문득 저 손을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학연은 얼른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다시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겼다. 지나간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 눈앞의 택운은 더 이상 제가 알던 기억 속의 정택운이 아니었다. 그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일 뿐.
어쩌면 원식이 택운에게 그 말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약간의 기대를 걸었던 것도 같다. 자신을 대하는 택운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왜 자신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궁금해 하지는 않을까, 나를 조금은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는 아주 헛된 기대. 몇 차례의 형식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오가고 3주차 인터뷰가 완성되었을 때 까지 택운은 전혀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오히려 학연을 편안하게 대해오는 택운에 이제 정말 ‘남남’ 이라는 느낌을 퍼뜩 받았다. 말 그대로 공적인 관계. 택운이 검토한 질문지들을 다시 건네받고 노트북 전원을 끌 때 까지도 택운은 수고했다는 말과 그럼 4주 차 인터뷰 때 보자는 말만 남긴 채 소파에서 일어섰다. 학연은 그저 아랫입술을 깨물다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택운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학연씨.”
“네?”
“미안해요.”
“……”
“내가 학연씨한테 해 줄 말이, 미안하다는 말밖에..”
더 이상 택운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학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내려놓고 택운에게 걸어가 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피아노 앞에서 택운이 자신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던 날, 집에 돌아와 택운의 사과를 바랐었다. 하지만 막상 택운의 입으로 듣는 사과는 학연의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것처럼 아려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10년 만에 안는 택운이었다. 학연보다 약간 큰 택운의 덩치에 학연이 안고 있어도 안긴 것처럼 느껴지던 너르고 따뜻했던 품.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지만 그를 안았을 때 느껴지는 기분만큼은 10년 전과 하나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우습게도 행복했다. 마치 택운과 행복했던 그 때로, 아주 잠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택운을 안고 있었을까.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자각한 학연이 화들짝 놀라 택운에게서 떨어졌다. 멍하니 학연을 바라보고 있는 택운. 학연은 자신이 잠깐 미쳤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정택운을 10년 전 자신이 사랑하던 택운과 잠시 헷갈린 것이 틀림없었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해진 분위기에 학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이 내려놓았던 가방을 찾았다.
“죄, 죄송해요..그냥..우리 잡지 잘 된 것 격려 차원으로..”
그리고 순간 택운이 학연을 끌어당겼다. 택운에게 잡힌 손목이 아프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택운의 입술이 학연의 입술에 와 닿았다. 택운과의 두 번째 키스였다. 하지만 그저 비참하다는 감정밖에 남지 않았던 지난 키스와는 달리 따뜻하고 다정한 키스였다. 택운의 입술이 이렇게나 뜨겁게 느껴졌었던가. 손끝부터 묘한 저릿거림이 퍼져 올라왔다. 학연의 손목을 쥐고 있던 택운의 손은 곧 학연의 얼굴을 감쌌고 학연은 마치 지금 자신과 키스하고 있는 택운이 10년 전의 택운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도 행복하다고 여겼다. 택운의 손 역시 따뜻했다.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몸에 열이 많아 손이 무척이나 따뜻하던 택운. 학연은 천천히 택운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나 잡고 싶었던, 택운의 손. 이 하얗고 예쁜 손은 10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따뜻하였다.
학연이 먼저 입술을 떼어내고 잠시 택운을 올려다보았다. 절대 울면 안 된다. 더 이상 택운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수치였다. 나는 이렇게 너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다. 네 눈만 보아도 나는 여전히 너에게 사랑받고 싶다.
“이것도 격려차원으로.”
택운의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어쩐지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라 학연은 더 이상 택운 앞에 서 있지 못하고 얼른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택운의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에이전시를 벗어나 자신의 차에 빠르게 올라탔다. 아직도 제 손에 택운의 따뜻한 손이 잡혀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택운과 키스했다. 일방적이기만 했던 키스가 아닌, 학연 역시 잠시나마 행복함을 느꼈던 분명한 키스였다. 어째서 택운이 제게 키스한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격려차원으로 택운을 안은 학연과 격려차원으로 학연에게 키스한 택운. 말도 안 되는 것들. 아무리 택운을 공적인 관계로 대하기 위해 홀로 애써도 택운은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제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어쩌면 택운이 제게 복수를 하려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10년 전 그렇게 아프게도 택운을 떠났던, 떠나야만 했었던 학연에 대한 처절한 복수. 하지만 이것이 택운의 복수라 할지도 좋았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연은 불행하지 않았다.
빠르게 연습실을 뛰쳐나가는 학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택운은 그대로 자리에 쪼그려 앉아 마른세수를 하였다. 더 이상 마음을 숨기지 못했던 지극히 충동적인 키스였다. 학연이 저를 안아왔을 때,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듯 뛰는 심장에 그것을 숨기고 싶어 학연에게 키스했다. 하지만 학연과의 키스에 사고 회로는 정지했고 더는 학연을 자신의 인터뷰어로서 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학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학연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용했던 연습실 안에 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 학연일까 조심스럽게 발신인을 확인했을 때 액정 위로 떠오르는 ‘어머니’ 라는 글자. 택운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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