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진짜 덥다.하복 입으나 마나야."
"그러니까.이렇게 더운데 왜 교실 에어컨 못 틀게 하냐고 진짜.나쁜 선생들."
"내 말이."
의자에 앉아 희멀건한 다리를 열린 창가에 뻗어 걸친 채 바람을 맞으며 비실비실한 목소리로 투덜대는 세훈에게 동의한 종인은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책상에 쩍 달라붙은 찍찍한 팔에 힘없이 부채질을 해댔다.바람마저 짜증나게 덥다며 중얼거리던 세훈이 아예 의자에 상체를 늘어뜨리는 종인을 흘깃 돌아보더니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하계방학 기숙사 신청서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깜쫑.너도 방학 때 긱사 신청할 거?"
"당연하지이-집에 있어봤자 엄마 아빠 잔소리만 듣는데에-"
"그리고 술도 못마시지."
"맞아."
공공연한 비밀을 괜히 작게 속삭여대는 세훈의 목소리에 함께 킥킥 웃은 종인은 조금 기운이 나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그러고 보니 어제 종대에게서 놀라운 소릴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오센.이번에 찬열이 형도 기숙사 신청했대."
"뭐 진심?찬열이 형이?왜?그 형 학교 밥 싫다고 맨날 통학했잖아."
"몰라.종대형한테 공부할 거라고 했대."
".......종대형이랑 술 마시다가 한 소리 아니고?"
"레알."
"헐,대박.쩐다."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자느라 퉁퉁 부어오른 쌍커풀을 둥그렇게 뜨며 사실임을 강조하는 종인의 표정에 세훈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찬열이 형이 공부라니.잠시 맹해진 눈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세훈의 눈이 문득 종인을 향해 들렸다.
"형 혹시 우리 모르게 누구한테 차였나?"
"...모르지?"
종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역시나 장시간 수면으로 인해 부어오른 붕어입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술 마시잔 소리도 안하긴 했어.
**
[변백ㅠㅠ이번에 왜 긱사 안 들어와ㅠㅠㅠ방학엔 긱사가 꿀이쟈나ㅠㅠㅠㅠㅠ변백ㅠㅠㅠ]
"..................."
비굴함과 간절함을 적절히 표현한 문장을 백현의 중국어 교과서 귀퉁이에 대각선으로 깨작거렸지만 백현은 묵묵부답으로 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으면서 이 문제만 나오면 조잘대던 입을 꾹 다무는 백현의 태도에 심통이 난 종대가 굴하지 않고 샤프의 뒤로 백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백현은 절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결국 먼저 지친 것은 오늘도 종대였다.종대는 샤프를 펼쳐진 교과서 위로 툭 던지곤 볼을 살짝 부풀렸다.
벌써 두 달째 백현이 이상하다.
정확히는 그 날 부터였다.날짜도 기억한다.4월 13일.바로 백현이 음악실에서 혼현을 내보여 양호실로 간 날이었다.그 날,학교에 새로 부임해 왔다던 크리스에게 소중한 이름을 능욕당한 후 평소보다 맛없는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 온 종대는 멍한 표정으로 교실에 앉아있는 백현을 발견하곤 날듯이 뛰어갔다.이상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능욕했다며 백현에게 하소연할 셈이었다.하지만 백현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튀어간 종대는 백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수 밖에 없었다.
「변백..괜찮아..?뭔 일 있었어?」
「..............모르겠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멍하게 풀린 눈으로 중얼대는 백현의 머리통 위로는 어느새 하얀 귀가 다시 팔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일이 있는 게 분명해.....'
벌써 두달이나 지나버린 그 날의 백현을 떠올리며 종대는 홀로 중얼거렸다.수업을 하고 있던 크리스가 어느 새 책상 바로 앞에 서 있는 것도 눈치재지 못한 채.
"종대."
"..............."
"콩쥐."
"아,콩쥐 아니라고!......요...."
콩쥐.이것은 중국어 시간에만 존재하는 종대의 증오스런 애칭이었다.멍한 백현에 자신 역시 멍하게 있던 그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닫혀있던 교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제각각 떠들고 있던 어린 십대 반수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것은 크리스의 엄청난 비주얼과 기럭지였다.굳이 페로몬이 아니더라도 외관에서부터 풍기는 포스부터 엄청난 금발의 장신미남에 열광하는 남학생들의 소란과 질문을 특유의 거만한 시선으로 압도하더니 소개 하나 없이 중국어 수업을 시작해 버리는 크리스의 태도는 안 그래도 백현의 상태에 한 번 놀란 종대의 느린 뇌를 핑핑 돌게 하기 충분했다.그리고 바로 그 수업시간에 종대를 보자마자 음흉하게 웃으며 발표를 시킨 크리스는 종대의 중국어 발음이 굉장히 허접하다며 딱 한마디로 교실을 초토화시켰다.
