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우리는 졸업 후 몇 년 뒤에 만났던가. 아마 흰 구름 자락 퍼지던 벚꽃아래서 만났을테다. 우리는 봄에 만났다. 그는 봄을 닮은 남자였다.그저 봄이 좋았던 나는 그와 교제를 시작했다, 적당히 외로워했고 적당히 부풀어있었다. 벚꽃이 짓밟히던 그 거리에서 너는 내 손목을 비틀어쥐었다, 손목이 비틀림과 동시에 그는 널 사랑하게 될 거라 고백했고 나는 눈 어귀가 굵게 집히도록 웃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 조금 슬펐다. 고등학교 시절 너에게 고백했었던 나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너는 왜 지금에서야 애심을 고백하는 건가. 진정한 내가 아니라 변한 나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촌스럽던 그때와 달리 짙은 화장과 날카로운 굽을 뒤집어쓴 내 껍데기 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우려스웠다. 나를 알아보고 좋아한다 입 밖으로 내어준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조금을 더 보태 우울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서로에게 이끌렸고 서로를 좋아했다. 당신의 셔츠 깃과 스웨터에서 묻어나오던 애잔한 향기와 당신의 관능적인 미소를 사랑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웃기도 했고 쏟아지는 여름빛 아래 키스하며 오르가즘을 느끼기도 했다. 내 팔 안에 쏙 들어오던 당신의 목과 딱 내 두 팔 에 아늑히 들어차던 당신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행복해했다. 밤 늦도록 뒤죽박죽인 서로의 역사를 공유하며 기뻐했고 전화기 사이사이 묻어나오던 너의 진심을 오롯이 기억했다. 글자를 읽던 내가 차례차례 당신을 읽어가며 희열을 느꼈다. 우리는 사랑이란 단어 안에 결속된 것이지만 사실은 사랑이란 단어의 내부를 몰랐다. 그저 사랑이란 것이 묶어주던 우리를 좋아했었다. 눈을 감고 곰곰히 당신과 나를 곱씹다보면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것들이 많았기에 오히려 그걸 기피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처럼 사랑했다. 수다쟁이가 되었고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손을 잡고 포옹하고 웃고 장난치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드라이브를 하고….
봄에 만났던 우리는 다시 봄에 헤어졌다. 겨울이 긁고 지나간 자리는 네가 곪아버리게 만들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선물을 하나씩 안겨준 셈이 되었다. 그것이 슬플지라도, 행복할지라도. 우리는 다투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때가 된 듯 조용히 손을 놓았고 그날의 벚꽃처럼, 사랑이란 단어는 무참히 짓밟혔다. 다시 동창회에서 재회했을 때도 우리는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밀하고 다정스레 굴었다. 그는 다시 여자를 만났고 나도 다시 남자를 만났다. 남자와 나는 그와 나처럼 사랑했고 사랑한다. 다른 게 없다. 그와 나 둘다 조금 더 성숙해졌고 말미암아 어른이 되고 있었다. 굳이 옛 추억…아니 기억을 되짚으며 슬퍼할 나이는 지났을테다.
지금도 벚꽃이 붉게 짓밟히고 있다. 그리고 내 옆엔 행복한 당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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