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진의 법칙
1. 말하자면 복잡한
공강 시간을 틈타 연희와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사실 나만 노닥거리는 거고, 정연희는 열심히 과제 중. 캠퍼스는 파릇파릇한 새내기들로 붐벼서 추운 날씨에도 봄 느낌을 물씬 풍겼지만, 이미 새내기 배움터에서 대학의 고인 물을 목격하고 현타에 빠진 나는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휴가 나온 김석진이 틈틈이 실시한 <캠퍼스 로망이란 미디어의 조작>이란 세뇌를 아등바등 거부한 이유가 없었다. 이러려고 재수한 게 아닌데 말이야.
하릴없이 앉아 있으니 하품이 나와 입이 쩍, 벌어진다. 1교시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이 영 찌뿌둥했다. 역시 안 되겠어. 집에 가서 그냥 드랍해야지. 주울만한 수업 있는지도 좀 뒤적거려보고. 타닥타닥 노트북을 두들기던 연희가 손을 멈추고 문득 나를 바라봤다. 왜. 하품 너무 더럽게 해서 그래?
“김여주. 너 전정국이랑 아는 사이야?”
“어?”
“왜, 우리 고등학교 동창.”
“…아. 잘 모를걸.”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연희가 볼멘소리를 내며 팔을 툭 쳤다. 끝이 둥글어진 얼음을 빨대로 휘휘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제일 정확한 표현인 걸 어떡해.
“그럼 김태형은?”
“걔는… 얼굴만 알아.”
“진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 빨았다. 녹아내린 얼음 때문에 밍밍하다.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연희가 갸웃거리며 팔짱을 꼈다.
“뭐지?”
“왜 그러는데.”
“너 박지민이랑 자연과학개론 듣는다 했지.”
“엉.”
“그 조별 과제 있는 거 맞아?”
“맞아.”
“…걔네가 너랑 팀한다 했다는데.”
“…누가 나랑 뭘 해?”
“전정국이나 김태형이 너랑 팀한다고.”
뭐 이 시발?
“나 걔네랑 같은 수업 듣는지도 몰랐어. 그리고 아까 분명 박지민이 나랑 같이 한다고 이름 적으러 간다 했는데...”
“단톡 봐봐. 박지민 난리 났다.”
연희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들겼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이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농담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쟤도 나 만만치 않게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존나 띠용한 얼굴. 가방에 처박아 놨던 핸드폰을 꺼내 홀드키를 누르니 박지민한테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급히 핸드폰 잠금을 풀려고 했지만 식은땀에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결국 연희가 자기 핸드폰을 내 손에 건네줬다.
연희와 나, 그리고 박지민 셋이 쓰는 단톡방에서 박지민 혼자 폭주하고 있었다.
[박지민: 김여주]
[박지민: 제발 전화 좀 받아라]
[박지민: 너 김태형 전정국이랑 아는 사이 맞지?]
[박지민: 내가 너랑 같이 이름 올리려고 했는데]
[박지민: 걔네가 이미 너 이름 적어놨더라고]
[박지민: 교수님이 최대 네명이라해서 일단 넷이 하는 걸로 해두긴 했는데]
[박지민: 혹시라도 아는 사이 아니면 잣되는 거]
/
로맨스 영화, 드라마, 만화들을 쭉 살펴보면 흔한 설정이 있다. 전남친이 직장 상사가 된다든가, 이중계약으로 구썸남과 같은 집에 살게 된다든가. 권태든 오해든 어쨌든 과거에 헤어진 연인 혹은 썸단계의 사람들이 우연과 우연에 힘입어 다시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 클리셰 중의 클리셰 같은 그런 영화들에 대한 나의 호불호는 극불호였다. 스치고 지나간 인연들이 모두 개좆 같은 한남 새끼들인 덕에 그런 설정이 나오기만 하면 노세범 파우더로 거품목욕을 하는 것처럼 짜게 식어버렸다. 다행히 실제로 일어난 적은 아직 없었지만, 상상만으로도 분노에 떨기에 충분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정국과 나는 조금 애매한 관계였다. 물론 전정국이 나와 연애적 모멘트를 공유했다는 건 결코 아니다. 사실 전정국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애초부터 전정국과 나는 별로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학교를 넘어서 동네 유명인사였던 전정국과, 반에서조차 존재감이 미미한 나. 전정국이 남자주인공이라면, 나는 지나가는 조연 14 정도. 그런 전정국과 내가 개미 똥구멍만큼의 관계성이라도 있는 것은 온전히 김석진 때문이었다.
