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힘이 들어간 손에 들린 분필에서 분필가루 대신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듬뿍 묻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그의 손이 커다란 움직임을 보이며 눈살이 찌푸려지는 상스러운 욕을 적을 것만 같았지만, 그 손은 쉬이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백현은 등을 돌리고 선 탓에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그 얼굴을 감히 예상해 보았다. 손에 볼록하니 튀어나온 위협적인 저 힘줄보다도 더 뿔룩 튀어나온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요 며칠동안 그는 마치, 그 커다란 등짝에 조그맣게 달려있어 눈에 띄지 않는 태엽이 다 풀린 것만 같이 굴었다.
처음에는 그 행동이 눈에 띄게 굼떠지고, 다채롭다고 감탄했던 그 밝은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가 했더니 결국엔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 달달 몸을 떨어대며 힘겹게 마지막 좁은 틈새까지 다 돌아가버린 태엽이 결국 꾹꾹 눌러담은 움직임을 다 개워내고 만 것 일테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그 태엽의 한계가 택도 없이 적은 양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도, 백현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너무 여유롭고 태연해 보이길래 이렇게 금방 태엽이 풀려버릴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 도비, 이혼했다며? "
채 한마디도 입 밖을 벗어나지 않은 조용한 교실이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꾹 삼켜내었다. 수많은 말들 중, 그 고요한 소란을 뚫고 비져나온 숙덕거림이 하필이면 저딴 이야기라니. 백현이 제 휘휘 돌려대던 펜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었다. 멍청한 놈들.
의도치 않게 소란을 휘어잡은 그 한마디의 주인은 그 말을 주어담지 못함을 원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안함에 눈알을 데굴 굴려대며 교실의 온갖 구석을 훑어보던 백현이 괜히 한번 목소리의 주인의 의자를 발로 한번 뻥 차주었다. 덜컹거리는 의자에 그 주인이 뻔뻔한 얼굴가죽을 백현에게 돌리기도 전에, 그가 먼저 그 텁텁한 얼굴가죽을 보였다. 모두가 헙 하고 내뱉고 있다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던 얕은 숨을 속으로 꾹 삼켰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이런것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은 벌써 몸을 꼬아대고 있었고, 주인은 책상을 뚫고 그 서랍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모양새로 책상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의도에 꼬리를 매단 그는 아이를 따라 그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이 꿈뻑거릴때마다 그 길다란 속눈썹이, 형광등 아래에 비쳐져 번쩍거리는 그 진한 눈동자가 아이를 삼켜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아이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속에서 멀쩡한 것은 백현뿐이었다.
묘한 자신감이 잡아당겨대는 입술을 꾹꾹 눌러내려 겨우 일자를 유지한 그 입꼬리는 꽤나 당당해보였다. 커다란 안경 아래로 숨겨진 그 순한 눈은 당당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 못하고 덜덜 떨어대는 분위기에서 유일한 그 시선은 그의 몸을 이리저리 찔러대었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시선의 끈이 그를 괴롭히며 이 쪽을 보아라고 얇은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 요구에 응답했다.
고개를 들어올린 그가 바로 뒷자리의 백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그리고 그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위치를 틀었음을. 오직 그 시선을 받은 백현만이 그 시선을 알아채고 그를 바라보는 눈에 조금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가 힘있게 올라간 앞머리에 가려지지 않은 눈썹을 씰룩였다.
" 변백현은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와. "
뭐야? 변백현이 뭔 죄야? 아직 눈치를 볼 상황을 대면해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고요 속에서 수군대었다. 백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황스러움을 참아내기 위한 행동이 아님을 금방 눈치 챈 그가 고개를 틀어 다시 칠판과 마주보았다. 이내 경쾌한 분필소리가 소란스러운 교실의 공기 위로 둥둥 떠다녔다. 자습.이라고 모양을 보인 하얀 선에 백현이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툭, 하고 책상 위로 떨구고 말았다.
백현은 씨발새끼라고 적지 않은 그가 새삼 어른같다 느끼고 있었다.
" 니가 소문내고 다녔어? "
뭐를요. 무심하게 뱉어진 그 말에 찬열이 허리에 손을 짚었다. 새하얀 셔츠 위를 덮고 있던 자켓이 찬열의 손에 위로 끌어올려졌다. 검은 슬리퍼 끝을 아스파드 바닥에 쾅쾅 박아대던 백현이 시선이 들어올려 그 모양새를 흘끔 흘겨보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 시선을 금방 거두었다. 나 놀리냐? 하고 제 정수리에 박힌 그의 목소리가 꽤나 매서워서였다.
" 제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거예요. "
" 니가 아니다? "
" 왜 못 믿으세요. "
끝까지 겸손하지 못하고 살살 끝을 올려가며 그를 약올리던 목소리가 일을 내고 말았다.
딱히 잘못했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열이 올랐겠다 싶어 백현이 살살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시선을 바닥으로 쳐박고 있는 백현의 눈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다 굳어버린 검은 알갱이들 뿐인 아스팔트 바닥에 백현이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마 밖으로 내뱉었다면 이 공간이 무너지고 말았을것이라 생각한 백현이 입술을 속으로 꾹 삼키고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얼굴보다 먼저, 그의 사원증에 매달린 그 선한 얼굴이 백현과 마주했다. 왠지 오랜만인 그 얼굴에 쉽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현이 제 교복 바지에다 손을 문대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백현의 시뻘건 손바닥은 아스팔트 바닥을 짚고 말았다. 뺨이 얼얼했다.
