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엔 도저히 힘이라곤 들어가있지 않았다.
살짝 비틀대는 몸을 보니 추운건지 안쓰러워보이기까지 했다. 비가 오는 날, 학연은 그 흔한 우산 하나 쓰지 않은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면서도 학연은 죄인처럼 고개만 숙인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보면 수근거려도 학연은 계속 하염없이 걸어나가기만 했다. 점점 거세지는 비에도 걸음의 속도는 일정했다. 비를 맞는게 좋은건지 왠지 더 느리게 걷는것 처럼 느껴졌다.
이리저리 튀기는 빗방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있었다. 그나마 학연이 숨 쉴수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집마저도 신께서는 허락해주시지 않았다. 월세가 밀려 결국 하루 아침에 밖으로 나 앉게된 학연은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얻게 된 반지하. 꽤나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학연은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집 안은 어두컴컴해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꽤나 그 분위기가 음산해 무엇이라도 나올것만 같았다. 천천히 감았다 뜨는 학연의 눈 밑으로 빗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을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키니, 처음 보는 왠 남자가 떡 하니 학연을 바라본채로 서있었다. 별다른 두려움 없이 자신의 젖은 몸을 한 팔로 끌어 안은채, 학연은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홍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데 없이 완벽했다. 온 몸이 진동처럼 추운지 떨고 있으니 홍빈은 어디에서 수건을 들고와 학연에게 건내주었다.
미소가 유난히도 이쁜 그의 모습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 앉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
“여기서, 혹시 사시는 분이세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고요한 집 안에서는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왠지 모를 편안함에 살짝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았다. 젖은 앞머리가 자꾸만 신경쓰여 만지작 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빈집털거같은 인상은 아닌데,"
꽤나 침착하게 행동하는 학연을 보니 홍빈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잘됐다.”
“…”
“오늘 엄청 힘들어서, 누가 곁에 있어주면 딱 좋을거 같았는데. 마침 그쪽이 여깄었네요.”
유난히도 오늘따라 감정이 억제가 안되었던 하루였었다. 우울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여태껏 억지 미소라도 지으며 살아갔던 학연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가와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대답한번 없이 웃던 그런 학연이었다. 비에 젖은 머릿카락에서 물줄기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꼭 그의 심정 같았다.
한 없이 추락해서 결국 온 곳이 벼랑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왜 말을 안해요?”
“…”
“나랑 말하기 싫어요? 아니면 말 할줄 몰라요?”
홍빈에게 자꾸 친근하게 말을 거는 행동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다가오기까지 기다리기보다는 한발 더 다가가 먼저 손을 내밀고는 말을 거는, 그게 학연이 습관된 행동 중 하나이기도 했다. 버림받지 않으려 더 악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걸 알리 없었다. 아픈 학연의 과거따위, 그들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학연은 오로지 그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겨왔어야 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만난건도 인연인데, 악수나 할까요?”
“…”
“내가 귀찮고, 싫은가보네”
아무런 행동도 말도 안해주는 홍빈에 토라져 학연은 괜히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거에요? 와, 끝까지 말 안하다이거죠? 알았어요, 알았어. 마음대로 해요. 신경 안 쓸테니까.
대충 집의 구조를 확인하려 졻은 공간 속으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학연은 꼼꼼히도 둘러보고 있었다. 학연이 그러는 동안 홍빈은 단 한번의 움직임 없이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자신이 이동할때마다 따라오는 시선에 짜증이 난 학연은 홍빈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눈을 응시했다.
“말을 해요, 말. 사람 답답하게,”
“…”
“그렇게 바보같이 보고만 있지말고, 말을 하라니까요? 말, 몰라요?"
"…"
"아, 진짜. 길 막지말고 좀 비켜봐요.“
살짝 홍빈의 어깨를 스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이 모든 상황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과 홍빈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게 도대체 어찌된건지 홍빈에게 설명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학연의 놀란 표정에 괜히 홍빈은 슬픈 미소를 띄우며 이제껏 한번도 열지 않았던 입을 달싹였다.
“많이, 놀랬어요?”
“…저, 그게. 지금. 이게, 무슨.”
“…”
“왜, 이게. 어떻게, 이럴수가.”
“사람이 아니니까. 이런거잖아요.”
네? 방금 뭐라고 하셨는… 에? 방금 자신의 두 귀로 똑똑히 들렸던 사람이 아니니까, 그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럼, 뭐에요?”
“…”
“선명하게 보이는데, 사람이 아니면, 뭐에요. 장난치지 마요. 에이,”
“…”
“사람이 아니면, 뭐… 귀신이기라도 한다는 거에요?”
아까와 같이, 입을 다문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그 미소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고 학연은 다시한번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까지 딱 뭐라고 설명하지 않은 홍빈에 학연은 혼자서 별의 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 외계인? 일리도 없을테고, 뱀파이어? 도대체 뭐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것이 무의식적으로 학연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학연의 말에 그만 웃음이 터져 버린 홍빈은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외계인? 뱀파이어? 생각을 해도. 참,”
“…뭐에요, 내 속마음도 읽을 수 있는거에요?”
자신의 속마음을 읽힌게 창피한지 학연의 볼은 어느새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홍빈에게는 그저 귀여워보여 또 한번 소리내 웃었다.