열 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입학식 전날 나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여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이후로는 처음으로 남녀공학이었던 탓도 컸지만,
“야 김여주. 나 먼저 간다?”
좆 같은 오빠 새끼랑 같은 학교라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그때는 매일 같이 김석진의 등신짓은 집에서 봐야 했던 나는 저 찐따 새끼랑 같이 학교에 가는 게 쪽팔렸다. 물론 지금도 쪽팔리긴 한데, 당시에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김석진이 나름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야. 그 2학년에 잘생긴 오빠 있잖아. 핑크 오빠.”
놀랍게도 핑크 오빠는 김석진의 별명이었다. 맨날 핑크색 후드티를 입더니 기어이 이런 별명까지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잘생긴 오빠> 또한 김석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친구들의 김석진 찬양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닭살이 돋은 팔을 몰래 가렸다.
김석진은 어렸을 때부터 잘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듣긴 했다. 친척 모임에서는 물론이고 시장이나 마트에 갈 때도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에게 참 훤칠하게 생겼다는 말을 꼭 듣고 다녔다.
김석진을 극혐하는 나도 껍데기는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 인정하는 바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별로 공감은 못 했다. 매일같이 보다 보니 익숙해진 것도 있었고 평생을 함께 살며 겪은 김석진의 인성에 질린 것도 있었다. 나중에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내가 눈이 높다는 걸 깨달은 후에야 김석진이 잘생겼다는 걸 ^이론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오빠 동생도 우리 학교래.”
...저거 나 맞지? 철저하게 숨겼는데 또 언제 소문이 났대.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친구들은 아무도 내가 오빠 동생인 걸 모른다. 입학 전부터 김석진에게는 아는 척 하면 죽여버리겠다 (협박에 가까운) 신신당부를 했고 학교도 집에 나서는 순간부터 각자 다른 길로 등교했다. 처음엔 괜히 창피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제는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서 완전 남인 척하는 중이었다.
“헐. 진짜? 남자래?”
“아니 여자라던데.”
“와 개부럽다. 집가면 맨날 그 얼굴 볼 수 있는 거 아냐.”
김석진과 같이 살아서 좋은 건 걔가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던 거밖에 없단다. 맨날 덤을 수북하게 받아오니까 엄마가 항상 김석진만 시켰거든.
“게다가 오빠 친구들도 다 존잘.”
“동생이니까 전정국이랑도 친하겠다.”
“아니야.”
“? 여주 네가 어떻게 알아?”
무의식적으로 답했다가 입을 헙 닫았다. 게슴츠레 뜨고 바라보는 애들의 시선을 피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전정국 낯 엄청 가리잖아.”
“하긴. 그렇긴 하지.”
어설픈 변명에도 친구들은 그럴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정국은 또 누구인가.