「종대.넌 이제부터 '김콩쥐'야.」
그리고 다시 지금.벌써부터 작열하는 태양이 무더위를 예고하는 6월의 초여름날.언제봐도 커다란 크리스가 오랜만에 여학생들의 시선을 후리고 다니는 잘생긴 미소로 종대를 내려다보고 있다.하지만 그것은 종대만이 아는 크리스의 요상한 기질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크리스를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뻣뻣해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종대는 책상 밑으로 백현의 바짓자락을 꾹 쥐어보았지만 백현은 또 알수없는 고민에 빠진 것인지 멍한 표정으로 교과서에 '자꾸 생각나'라는 알 수 없는 문구와 웬 열매모양 낙서를 잔뜩 그려넣고 있었다.바로 옆에서 짝지가 선생님에게 어떤 농간을 당할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그런 백현을 흘깃대며 눈만 도르륵 굴려대는 종대를 바라보던 크리스는 상큼하게 웃으며 종대의 깨끗한 교과서 위로 커다란 손바닥을 턱 소리가 나게 올리곤 눈을 맞추었다.
"내일까지 단어 하나당 백번씩 써 와,콩쥐."
종대는 진심으로 자신의 인생은 4월 13일의 점심시간 전후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
"..잘 먹었습니다."
"아들.더 안 먹구 왜."
"입맛이 없어서요."
옆을 지키고 가지런히 서 있는 메이드에게 냅킨을 받아 입을 닦는 자신을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찬열은 굳이 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이런 식으로 가라앉은 모습을 보인지 벌써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들을 믿고 최대한 침묵하고 계시는 부모님께 어떻게 털어놓을 마음은 전혀 없었다.냅킨을 접어 다시 메이드에게 건넨 뒤 일어서려는 듯 의자를 뒤로 빼는 찬열을 가만히 바라보던 찬열의 아버지가 대뜸 옆에 있던 와인병을 내밀었다.
"자기 전 와인이 좋다더구나."
"...................."
"한 잔 받아라."
"..네."
조금 생뚱맞다 싶을 정도로 갑작스레 와인을 권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어머니는 물론 가라앉아 있던 찬열마저 놀라게 했다.갑자기 왜 이러시나 의문스럽기도 했지만 아버지께서 친히 술을 권하시는데 아들이 되어서 싫다고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머뭇거리다 집사가 다가와 건네주는 글라스를 받아 공손히 내밀자 아버지께서 레드와인을 조금 따라주시더니 대뜸 물으셨다.
"그래.여름방학 때는 기숙사에서 생활할 거라고?"
"네.신청서도 냈어요."
"뭐..열아홉이나 됐으면 한번쯤 그런식으로라도 바깥생활을 해 봐야지.어차피 학교가 학교이니만큼 기숙사도 딱히 불편할 것 없이 훌륭하겠다만."
"....네."
"집에 있으면 계속 생각날 만큼 큰 고민인거냐?"
"예?"
잔을 받고 계속 들고 있는것도 눈치가 보여 고개를 돌리고 한모금을 들이키는데 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이 들려와 찬열은 사레가 들릴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다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아버지는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던 양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나가고 계셨다.하지만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한가득이다.찬열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 지 몰라 가만히 숨을 삼키며 두 손을 식탁 밑으로 내렸다.아래로 향하느라 숙여진 머리 위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열아.늑대는 사냥감을 포기하지 않는다.끝까지 추격한단다."
"..................."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네 마음까지 받쳐서 끝까지 물고 늘어져라."
"...........아버지."
"가서 쉬어라."
찬열은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어머니는 이미 조용히 미소를 띄운 채 메이드에게 냉장고에서 과일주스를 가져다 달라며 부탁하고 계셨다.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살짝 벌어진 입술만 달싹이던 찬열은 이내 깨달았다.아버지께서는 지금 부모로서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해주셨다.그리고,그것은 확실히 찬열에게 필요한 조언이었다.찬열은 네모난 전을 집어드시는 아버지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여유로운 미소는 두 사람이 부자지간임을 입증해주는 증거였다.
"감사합니다.아버지."
"그래."
짧은 인사가 끝나고 어머니께도 살짝 눈인사를 주고받은 찬열은 가벼운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와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갔다.그러다 중간에 멈추곤 휴대폰을 꺼내들어 메신저를 켰다.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망설였다.더 멀리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한다.찬열은 종대에게 톡을 보냈다.
[나 백현이 번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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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열 "그래 울프!내가 울프!AWOoooooooooo-"
- 중간고사 기간에는 연재텀이 뜸해지겠죠...흙 하지만 아직은 아니얗
- 혹시 암호닉의 용도를 제게 알려주실 힐링천사 계신가요?
- 댓글 달아주시고 이 글에 재미를 느껴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 종인이와 세훈이가 등장했다 얗호 다음편엔 누가 등장할까요
- 얜 중국 콩쥐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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