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주년 기념일
"소개팅 할래?"
여주는 남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일상을 차지한 그를 지워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래야만 했다. 남준과 여주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지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아무런 표정 없이 쳐다보자, 원래 새로운 사람으로 잊는 거야. 하며 어디선가 들어본 말을 한다. 정말 그래야만 잊을 수 있는 건가. 여주는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여주는 지민에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남준을 잊게 해줄 남자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소개팅 한대. 김여주."
남준은 지민과 친한 태형에게 소식을 들었다. 3년의 관계 속, 주변인들도 자연스레 섞여버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와 이별한지 한 달. 그녀가 생각나 무작정 찾아가거나, 그녀의 흔적으로 가득한 집에 하루종일 누워만 있거나, 일에만 미쳐 살거나 이런 일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주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소리는 여전히 그의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소리의 울림은, 남준의 마음 속에 남은 미련과 같았다. 조심스레 남준의 눈치를 보던 태형은 별다른 말 없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남준은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놀리던 손을 멈추고 한동안 멍만 때렸다.
나름 소개팅이라고 아끼는 치마도 입었다. 날이 좋아서 예쁘게 화장도 하고, 머리에도 공을 들였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약속 장소로 가는 길 내내, 여주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나기로 한 남자와 연락을 해도, 도착지가 가까워져도 떨림이 없었다. 심지어 마중을 나온 그 남자를 처음 봤음에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에 다른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에.
"반갑습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저두요."
형식적인 인사가 오고가고, 남자는 대화를 이끌어갔다. 오늘 소개팅을 위해 하루 월차를 썼는데, 여주 씨가 마음에 들어서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들. 남자는 그녀에게 호감을 표했지만 여주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간간이 작은 반응을 하며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여주에게,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큰 키와 옷 스타일, 무언가를 찾을 때 하는 제스처까지. 그녀가 아는 그 사람과 닮아있었다. 그리고 곧, 눈이 마주쳤다.
"..."
남준은 문을 열고 들어가 여주를 찾았다. 스스로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일을 하다가 뛰쳐나온 회사에는 뭐라고 말할 것인지, 무슨 자격으로 왔는지 수없이 물었지만 그런 이성을 억누른 감정이 그를 이끌었다. 곧 남자와 마주 앉아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이질적인 상황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그녀를 알고 지낸 시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잠시 굳어있던 남준은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자책했다. 자신의 차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또 피해를 주었다며 못나기만 한 스스로를 욕했다.
"저기..여주씨?"
"..."
"여주씨!"
"..아. 네."
여주는 더 이상 남자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실 소개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여주는 갈등했다. 쉬울 것 같았던 마음 정리를 도통 시작하지 못해서. 그에게 상처받는 것과 그를 잊어야만 하는 것. 둘 중에 무엇이 더 무거운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막상 헤어짐을 말하고 나니,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미련. 그녀도 무게를 늘려가는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다. 죄송해요.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그녀는 곧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를, 찾아야 했다.
"김남준!!"
터덜터덜 차로 향하던 남준은 귀에 쏙 박히게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뒤를 돌았다. 말도 안 되게, 정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녀가 서있었다. 뛰어온 듯 약간 숨이 차 보였다. 남준은 높은 구두를 신고 자갈이 깔려있는 주차장을 뛰었을 여주에 인상을 썼다. 너 왜 위험하게 구두 신고 뛰어. 이것도 역시 마음이 앞서서 나온 말이었다. 남준의 말을 듣고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를 빤히 보던 여주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는."
"..뭐?"
"너 일은 어쩌고 지금 여기 왔냐고. 나 때문에 왔어?"
"..."
남준은 따지듯이 묻는 여주의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네가 무슨 자격으로 왔냐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여주 앞에 서면 항상 초라해졌다. 말이 없는 남준을 따라 여주도 말이 없었다. 여주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왜 남준을 잡았는지. 무슨 자격으로 잡았는지. 남준을 보면 확신이 들 줄 알았는데,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둘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은 자신을 위해야 했다. 그 결과가 만남이든, 이별이든.
"전에는 왜 그랬어?"
"..."
"내가 소개팅한다고 하면 이렇게 일까지 때려치고 나올거면서."
"..."
"..처음으로 내가 네 일을 이겼네."
씁쓸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와야만 남준에게 일 순위가 될 수 있는 걸까. 자신의 소개팅 장소에 나타난 남준을 보고 혹여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자신의 앞에서 아무 말이 없는 남준의 모습에 역시 아닌 건가. 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감정이 점점 진정되니 아까는 몰랐던 발목의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살짝 삔 듯했다. 고개를 숙여 발목을 살피는데 그런 여주의 앞에 남준이 무릎을 굽혀 앉는다. 조심히 발목에 손을 댔더니 여주가 아. 하는 작은 신음을 낸다. 심각한 얼굴로 살피는 남준을 여주는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너 왜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일단 타. 너 그 발목으로 서 있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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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라고 봐 주시는지..
감사합니당..
원래부터 짧게 구상한 글이라 곧 끝날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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