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이 다가오는지 화창한 햇살이 창문틈으로 들어오는 와중에도 삭막한 이곳에는 타닥타닥 타자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손에 코코아를 든 현우는 익숙한듯 등받이가 없는 조그만 의자에 앉아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일 째 쌓인 피곤은 아침부터 빈속에 들이붇는 커피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지 자꾸만 하품이 몰려와 결국 등받이에 등을 대고 기지개를 켰다.
모든 형사님들의 눈빛에는 몇일새 그늘이 불어나 있었고 그 와중에도 황형사님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형아, 어제 새벽에 들어왔다가 아침 일찍 나갔어요. 누나는 자느라 못봤죠?”
“응, 몰랐어. 그래서 누나 대신 현우가 배웅해준거구나?”
“응! 누나 대신 형 볼에 뽀뽀도 해줬어. 잘했죠?”
아니, 얘는 내가 또 언제 황형사님 볼에 뽀뽀를 했다고... 그럼 나도 다음에 배웅해주면서 현우 대신에 볼뽀보나 해볼까.
아침부터 또 발그레 해져오는 볼에 다시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 마셨다.
“반장님, 큰일났어요!!”
마찬가지로 아침부터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던 성우가 앞머리를 휘날리며 사무실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큰일이라며 곧바로 리모컨을 들고 사무실안의 티비를 틀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TV가 켜지자마자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밤, 서울시 강남구에서 집안으로 침입한 괴한에 의해 현지 경찰과 그 가족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용의자는 박모군으로 추정되며 현재 행방이 묘연해 경찰이 추적중에 있습니다.
현지 경찰이 살해된 사건인 만큼 반드시 범인을 잡아 경찰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필요성이 보입니다.]
“저 뉴스 뭐야.”
“아씨, 누가 흘린거야. 우리중에 기자랑 접촉한 사람 있어?!”
모두가 하루종일 갇혀 사무실 밖을 나서질 않았는데, 기자와 접촉할 시간이 없었을뿐더러 우리가 언론에 정보를 흘려 우리의 목을 조를 필요가 없었다. 분명 다른 팀이나 그쪽 지구대에서 정보가 흐른게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훈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겠지만 사건이 뉴스를 타버린 지금, 주위에서 온갖 압박을 걸어오는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침부터 벌어져버린 최악의 상황에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쨍그랑’
피로 가득한 사건현장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자료화면으로 나갔고, 조금 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현우의 손에서 유리컵이 떨어져나갔다.
“저거.... 우리집인데.”
그 여린 얼굴에 충격 가득한 표정이 들어섰다. 유리컵을 들고 있던 손은 조금씩 떨려왔고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제야 모두 아차차, 실수를 깨달아버렸다. 성우가 급하게 리모컨으로 TV를 꺼버렸지만 이미 그 사건은 지나가버린 뒤였다.
“우리 엄마,아빠 어디갔다고 했는데.... 거기가 하늘나라였어요?”
곧 온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는 현우의 모습에 그 옛날 불길앞에서 모두를 잃고 울고 있는 한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를 누군가 따스하게 안아주었던것 처럼 현우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현우야. 괜찮아, 다 괜찮을거야.”
제대로 숨도 못쉬고 끅끅 거리며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발밑에 깨져버린 유리잔 밖으로 따뜻했던 코코아만 바닥에 고여있었다.
***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뉴스도 타버린 마당에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범인 검거가 늦어지면, 결국 우리 경찰만 망신당하는겁니다.”
“우리가 아는 정보 흘려보내고 공개수사로 전환합시다.”
사건이 뉴스를 타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 지금, 결국 급하게 또 한번의 회의 소집이 있었다.
빠른시일내에 범인을 잡지못하면 ‘동료를 죽인 범인하나 찾아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경찰’ 이라고 붙어버리는 꼬리표 때문에 간부들은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특히나 이미 공개수사에 대한 준비까지 마친듯한 지구대 사람들은 “유일한 목격자인 현우가 뉴스를 보고 쓰러져서 병원에 있습니다. 직접 뉴스를 봤기 때문에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라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꼼짝없이 지훈이가 범인이라고 만천하에 다 알려질판인데, 오늘 이른 아침부터 사라진 황형사님은 회의가 마무리지어지는 지금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계급이긴 하나, 지구대 장과 경감들. 그들의 계속 되는 압박에 반장님도 결국 고개를 숙이며 끄덕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 내일 기자회견 시간을 정하는 그들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걸로 하고 내일 기자회견 때 뵙죠.”
‘똑똑-‘
자리에 앉아 모두가 서류정리를 하며 일어날 준비를 할 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거친 호흡을 내뱉는 황형사님이 등장했다.
깍득하게 인사를 건네고 회의실 중앙으로 걸어들어오는 황형사님에게 “황경위, 오랜만이네.”,”더 잘생겨졌어.” 하는 상황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인사들이 오고 갔다.
“황경위, 이미 회의 결과 내일 아침 11시에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수사로 전환하는걸로 결정이 났네.”
“아뇨. 공개수사는 없습니다.”
황형사님의 자신감 넘치고 매서운 눈빛에 모두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여유가득한 미소를 지은 황형사님이 노트북에 USB를 꽂더니 빔에 화면을 띄었다.
“아시다싶이 현장에 있는 모든 증거는 박지훈군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상한 점들이 제법 있습니다.