전정국은 김석진만큼 유명한 애였다. 본투비 나대는 성격인 김석진과 달리 낯가림이 심했던 전정국이 유명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잘생겨서 였고, 두 번째는 존나 잘생겼기 때문이었으며 세 번째는 진짜 존나게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낯을 가리고 말이 없다 해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밌는데 뭐가 더 필요해. 근데 또 키 크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에 돈도 많아.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전정국은 인기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필요충분조건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김석진과 전정국의 인기는 언제나 비등비등했다. 아마도 김석진의 친화력이 한몫했던 모양이다. 내가 창조주라면 심혈을 기울인 역작을 연습용 그림 따위와 비교해서 기분 나쁠 것 같았지만, 이걸 애들 앞에 말했다면 나는 역적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내 눈은 객관성을 잃은 지 오래긴 했다. 태어나보니 쟤가 오빤데 별수 있나. 내가 얼빠라 해도 악성 개인 팬이라고 욕을 먹기는 또 싫었으므로 나는 공평하게 둘 모두의 관심을 끄는 쪽을 택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곳곳에 짝사랑러들이 넘친 덕분에 종종 TMI들을 반강제로 들어야 했다. (전정국 TMI는 그렇다 쳐도 김석진 TMI는 진짜 귀를 파버리고 싶었다. 김석진 TMI는 무슨 종류의 빵이나 음료수를 좋아한다는 둥 우주폐기물급 쓰레기 정보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학년도 다른 두 사람은 고등학교 내내 잘도 어울려 다녔다. 내게 친구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김석진도 종종 전정국 이야기는 했으니까 꽤 친했겠지. 김석진의 위선에 속은 자들은 김석진이 전정국을 챙겨줬다 여겼지만 나는 오히려 전정국 김석진과 놀아줬다고 믿었다. 정신연령이 10년째 그리고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는 김석진이다.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들도 조숙하다던데 도대체 걔는 어떻게 된 모양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되서야 전정국이 왜 영양가 없는 김석진 옆에 붙어 다녔는 지 비밀이 풀리긴 했다. 왜 그 무수한 고백과 대시에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는 지도.
재작년 겨울이었다. 기억력이 금붕어 수준이지만 그날만큼은 상당히 또렷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자주 가던 동네 빵집에서 케이크를 할인 하는 걸 발견했다. 케이크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 스트레스로 당이 딸렸기에 바로 하나 사들고 집에 와 통채로 퍼먹고 있었다.
“돼지. 너 혼자 다먹냐?”
“그럼 너도 먹던가.”
방금 막 들어온 건지 코끝과 양 볼이 빨개진 김석진이 맞은편 의자를 빼서 앉는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젖살이 조금 빠져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하도 싸돌아 다니는 김석진과 달리 나는 본격적인 수험공부에 돌입한 바람에 서로 마주칠 시간이 없었으므로 조금 반가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멀뚱멀뚱 앉아있길래 넓은 아량으로 포크를 건네줬다. 바로 받아든 김석진은 케이크에서 딸기만 쏙쏙 빼먹는 충격적인 짓을 했다. 와 진짜 양심 뒤졌나봐.
“인성 뭐야? 굳이 증명 안해도 인성 개판인 거 알거든? 연말에 또 주먹 쓰게 할래?”
"야. 김여주."
"뭐 이 양아치야."
“정국이가 나 좋아한대.”
훅치고 들어오는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늘 네끼 먹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김석진은 너무 태연했다. 덕분에 나도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TMI가 또 하나 생기는 구나.
김석진이 학교 인기남에게 고백을 받았을 때의 반응으로 올바른 것은?
1. 축하를 해준다.
2. 구라까지 말라고 한다.
3. 자랑질이냐고 욕한다.
아무래도 3이 낫겠지. 무슨 비속어를 같이 쓸까 신중하게 고르는 데 김석진은 또 다른 정보를 알려줬다.
“그래서 찼어.”
전정국이 차였다니. 그것도 김석진한테.
김석진이 학교 인기남에게 고백을 받고 찼을 때의 반응으로 올바른 것은?
1. 모르겠다.
2. 모르겠다.
3. 모르겠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괜히 리액션을 하기 보다는 그냥 묵묵히 딸기 없는 딸기 케이크를 먹었다. 쥐가 파먹은 듯한 자국을 남기며 남은 딸기 한알 까지 모두 해치운 김석진이 유유히 떠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는 막연히 전정국이 유학을 갈 줄 알았다. 왜, 조금 올드한 만화나 드라마에서는 금수저들이 다들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가지 않는가. 대신 전정국은 이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말없이 조용히, 성실하게 공부를 했고, 역대급 불수능에도 잭팟이 터져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나는 주먹밥을 먹고 체한 덕에 재수 열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
2. 머피의 법칙
“일. 너랑 전정국은 아는 사이가 아니다. 맞아?”