" 니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 "
" ……. "
" 진즉에 널 이렇게 해버렸으면 그 대단한 애정이 좀 식었을까. "
왜 때리고 그래요. 신음 대신에 비죽 튀어나올 뻔한 말을 헐떡이는 숨과 함께 힘겹게 삼켜낸 백현이 쥐어지지 않는 돌맹이들을 쥐어보려 손을 말았다. 시뻘겋게 얼어있던 손에 붉은 생채기가 났다. 맞은건 뺨인데, 왜 손이 빨갛고 지랄이야.
창피함인지 충격에서인지 백현의 머리는 지금 일어난 상황의 요지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고 자잘한 것들에 힘을 쏟고 있었다. 뺑글뺑글 돌아가는 뇌가 과부하가 걸린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제 눈까지 빙그르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고. 백현이 생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지하고, 느끼고. 딱 거기까지만. 딱히 이 몽롱한 상태를 호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꽤나 멋진말을 중얼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하얀 입김과 함께 흩어져버린지 오래였다. 뒤늦게 정신이 든 머리로 여러번 곱씹어보면 볼수록 그 원래의 형태는 사라지고 백현의 기억에 의해 변형된 이도 저도 아닌 길다란 문장만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머리를 댕댕 울려대기만 했다. 씨발, 뭐라고 했더라. 분명 내 욕이었을텐데. 떠올려야 무어라 반박을 하든 펑펑 눈물을 쏟아버리든 할텐데 제 뺨으로 꽂힌 그 주먹의 충격이 꽤나 셌던 것인지 머리는 아무것도 주워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머리까지 자존심을 부린다는 사실에 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선생님이 때린거라고 말할거예요. "
그리고 한숨과 함께 제 멋대로 뱉어진 유치한 말에 백현이 무거운 숨을 다시 한번 더 뱉어내었다. 이번엔 저 속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그 목소리를 꾹 누르려 애쓰며.
" 넌 참 좋겠다. "
" ……. "
" 나도 너처럼 생각없이 다 이야기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응? "
" …생각 없지 않아요. "
" 나도, 나도 너처럼 다 꼰지르고 싶어. 지금. 니가 우리한테 무슨 일을 저질렀다고. 니 그 행동들 하나하나 다 여기저기 소문내면서 널 곤란하게 하고 싶다고. "
주먹처럼 복부로 내려꽂힌 그 말소리에 백현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팍을 헐떡였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백현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자꾸만 입을 열었다. 충분히 고통스러워하는 그 몸뚱아리를 보면서도 부러 말을 질질 끌며 백현을 괴롭혔다. 내가 이렇게 많이 선생님을 괴롭혔나? 저를 반성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저에게로 달려온 '우리'라는 그 단어에 백현이 결국 온 몸을 때려맞고 말았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백현의 고개가 올라갔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 왜 우는건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울음이 터지고 만 것인가 보다. 백현이 남일마냥 무심하게 생각하며 주먹을 끌어올려 눈가를 문질렀다. 뜨뜻한 눈물이 묻어나왔다.
" 나도 울고 싶어. 백현아. "
정말이야. 가슴팍을 제 뺨을 쳐냈듯이 힘 주어 퍽퍽 쳐대던 그 커다란 눈에 금새 눈물이 차올랐다. 나도 울고 싶다고. 같은 말을 이리 저리 반복해 뱉어내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그에게 맞은 주먹에 백현의 시뻘겋게 얼어있던 귀가 먹어버린 것인지, 찬열이 울음 대신에 목소리를 놓아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던 백현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제 꼴을 확인할 수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저도 짓고 있을 표정을 똑같이 짓고 있는 그가 주먹으로 눈가를 꾹 누르고 있었다. 왜 울어요. 쌤…….
" 나한테 도대체 왜 이래…… 씨발. "
욕설에 눈을 커다랗게 뜨지도 못하고 입술을 벌벌 떨어대던 백현이 말라버린 눈물이 묻은 주먹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 잘못했어요. "
울지마세요. 쌤. 뒷 말을 꾹 삼킨 백현이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길게 자란 앞머리로 숨기며 웅얼거렸다. 울음에 잔뜩 섞인 그 목소리가 귀에 꽂힘에 그가 주먹을 떼어내고 앞을 바라보았다. 갈색빛이 도는 그 정수리가 그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잘못했다 말하는 그 목소리가 자꾸만 그의 귀에는 저를 미워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만 같아 숨이 턱 막혀왔다.
"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로. "
눈을 비벼대며 연신 잘못했다고 빌어대는 백현에게 그는 어른답게 굴지 못했다. 커다란 손으로 그 정수리를 덮어주지도 못했고, 그 모습에 연민을 느끼지도 못했고, 그 모습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도 못했다. 저보다 열살은 어린 것이 이렇게 빌빌대고 있는데도 무엇을 더 바라는 것인지 이제는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 잘못했어요. 제가 다. "
" 그만해. "
" 미안해요. 그래도, 그래도……. "
쌤이 좋았단 말이야. 뒷 말을 어렵사리 삼켜낸 백현이 바지춤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어 눈물을 다시 한번 닦아내었다. 백현의 입모양이 망가지며 울음소리가 커다랗게 튀어나왔다.
태엽
찬열쌤을 좋아하던 백현이가 민망한지도 모르고 들이대다가 결국 찬열쌤의 아내가 그 묘한 모양새를 보아버렸고
그거때문에 잘 살던 가정이 파탄난 찬열쌤이 항상 점잖던 모습 다 잃어버리고 엄청 애같이 화내는 모습이 보고 싶었어여
내가 쓰면 항상 눈물바다지 엉엉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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