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진 여자친구 달래기.
라고 인터넷에 쳐봐야하나.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이미 토라져 입술을 쭈욱 내밀고 빵빵해진 볼을 하고 있는 여주였다.
그 여자는 혼자 나랑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건지 자꾸만 우리팀 방으로 와서 서성였다. 물론 "근데 여기 왜 있어요?" 하는 돌직구에 후다닥 자신의 팀으로 돌아가버린 여자였지만 여전히 여주의 기분은 풀릴 줄 몰랐다.
"잠시 밖에 걸으러갈래?"
"여주야, 이거 먹을래?"
"쌀쌀한데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여러번 용기내어 여주에게 말을 걸어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한결같이 "아니요."였다. 사실 아까에 비해서 조금은 풀린것같은 표정이긴 했지만 여전히 쌀쌀맞았다.
그 여자에게 잘해준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거리를 둔건데 뭐가 그렇게 서운했을까. 정말인지 수능을 만점받는것보다 어려운 일이였고, 경찰 공채에 6개월 만에 합격하는 일보다도 힘들었다.
정답을 모른다고 해서 그대로 빈칸을 제출할 수는 없는 법. 최대한 정답같은 내용이라도 찍는것 처럼 어떻게라도 기분을 풀어보기 위해 바닥에 깔린 술자리 안주들을 죄다 여주 앞으로 내밀었다.
"여주야, 이것도 먹어."
"황민현, 너 왜 이렇게 여주만 챙기냐? 누가보면 좋아하는 줄 알겠네."
뜬금없는 나의 고백에 아무생각없이 말을 꺼냈던 하형사님이 치킨을 집으려다 그대로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안주를 먹는소리, 이야기 하는 소리 등으로 시끌벅쩍했던 방안이 약속이라도 한듯 정적에 접어들었다.
깜짝 놀란 하형사님과 여주 이외에 반장님, 윤형사님, 성우는 서로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 정적에 그제서야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충동적이었다. 여주에게 나의 마음을 말하고 싶은 마음, 그러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 그리고 나의 진심이 섞여서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처음에는 그저 서로의 마음을 아는거, 그거면 됐다라는 마음이었는데 점점 어떤 관계로도 정의되지 않은 우리의 사이가 답답해졌다.
'사귄다' 그 세글자가 갖는 효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매번 장난스럽게 소개팅을 나간다며 놀려오는 여주를 잡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것도, 하루에도 수백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그 세글자에 우리가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물론 늘 그렇게 생각해오며 나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진심이 이렇게 한순간에 튀어나와 버릴지는 몰랐지만.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에요."
상황이 이렇게 되버리니 혼자 곤란해 할 여주에게 미안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경찰이고, 같은 팀이니까 우리의 사이가 팀에게 민폐를 끼치게 할 수 없다며 먼저 말을 꺼냈던 내가 이렇게 먼저 사고아닌 사고를 쳐버리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혼자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어색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주였다.
"안돼, 김여주 너 대답하지마."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깨는건 본의 아니게 이 분위기를 유도해버린 하형사님이었다.
"우리 여주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리 네가 황민현이라고 해도 우리 여주 쉽게 못준다."
"그래, 그건 맞아. 민현이 우리한테서 통과할 때 까지 여주 넌 절대 대답해주지마라."
거기다가 어느새 반장님까지 신이나 함께 거드셨다.
"여주 이상형이... "
"다니엘이 몸 좋은 남자랬어요!"
"맞아. 그럼, 여기서 제일 몸 좋은 사람이..."
"황민현인데?"
어느새 성우와 지성이형까지 합세해 뭔지 모를 그 자격(?)에 대해 토론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우리 중에서 제일 다정한 사람!"
"황민현인데?"
"그럼.. 우리 중에서 돈 제일 잘버는 사람!"
"유뷰남인 반장님 제외하면 황민현인데?"
"아씨, 그럼.... 주위에 여자가 없는 사람!...도 황민현인데?"
이건 여주의 남자로 테스트를 하는건지, 밀어주기라도 하는건지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만담에 어느새 모두가 즐겁게 웃으며 남의 일인 마냥 하나, 둘 거들기 시작했다.
"키 180 넘지? 통과."
"민현아. 집 전세야, 자가야?"
그렇게 모두가 농담처럼 웃으며 자연스럽게 술자리는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우리팀의 장점처럼 직장을 떠나 친구의 연애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하형사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느정도 눈치를 챈것마냥 놀라하지도 않았다.
"우리 민현이 전입오고 일이랑 연애하는것처럼 그렇게 살더니, 이제 장가도 가겠네. 다 키웠다 내새끼."
