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생각의 전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나른하던 눈은 색기 넘치는 처진 눈으로 변모했고 유난히 갸름하던 입술은 내 입술을 밀쳐내는 상처로 치환되었다. 그는 새로이 정의되었다. 그는 비로소 내 이상형으로 바뀌었다. 이 모두 지난 겨울로부터.지난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수능을 여유롭게 치를새라 눈이 왔고 칼바람은 나를 베었다. 공부하던 중 매번 나를 핥고 지나가던 얼룩덜룩한 압박은 조금씩 덜컥거렸고 대학 합격 통지와 함께 완전히 부서져나갔다. 모두를 조이던 그것은 이제 덜렁이며 다음 세대들에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이다. 속박하던 압박으로부터 벗어난 우리는 자유스러웠다. 반질거리는 교복 엉덩이와 짧아진 치마, 추위에도 내 몸은 방실거렸다. 하지만 그는 좀 다른 것 만도 같았다. 여전히 차분하고 다정했을뿐. 그의 교복은 단정했고 그의 미소도, 그의 손가락도, 그의 눈도, 그의 숨소리마저도 다정했다. 일정의 자유가 그들앞에 엎질러져 있음에도 그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순진했고 순정적이었다. 아니, 그것 또한 내가 그에게 갖고있던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에게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었고 그는 내게 다정했다. 다정함은 나를 찢어놓았다. 활개치던 정신은 점점 얌전해졌고 그의 모든 것에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밀어를 속삭였고 그의 입맛은 나의 입맛으로, 그가 듣는 음악 역시. 하다못해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그의 이상형 까지도. 다만 그는 내게 다정했을 뿐이었다. 다만, 다만.그 날도 역시 그는 책상 위에서 잠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엔 싸늘한 겨울빛이 아룽거렸고 그의 등은 꿈틀거리며 자신을 표현하려 애썼다. 일자로 가볍게 쳐진 그의 목덜미엔 빨간 자국이 묻어있었다. 이게 무엇이지, 순간 호기심이 동했다. 그의 목덜미에 눈을 갔다대고 그것을 파악해본다. 빨갛고 동그랗다. 순간적으로 위험한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안도의 생각 역시 스친다. 그것은 나와 나의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막이다. 막은 내 귀에 속살거린다. 믿어, 보인대로 믿어. 입술이 부빈 자국이라 믿어.그의 목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은 키스마크였다. 짙고 깊게 푹 패여 그의 목을 조일 듯 억누르고 있었다. 뽀얘진 키스마크는 강하게 그를 후드려친 것 같았다. 사실은 내 환상속의 그를. 강하게, 강하고 더 강하게. 그의 모든 것을 깨뜨려 부순 것같았다. 단정한 목덜미와 단정한 바지주름과 단정한 손톱과 다정했던 손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환상으로 존재했던 해사한 그는 이제 음란해졌다. 퇴폐적이고 더없이 얼룩져버린 것이다. 나는 끔찍함과 실망에 흠칫 몸을 뒤로 뺐다. 그때 그가 부스스하게 일어났고 나른한 눈이 나를 향했다. 저 눈마저도 욕정에 휘감긴 것 같아 등이 저려왔다.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이다 나를 향해 씩 웃는다. 그의 말간 이가 그대로 보인다. 분명히 나는 그가 더럽고 더없이 음란하다 치부하고 있는데 왜 지금의 그는 나를 흔들어 놓는 것인가. 무딘 이성과 섬세한 감성이 머리채 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내 삶을 핥기 시작했다. 무심결에 감은 눈동자 아래 그가 어른거렸고 내 꿈안에선 그가 겉돌고 있었다. 꿈 안의 그는 오직 나를 위해 짜여진 사람같았다. 다른 누가 아닌 나만을 위해. 꿈 안에서만 그는 내게 키스했고 나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손 안에서 나는 더없이 흥분했다. 그의 향은 나를 좀먹어갔고 누군가가 나를 꽉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길은 티없이 맑았고 그의 눈 안으로 빨려들어간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로망과 욕망이 교차했다. 로망과 욕망의 교점에는 그가 있었다. 그는 내 로망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손길은 내 욕망을 충족시켰다. 그 모든 것이 꿈, 꿈, 꿈안에서만.졸업식이 차츰차츰 피부위로 문대져오기 시작한다. 코트 사이로 배여드는 겨울바람은 녹록찮았고 그는 여전히 다정했다. 교장의 늘어지는 축사 사이에 그가 끈적하게 녹아들었다. 다소 살이 빠진 그는 코가 빨개져 있었다. 키가 큰 듯 헐렁하던 교복바지가 말쑥하게 맞는다..그의 울퉁불퉁한 손은 그새 또 손톱이 잘려있었다. 저 손으로 나를 반겨준다면 좋을텐데. 나를 휘젓던 저 손가락. 손….고아한 그의 등에 내 머리통을 부대끼고싶다. 그의 넓은 등에 나를 묻어버리고 싶다. 쏟아지는 욕정 사이에 혼미해져 간다. 다만 이것이 마지막 열병이면 좋으련만.서로에게 졸업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해준게 무어 있다고 웃어, 그는 가볍게 내 볼을 쥐었다. 그는 나를 꼭 껴안아 주며 웃었다. 잘 지내라. 으, 응. 얼떨결에 대답했고 그는 총총거리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의 얼굴 위론 플래시가 그칠 새가 없었고 그의 얼굴 위론 낯선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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