“응응.”
“이. 근데 전정국이 너랑 조별과제를 한다고 했어.”
“박지민 말로는 그렇지.”
“삼. 왜?”
“나도 몰라.”
검지와 엄지로 없는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던 연희가 갑자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알겠다! 어느 유명 애니메이션 속 꼬마 탐정 자세를 따라 하는 걸 보니 아마 탐정 흉내를 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름을 헷갈린 거 아닐까. 사실 영주인데 여주로 잘못 적었다던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치그치.”
“근데 전정국이 그런 실수를 했을까.”
정적이 흐르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연희가 테이블을 가볍게 쾅 두들기며 또 다른 추측을 내놓았다.
“석진 오빠랑 걔랑 친했다고 했지? 어쩌면 너한테서 석진 오빠의 모습은 본 거 일지도 몰라.”
“…?”
“낯선 여자에게서 익숙한…,”
“진심이니?”
“당근 농담.”
연희가 헤헤 웃으며 카페모카를 한 입 마셨다. 나한테서 김석진을 보다니, 개뿔. 김석진과 나는 같은 피는 공유하고 있어도 외양은 전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내가 못생겼다는 말은 절대, 절대 아니다. 단지 닮은 구석을 찾기 힘 들 뿐이었다. 같은 호박이어도 애호박과 단호박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솔직히 가장 가능성 큰 건 전정국이 널 알고 있다는 거 아냐?”
“걘 나 모를걸. 지나가다 복도에서 몇 번 본 게 다인데.”
“석진 오빠 동생이잖아.”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너희도 나중에 내가 알려줘서 겨우 알았는데.”
“어쩌다 알았을 수도 있지. 오빠가 실수로 흘렀을 수도 있고."
“설마. 내가 얼마나 피똥 싸면서 숨겼는데. 그리고 김석진 성격 알잖아. 걔는 들켰으면 바로 와서 털어놔.”
전정국과 김석진 사이의 부담스러운 TMI를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아예 둘의 언급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혹시라도 실수로 이야기할까 봐 두려운 게 가장 컸다.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고 말고를 떠나서 남이 차인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지 않은가. 게다가 전정국이랑 친한 사이-안 친한 사이도 물론 말하고 다니면 안 되겠지만-도 아니고. 나는 벼룩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내내 스스로에게 전정국-김석진 금언령을 내렸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애들의 전정국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그 덕에 재수 생활 와중에도 내 TMI 수집 질은 틈틈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허구한 날 대숲에 등판하는데 전정국이 페북을 하지 않아 태그를 할 수가 없다던가. (전정국을 태그할 사람이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상경대 철벽남이라는 뉴타이틀을 획득했다던가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교에서도 만인의 짝사랑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던가.
“근데 김태형은 또 누구야? 얼굴만 아는 사이라며.”
김태형, 이라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작년의 일이 떠오른 탓이다. 뜸을 들이자 연희가 재촉했다. 야 뭔데뭔데. 팔을 잡고 흔드는 정연희의 어마무시한 완력에 종이 인형처럼 속절없이 흔들리다가… 갑자기 등에 차가운 게 얹혀졌다.
“엇…”
“…헐!”
돌아보니 커피 향이 확 났다. 이게 커피 향 향수는 아닐 테니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내 뒤에 서 있는 여자분이 실수로 커피를쏟으신 듯했다. 오늘 일진 정말 무엇? 마가 낀 게 분명해.
“아… 어떡해… 진짜 죄송해요.”
