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수열] 피아니시모(pianissimo) 0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9/3/1/931df249b16d1bc879fdde4937228edf.jpg)
[01] |
치덕거리며 캔버스를 채우는 유화물감에서 지독한 기름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고즈넉한 과방 창문 밖으로 가득히 깔린 노을을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르는 노을을 한번, 붉은 물감이 타오르는 캔버스를 한번. 그리고 눈을 꿈벅. 오늘은 영 감이 오지 않는다. 세척동에 붓을 던져놓은 명수가 뻐근한 머리를 몇번 휘젓고 과방을 나섰다. 미대 출입구로 나오자마자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 오른손에 착 감긴다. 저녁때만 되면 어김없이 SOS를 보내오는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우현이었다. 주어 동사 다 잘라먹고 무작정 음대로 나오라는 문자에 명수가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현은 항상 이런식이었다. 배경좋은 집안에 3대독자로 태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유아독존의 전형적인 예. 하지만 곧 끝없이 부풀어오르던 나쁜 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함께 저녁을 먹을만한 적당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괜시리 우울해지는 마음에 뒷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었다. 우현이 자리를 뜰세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봄이라기엔 아직 바람이 차다. 검은 가디건을 꼼꼼히 여미고 조용한 캠퍼스를 걸었다. 아니, 명수에게만 조용한 캠퍼스를. 혹시나 휘잉-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라도 들릴새라 귀만 쫑긋 세우고 멍하니 걷다보니 벌써 음대 앞이다. 5층 제일 왼쪽 창문에 고개만 빼꼼이 내밀고 손을 흔드는 우현이 보였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입모양이 정확히 김.명.수. 명수의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조금이나마 빨리 추위를 가셔보고자 뛰어들어간 실내는 따뜻했다. 몇번이고 와본 장소이지만, 음대는 미대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하얗게 칠해진 페인트냄새가 아직 진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검은 때가 보였다. 우현이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음악의 교양이란건 이해할 수가 없다. 교양의 기본은 깔끔함이 아니던가. 지저분한 것은 딱 질색인 명수다.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나가며 괜히 벽에 묻은 떼를 박박 문질렀다. 이 꼴을 우현이 본다면, 또 결벽증이 도졌다며 쨍알거릴게 분명하다. 한참을 문지르고나니 벽이 본디 하얀색을 되찾았다. 손에 묻은 검은떼를 옷깃에 거칠게 닦으며 걸음을 떼는 순간, "아악!" 데자뷰인가. 더이상 낯설지않은, 그 날과 똑같은 목소리. 그리고, '미안해요.' 그날과 똑같은 남자. 오물거리는 입술의 모양도 병원에서 부딪혔던 그날과 같다. 다시 한번 명수는 제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어-' 남자가 멍하니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를 줄곧 응시하던 명수가 무심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딪힐때마다 풀썩풀썩 쓰러지는게 영 아니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계속해서 움찔거릴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 뭐해요?" '저 그게,' "손. 잡아요." 안절부절 못하며 바닥을 배회하는 가는 팔이 안쓰럽다. 자세히보니 남자의 초점이 흐릿한 것 같기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직접 일으켜주려 허리를 숙이려던 명수가 어깨를 툭툭 치는 손길에 뒤를 돌았다. 꽤나 오랫동안 명수를 불렀는지 목에 핏대가 약간 서있는 우현이 있었다. 명수의 손에 덩그러니 들린 핸드폰이 줄곧 진동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는 명수를 우현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수많은 우현의 문자를 내리는 명수의 표정이 가면 갈수록 굳어진다. 넘어진 남자는 우현과 명수사이의 냉랭한 기운에 주눅이 들어 계속 눈치만 보고 있다. [뭐하냐.] [오라고.] [야.] [못들으면 보기라도 하던지.] 마지막 글자까지 읽은 명수가 헛웃음을 뱉았다. 그리고 곧장, 미련없이 뒤를 돌아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분명 뒤에선 우현이 제 이름을 부르며 쫓아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멀뚱거리는 남자가 있겠지. [김명수.]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깜박거리는 화면이 걸리적거린다. 거칠게 배터리를 뽑았다. 넓은 캠퍼스를 지나 대학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큰 길가 여기저기로 지나다니는 자동차들. 수많은 인파. 화려한 LCD 화면에서 번뜩이는 광고들. 가게앞에서 쿵쿵거리는 스피커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손가락질을 퍼붓는 것 같았다. 장애인.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 지독한 이질감. 고요하고 지독한 이질감. 그 거대한 트라우마가 명수를 감싸들었다. "아아아아아악!!!!"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나의 외침조차 들리지 않는다. 내 세상은, 너무나 어둡기만 하다. - [피아노과 과탑이야. 시각장애인이고. 태어날때부터 그랬다네.] 번화가의 한 복판에서 미친듯이 울부짖던 명수를 겨우 진정시키고 자주가던 호프집까지 끌고 온 우현이 겨우 한숨을 돌렸다. 푹신한 쇼파석에 명수를 던지듯 내동댕이치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입모양으로 사람의 말을 읽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명수는 그 점이 정말로 답답했다. 그 점은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명수의 덕으로 본의아니게 핸드폰 타자가 빨라진 우현이 야금야금 안주를 집어먹으며 문자를 이어나갔다. [아싸까지는 아닌데 애가 멍청할정도로 순진해서. 친하게 노는 애도 없고. 매일 밤늦게까지 과방에서 연습만하고 가더라.] 한글자도 빠짐없이 우현의 문자를 찬찬히 읽은 명수가 제 앞에 놓여진 캔맥주를 단숨에 원샷했다.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같은 종족을 만난 동질감? [원한다면 소개시켜줄게. 교양시간표가 똑같아서 나랑 꽤 친하거든. 아, 우리랑 동갑이야. 2학년.]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면 우현이 뭐라 답할까. 십중팔구 미친놈이라고 비웃을게 뻔하다. [이름은 이성열.] 이성열의 목소리를 들었다. 생전 처음보는 이성열이란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3년동안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있던 나만의 세계에 새어들어온 한줄기의 빛. "내일 약속잡아줘." '... 응?' 청각장애인이라는 약점이 무색할만큼 반반한 얼굴로 뭇 여대생들의 헌팅대상 1호로 자리잡고 있는 명수로 인해 항상 피곤했던 우현이었다. 미팅이라면 지옥 끝까지 도망갈 기세를 보였던 명수탓에 울먹이는 여대생들을 정리하는게 일이라면 일이었다. 그런 명수가 먼저 약속을 잡아달라고 청한다. 벌써 취했나싶어 캔을 흔들어보니 묵직한게 아직 반도 채 마시지 않았다. 제 뺨을 찰싹이며 몇번이나 때리고나서야 현실을 자각한 우현이 환호를 금치못했다. '너 취향이 그런쪽이었냐?' "닥쳐." 진지하게 그 남자와, 조용한 곳에서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다시 소리가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한줄기 희망이 생겼다. 아주 오랜만에 명수의 얼굴 위로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
안녕하세요 봉봉입니다!. 규칙적인 연재따위... 피아니시모는 제목대로 여리게 천천히.. 그래요 편안하게 갑시다... 아 시험공부때문에 힘드네요. 오늘 갑자기 감수성폭팔해서 썼는데.. 역시 오랫동안 글을 쉬니까 문체가 장난이 아니네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전 글잡에서 독자님들과 함께할때가 제일 편안하고 좋아요. 스릉해요 그대들! 암호 환영이요~,~ Ps. 아련하고 예쁜 브금 좀 추천해주세요! 우려먹기... 흡....ㅠㅠ작은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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