"반장님, 저 아직 허락안했습니다?"
아직 연애도 시작안했는데 벌써 장가까지 보내버리는 반장님의 진도에 여주가 발끈한듯 집어들던 젓가락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당황해하던 여주도 점점 그 상황에 동화되어 가더니 어느새 "황형사님 복근도 있다구요? 가산점 5점 드리겠습니다." 하며 누구보다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안했던 마음이 그나마 조금은 준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쌓여가는 술병들과 함께 이야기의 주제도 어느새 다른 주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언제나 맥락은 이리저리 휘날리는 바람처럼 훅훅 바뀌었는데 연애→결혼→유부남의 서러움→결혼의 장점→윤지성은 왜 결혼은 안하는가 까지 흘러가버렸다. 이 때즘 되자 모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남자 막내라서 혼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고생 좀 했을 성우는 술이 약한편은 아닌데도 벽에 기대어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민현아, 한잔 받아라."
평소에는 술은 절대 입에도 대지 않는 내가 야유회나 워크샵에 오면 취하더라도 잘 곳도 있겠다, 챙겨줄 사람도 있겠다 해서 가끔 술잔을 기울일 때가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신 반장님이 슬쩍 잔을 내미셨다.
간만에 쓰디 쓴 알코올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매번 먹어도 이 맛없는 술을 왜 먹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끼는 사람들과 이렇게 술잔을 기울인다는게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모두가 술에, 분위기에 조금씩 취해갔다.
***
어느새 시간은 12시를 넘어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술을 먹으니 평소보다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서 술이 그렇게 취하진 않았는데,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잠이 나를 힘들게했다.
아까 전 황형사님이 걸쳐준 가디건을 입고 거실 문을 살짝 열어 혼자 테라스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니 졸음도 조금 날아가는것 같았다.
"별 진짜 많다."
하루에 3번이상 하늘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던데, 하루에 한번 하늘은 커녕 사무실 천장도 한번 보기 힘든 현실이니. 내 팔자야- 하며 한숨을 쉬다가도 뒤를 돌아보면 방안에 둘러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작게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유독 하루가 길었다. 하루동안 많은 일을 했기도 하고 많은 일도 일어났다.
황형사님 주위를 맴도는 그 여자가 너무 싫어서 혼자 짜증을 냈다가도, 황형사님이 그 여자에게 잘해주는것도 아닌데 그냥 싫다는 마음만으로 짜증을 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내가 매번 소개팅을 하겠다고 황형사님을 놀리는것처럼 우리가 아직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다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나는 매일을 남자들과 보내는데 그렇다고 해서 황형사님이 화를 낸적은 없었다. 그런거 보면아직 내가 많이 어리긴 어리구나, 싶다가도 그래도 짜증나는걸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수 없이 왔다갔다 했다. 그런 내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났고.
그리도 그런 와중에 모두에게 뜬금없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황형사님까지. 내가 아는 황형사님은 아무생각이 없이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닌데 과연 무슨 생각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유머러스하게 상황을 넘어가주는 형사님들 덕에 나 또한 농담처럼 받아치며 웃어넘길수 있었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방안을 바라보면 오늘 처음 술을 먹는 모습을 보여준 황형사님은 예상대로 몇 잔 먹지도 못하고 취해버렸고 내가 있는 베란다 밖을 바라보며 헤-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매번 일에 있어서는 완벽하고, 챙김을 받기 보다는 챙겨주던 사람이 이렇게 빈틈있는 모습을 보이니 그것도 새로웠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황형사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처음 보는, 취한 황형사님은 내가 다가 오자 또 헤- 하며 아기같은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눈만 깜박이며 계속해서 나를 바라봤다.
“김여주, 잠깐 바람 쐬고오자.”
언젠가, 늘 쌀살맞던 황형사님은 어느순간 나를 챙겨주셨고 매번 회식자리에서 내가 취할 때면 바람을 쐬러 가자며 데리고 나가셔서는 술 좀 깨라며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그랬던 사람이 오늘은 이렇게나 취해 있다니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자 그런 나를 보며 덩달아 예쁜 미소를 지어보이는 황형사님이셨다.
"##황형사님, 잠시 바람 좀 쐬러가요."
"헤- 스크류바다. 고마워"
두손에 아이스크림을 꼭 쥐고 바라만 보던 황형사님은 이내 고맙다고 말을 하다 갑자기 한쪽 눈을 찡긋 하며 윙크를 보냈다.