여자분이 허둥지둥 냅킨을 한가득 가져오더니 급하게 커피를 닦아냈다. 맞은 편에 앉은 정연희는 속도 없이 웃음을 참으며 끅끅걸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것도 나한테 미안해서가 아니라 여자분이 민망할까 봐 그러는 게 분명했다. 둘만 있었으면 진작에 깔깔거리며 웃고 난리 났겠지. 내 주변에는 왜 다 인성 좆창난 사람밖에 없는 걸까. (박지민은 내 인성이 좆창나서 그렇다는 김여주-멘탈-쓰레기설을 제시했으나 증거부족으로 내게 기각당했다.)
“이제 괜찮아요.”
어느 정도 수습은 된 것 같은데. 옷을 당겨서 보니 진한 갈색 얼룩이 흉하게 남아있었다. 여자 분은 나보다도 울상이었다.
“세탁비라도 드릴게요. 아니면 새로 하나 사드릴까요?”
“아니에요. 어차피 버릴 옷이어서…”
“정말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액땜했다 치죠, 뭐.”
반쯤 바람을 담아 한 말이었다. 제발 이걸로 악재는 더 없게 해주세요.
그러나 머피의 법칙처럼 세상일은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괜찮아요?”
괜찮다니, …까…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반사적으로 답하려다가 <요>는 떼어먹고 입을 합 닫았다.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잘생긴 얼굴은 분명 구면이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슬쩍 다가와 옆에 서길래 여자분 일행인 줄 알았더니 여자분도 나처럼 당황한 눈치다. 정확히 따지자면 저분은 오지랖 넓게 끼어든 모르는 사람에 놀란 거였고, 내 쪽은 갑자기 튀어나온 아는 사람에 놀란 거였다.
“다 젖었네요. 그대로 나가면 감기 걸릴 텐데...”
내 등을 뚫어져라 보더니 돌연 자기 후드티를 훌렁 벗는다. 뭐야???? 얘가 왜 이래??? 돌발행동에 나를 비롯한 카페 안의 사람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뭐야? 수군거림에도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왜 일을 저 녀석이 저지르는데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순식간에 얇은 흰 반팔티 차림이 되더니 검정 후드티를 내게 건넸다.
“이걸로 갈아 입어요. 밖에 추워요."
“…어, 그게…”
검정 후드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503이라도 된 것 마냥 어, 그, 따위만 멍청히 중얼거렸다. 망설이는 내게 결국 직접 손에 쥐여주고서야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난 수업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아, 네...”
“이제 반말해도 돼요?”
“예?”
“우리 이제 두 번 본사이잖아요.”
“…하하…그렇죠…네…”
“또 보자. 여주야.”
씨익 웃은 남자가 양손을 붕붕 흔들더니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연희가 짐짓 심각하게 중얼거린다.
“야…”
“…”
“또라인데 존나 잘생겼다.”
나는 후드티를 품에 안고 여자분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조용히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은근히 두툼한 후드티에서 산뜻한 향이 났다.
“이거 비싼 후드틴데! 박지민이 갖고 싶다고 지랄하던 거! 근데 저 사람은 뭐 저렇게 쿨하게 투척하고 가버리냐.”
“…”
“너랑 아는 사이 맞지?”
“…”
“왜 대답이 없어?”
얘가 미세먼지 먹더니 뇌에 먼지가 꼈나. 연희가 내 눈앞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연희야.”
“엉?”
“저 사람이 김태형이야.”
연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연신 대박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연희에게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진짜 대박이네. 파도처럼 몰려오는 피곤함에 양손으로 눈두덩이를 지긋이 눌렸다.
아… 인생 진짜… 시발이다…
/
김석진은 재수하는 동생이 있는 집에 꾸역꾸역 후배들을 끌고 오곤 했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술에 취한 놈을 데리고 왔다. 대학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동생에게 공부자극을 해주려고 했는지 아님 그냥 눈치를 밥이랑 같이 처먹은 건지. 아무래도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김석진은 곧 있을 군입대를 앞두고 마지막을 불태워야 한다며 매일 같이 술자리를 만들어(불러간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만든 거다)냈거든.