먼저, 피해자의 집앞에 설치된 cctv에는 집안으로 들어오는 박지훈군의 모습이 찍혔습니다. 하지만 박지훈군이 집밖을 나서는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않습니다. 이미 모습을 찍혔는데, 굳이 나가는 모습을 숨길 이유가 있을까요?”
“아까 그부분이 이상하다고 김여주 순경이 이야기 했는데, 그 부분만으로 모든걸 판달할 수는 없네.”
아까 내가 회의에서 말했던 부분을 똑같이 설명하는 황형사님의 모습에 귀기울여 이야기를 듣던 지구대장이 황형사님의 이야기를 끊었다. 하지만 그에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는 황형사님이었다.
“맞습니다. 그 부분만으로 모든걸 판달할 수는 없죠. 그래서 또 석연치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는 거실에 위치했고, 그 곳에서는 박지훈군의 지문이 검출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범인이 박지훈이구나 확신을 갖게 되지만, 이상한 점은 박지훈군의 혈흔이 침실되서 발견된 점입니다.
침실에서는 꽤나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지훈군이 배에 칼을 찔렸죠. 중요한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상황상 범인인 박군이 남자 피해자와 싸우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할테지만, 침실어디에서도 피투성이였을 피해자의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박군이 먼저 부상을 입고 피해자를 해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정도의 피를 흘린 사람이 두 피해자를 가지고 놀듯 제압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증거로는 박지훈군의 혈흔은 거실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논리정연한 황형사님의 이야기에 회의실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그래서 그동안 현장검증을 가느라 그렇게 바빴구나. 누구보다 정확하게 사건현장을 꿰뚫고 있기에 이번엔 그 누구도 황형사님의 이야기를 끊지 못했다.
“과학수사법을 이용해서 벽에 묻은 혈흔의 양, 위치, 방향을 조합했을 때, 박지훈군의 왼쪽배에 부상이 있었던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cctv에 모습이 찍힌 용의자가 이런 부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힘들게 담을 넘어 도망칠 이유가 있을까요?”
황형사님의 질문 아닌 질문에 모두가 대답을 하지않았다. 물로 목을 한번 축인 황형사님이 다시 노트북의 화면을 넘기며 마지막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이상한 점이 가득한 이유는, 바로 그 현장에 치밀함을 가진 제3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조용하던 회의실에 황형사님의 발언으로 조금씩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에서 박지훈군의 피도, 다른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거실에 놓인 흉기에서만 박지훈군의 지문이 발견된 이유도.
부상을 입은 몸으로 힘들게 담을 넘어갔지만, 피를 흘리던 사람이 담을 넘어도 아무런 흔적이 남지않은 이유도.
마지막으로 과학수사 의뢰 결과 피해자의 배를 찌른 용의자와 지훈군의 배를 찌른 용의자의 신장, 찌르는 방법 등이 일치한다는 점.
이 모든 이유들이 박지훈군은 범인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할 수는 없습니다.”
***
누군가 범인을 박지훈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을 조작한 증거들, 하지만 그 속에서 나오는 치밀함.
새롭게 등장한 제 3자로 인해 공개수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사건은 더 복잡해졌다.
그 현장의 증거를 잘 파악해 수사가 그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게 만든 범인, 그는 수사 방식과 사건현장에 대해 매우 잘아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런 범인을 막아설 수 있는건 유일한 현장의 목격자인 현우 뿐이었다.
“자다가 일어났는데 1층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내려가려는데 엄마가 .......피투성이가 된채로 바닥에 누워서 고개를 저었어요.
그리고 곧 문을 열고 아이언맨 형아가 여기, 무슨일 있나요? 하고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나쁜 검은옷 아저씨랑 계속 싸웠어요. 너무 무서워서 계속 이불덮고 숨어있었어요. “
“혹시 그 아이언맨 형이 이 사람이야?”
“네. 맨날 제가 친구들한테 괴롭힘 당하면 늘 아이언맨 처럼 짠- 하고 등장해서 구해주는데 항상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었었어요. 물론 그날은 아니지만.”
병실에서 깨어난 현우는 완벽하진 않지만 부분,부분을 기억했다. 제법 의젓하게 말하다가도 엄마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황형사님을 쳐다보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도했다.
현우가 겪었을 무서운 상황과 끔찍한 기억,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힘든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현우는 애써 의젓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고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런 현우의 노력에 지훈이는 용의자에서 피해자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수사는 다시한번 방향을 잡았다. 현우의 정신적인 충격을 위해 아동심리치료사까지 현우를 만난 뒤 비로소 병실안에 현우만이 남았다.
“형아, 나 잘했어요?”
“응. 우리 현우 너무 씩씩하던데? 주사도 잘맞고, 이야기도 잘하고.”
아이에게는 벅찼을 일들을 씩씩하게 이겨낸 현우는 모두가 나가고 자신과 나, 황형사님만이 남자 그제야 7살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돌아왔다.
“형아가 맨날 씩씩하고 남자다워야 누나같은, 아,형아 좀, ......예쁜사람 만난다고 해서 꾹 참았어요.”
어느새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현우는 나를 보며 말해왔고 현우의 입에서 나오는 달달한 말들에 황형사님이 급히 현우의 입을 막으려했지만 현우는 웃으며 침대로 넘어지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에이, 맨날 자랑하잖아요. 겨우 7살인 나도 남자니까 누나한테 안기면 씽씽카 안 태워 준다고해서, 읍.”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