오늘 처음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많은지라 당황스러워 웃어보이면, 시원한 냉기를 내뿜는 아이스크림을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로 볼에 비비며 "시원해." 하고는 아이처럼 웃어보이는 황형사님이었다.
평소에는 냉미남, 웃으면 온미남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 황형사님 이지만 오늘 따라 더 애기같은 웃음을 보였다.
"황형사님, 아까 했던 애교 또 보여주시면 안돼요?"
"애교...?"
"네."
"뚁땽해"
내가 말을 꺼내면 초롱초롱하게 눈을 깜박이던 황형사님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것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곧 바로 귀여운 애교까지 보였다. 숙소 뒷편, 어두운 공원이라 아무도 이 모습을 보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평생을 두고 두고 혼자만 보고 싶었으니까.
분명 레크레이션 때 심장에 위험하다는 빨간불이 켜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애교를 더 가까이서 보게되니 이제는 이미 사고가 터지고 그 사고를 처리하기 위한 사이렌소리가 귓가에 울리는것 같았다. 어찌됐든, 이 남자 너무 치명적이다.
"아이스크림 녹겠어요, 얼른 먹어요."
"네-"
마치 유치원생 아이가 된듯 아까 부터 내가 시키는 말이라면 곧이 곧대로 듣는 황형사님은 내 말에 아이스크림을 까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끄덕-
"그럼, 한 입에 다 먹어봐요."
아기같이 예쁘게 아이스크림을 베어물던 황형사님은 나의 짓궂은 장난에도 조금씩 아이스크림을 베어물더니, 볼이 빵빵해질 때 까지 꾸역 꾸역 아이스크림을 밀어넣었다. 이내 머리가 띵 해오는듯 눈을 살짝 지푸리다가도 마지막까지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은 뿌듯하게 깨끗해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나에게 내밀었다.
"잘했어요."
예쁜 아기 고양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평소 황형사님의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또 한번 눈이 휘어져라 웃어보이는 황형사님이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입안에 가득찬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황형사님을 바라보자니 아까부터 아이스크림 때문에 빨갛게 변해버린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황형사님, 뽀뽀해줘요."
순수한 아이를 데리고 나쁜 장난을 치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빨갛게 나의 시선을 뺏아가는 그 입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나의 볼을 톡톡 쳐보이면, 바닥을 쳐다보며 쑥스럽게 웃어보이던 황형사님이 조심스럽게 나의 볼에 입을 맞추더니 빠르게 멀어졌다.
어째서 우리의 스킨십은 매번 술을 먹어야 이루어지는건지. 저번 황형사님의 집에서 잔뜩 취해 뽀뽀를 하던 내 모습이 떠오르고, 내 눈앞의 황형사님이 너무나도 예뻐서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애써 눌렀다. 진정해, 김여주.
"여기?"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느라 손으로 꾹꾹 누르던 나의 손짓을 오해한건지, 황형사님은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해보이더니 이내 나에게 다가와 부드러운 입술을 다시한번 맞추었다.
당황스러움에 제대로 눈을 감지도 못하고 멀뚱 멀뚱 바라보면, 예쁘게 눈을 감은 황형사님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가 이렇게 사랑스러워도 되는건지, 황형사님의 따뜻한 온기가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순수한 입맞춤이 몇초간 이어졌을까, 황형사님이 먼저 살짝 입술을 떼내었다. 그리고 지긋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보였다.
"키스해도 돼?"
아까의 아기같던 눈빛은 온데간데 없고 잔뜩 잠긴눈으로 물어오는 황형사님이었다.
그 뜨거운 눈빛에 뭐라 답을 하지 못하고 황형사님을 바라만 보면, 이내 한손으로 부드럽게 나의 뒷목을 잡고 입을 맞춰오는 황형사님이었다. 그리고 아까와는 조금 다른 입맞춤이 이어졌다.
벌어진 입술사이로 아이스크림 특유의 딸기향이 스며들었다. 달달한 과일내음이 코 끝을 스쳤다.
조금은 아찔하게 황형사님의 입술이 나의 아랫입술을 쓸었고 아직 다 녹지않은 아이스크림의 차가움이 내 입안에 퍼졌다.
황형사님 처럼 달달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계속 되고 조금 차오르는 호흡에 거친 숨을 내뱉으면 살짝 입술을 떼었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틀어 다시 입을 맞춰오는 황형사님이었다.
그 흔한 조명하나 없는 작은 공원의 그림자 속에서 달달한 입맞춤이 계속해서 오고갔다. 오직 은은하게 비춰오는 달빛 아래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터질것같은 심장소리만 귓가를 울렸다.
호신술 자세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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