단언코 나는 김석진이 술 처먹는 거 자체로 꼽준 적은 없었다. 같은 애주가로서 맨날 퍼마시는 게 부럽긴 했어도 김석진의 간이 썩든 말든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얼마나 현실 도피를 하고 싶으면 저럴까 조금 애잔하기도 했고. 다만 처먹고 들어와서 지랄하니까 빡친 거였지.
기가 막히게 부모님이 야근하는 날만 골라서 술주정을 부린 덕에 고통받는 건 나뿐이었다. (분명 노린 게 틀림없다.) 아. 김석진 후배들도 고생이 많았다.
취한 김석진의 레퍼토리는 항상 비슷하다. 일단 들어올 때 손에 먹을거리를 꼭 쥐고 있다. 어쩔 땐 아이스크림, 어쩔 땐 떡볶이나 순대 등 그날그날 다르다. 집에 들어오면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여주야!!! 오빠 왔다!!! 목청도 더럽게 좋은 김석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귀를 막고 나가면, 바닥에 주저앉아 실실 쪼개는 김석진과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김석진의 후배를 볼 수 있다. 그러다가 김석진과 눈이 마주치면, 곡소리가 시작된다.
그 날은 김태형이 후배 포지션으로 있던 때였고, 김석진의 곡소리 에디션(27번째 개정판)이 가장 완성도 높은-다시 말해 가장 지랄 맞았던 때이기도 했다.
“아이고오- 우리 여주 재수해서 어떡하냐.”
“야 그냥 들어가서 조용히 발 닦고 자라.”
“재수가 없어서 재수를 하다니…”
우는 흉내를 내며 어깨를 들썩이는 김석진을 혐오스럽게 쳐다봤다. 쟤 진짜 미쳤나 봐. 김태형은 멋쩍게 웃으며 김석진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김석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형 그러지 말고 일단 방으로,”
“그러게 오빠가 주먹밥 말고 죽 먹으라 했잖아!”
평소 같으면 나도 가볍게 무시를 해주고 후배분에게 유감을 표하며 사과를 했겠지만, 그날만큼은 나도 예민함과 서러움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은 생각대로 안 나와서 답답한데 선생님은 자꾸 나태해졌다고 혼내시고. 애들은 캠퍼스를 신나게 누비고 다니는데 나는 재수학원에서 청춘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서럽고. 그 즈음이 재수 중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그리고 김석진의 술주정은 그렇게 억눌러 있던 내 울분의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니가 죽 말고 주먹밥 먹으라 했거든? 죽은 속 금방 꺼진다고!”
나는 곰처럼 날아서 하이에나처럼 김석진의 멱살을 잡고 분노의 짤짤이를 시행했다. 정의구현이다 이 오빠새끼야. 한참을 격하게 흔들리더니 김석진은 토할 것 같다며 내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김석진이 사라지고 난 거실에는 김태형과 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직도 분노의 여운으로 씩씩거리는 내 눈치를 보던 김태형이 위로라고 내민 한마디는,
“나도 반수 하려고 하는데. 같이 파이팅하자.”
고작 이거였다. 기껏 생각해서 응원해준 건데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그 말을 지금 들으면 아 그러셨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재수생인 나는 중2 때보다도 더 질풍노도를 겪고 있었으며 중2 때보다도 더 유치했다. 한 손(두 손이 아니라 한 손이다)안에 꼽히는 유명 대학을 다니는 김태형의 반수 한다는 말-더군다나 술자리 후 취한 오빠를 데려다주면서-이 곱게 들릴 리가 없었다. 솔직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 머 시발 어쩌라구>였다.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깜냥이 안됐던 나는 엉뚱한 데서 요상한 트집을 잡았다.
“반말… 하지 마세요.”
“…형이 동생이랑 나랑 동갑이라던데...”
“맞는 데요. 동갑이어도 처음 본 사이에 반말은 아니지 않나요?”
“…”
다시 말하지만, 재수 시절의 나는 중2 때보다도 더 유치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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