“뭔지, 궁금한데. 말 해주면 안되는거에요?”
“궁금해요?”
“…네”
“음,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될려나? 그래. 흔히 말해 귀신이죠. 귀신.”
귀신? 죽은 사람?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항상 상상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머리가 길지도, 그렇다고 하얀 소복도, 아닌. 평범한 사람 모습 그 자체였다. 다만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흰 셔츠의 손목부근에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그 부분이, 이상하게도 눈에 띄었다. 색깔이 저래서, 더 강렬한 인상을 학연에게 줬는지도 모른다.
“그럼…그,”
“왜 내가 여기있는지, 궁금한거죠?”
“…그게”
“자살했어요, 손목 긋고-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1년 전에.”
“…”
“다 지난일이니까 그렇게 보지 마요.”
그 동안 남들에게 못했던, 마음속으로만 항상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들을 홍빈은 용기내 찬찬히 학연에게 모든 걸 다 말하고 있었다. 되새기며 아픈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게, 힘들었지만 계속 마음속에 두고 있는것보다 훨씬 나을 거 같았다. 그래도 누구한테 털어놓으면 조금이라도 편해지니까…
1년 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자신이 죽음을 선택했는지. 한 개도 빠짐없이 전부다 홍빈은 학연에게 전하고 있었다.
참 무섭더라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냥 저는 남들과는 좀 다를뿐이었는데, 그렇게 제가 이상했던거였나봐요. 남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그, 하나가. 참…
홍빈의 이어지는 말에 학연은 알수 없는 듯한 눈동자로 홍빈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학연의 눈이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전혀 알수 없었다. 이런 말을 털어놓고 나니, 왠지 더 이상은 학연의 눈동자를 쳐다보면 안될것만 같았다. 항상 바라보았던 남들과의 시선과 지금 자신 앞에 있는 학연의 시선과 똑같기만 할거 같아서, 홍빈은 겁이 덜컥 났다.
“근데, 아까부터 신경쓰였는데 옷 좀 갈아입으면 안되요? 많이 추워보이는데,”
시간이 꽤 흐른만큼, 학연의 젖은 머릿결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 말라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에 젖은 옷 때문에 그런지,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수차례 재채기를 해오는 학연이 퍽이나 신경쓰였는지, 결국 참다 못한 홍빈은 옷을 갈아입으라는말을 꺼낸것이었다.
“…아,”
“따뜻한 물 나오니까, 그 물로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면 될거에요.”
“네…”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그의 미소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 대화. 지금 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학연은 기분이 꽤나 좋아보였다. 우울했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간건지, 사라진지 오래였다.
샤워소리, 은은하게 풍기는 그의 향기. 온 몸이 나른해질정도로 익숙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멍하니 빗소리와 샤워소리를 번갈아 듣다보니, 언제 학연이 나온지도 알아 차리지 못한 홍빈은 자신의 앞에서 소리 내 박수를 한번 치는 학연을 보고서야, 멍해져있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멍때리고 있어요.”
“…”
“비가 오니까, 이런 저런 생각 다 나나 보네요.”
“씻고 나오니까, 몸 좀 괜찮죠? 샤워하고 바로 한숨 자면 딱 인데,”
“잠 안오는데…”
“제가, 재워줄게요.”
오늘 처음 본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편한하기만 한 홍빈이다. 별 거리감 없이 짧은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져버렸다.
홍빈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누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막상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니 안 오던 잠도 갑자기 쏟아져 오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누워있다가 잘거같은데…. 그렇다고 다시 일어나기에는 너무 몸이 나른해져 있었다.
우연히 찾아낸 낡은 태입 속에 노랠 들었어
서투른 피아노 풋풋한 목소리
수많은 추억에 웃음짓던
언젠가 너에게 생일 선물로 만들어준 노래
촌스런 반주에 가사도 없지만
넌 아이처럼 기뻐했었지
진심이 담겨서 나의 맘이 다 전해진다며
가끔 흥얼거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오래된 태입 속에 그때의 내가 참 부러워서 그리워서
울다가 웃다가 그저 하염없이
이 노랠 듣고만 있게 돼
바보처럼
듣고있어도, 또 듣고 싶은 목소리었다. 그리 많은 노래를 좋아하고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홍빈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그저 좋았다. 담긴 뜻이 있는것만 같아 한층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서툴지만, 중저음이 매력적이었다. 나중에도 또 들려주라고 해야지,
*
학연이 대학생이 되었는지 4년째가 되었을때 한창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ㅇㅇ과 학생중 한명이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했다는, 그 사건. 처음에는 소문으로만 접해서 별 관심없이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냈지만, 갈수록 퍼져 학교에 모를 사람이 없을만큼 사태가 심각해져서야 학연은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밥을 먹다 말고, 학연의 친구들이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그 과에서는 꽤나 유명했다던데?”
“뭐가?”
“아, 나도 그 말 들었던거 같은데?”
“남자 좋아하는거?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었냐?”
“그, 이름이 뭐더라.”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듯이 학연은 아무런 반응을 내보이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 누군지 궁금하기는 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소문이, 있긴 있었나?에 대해 자신 혼자 머릿속으로 막 생각하고 있을때쯤, 한 친구가 그의 이름이 생각이 난건지, 끊겼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이름 생각났어. 이홍빈”
“딱 이름들으니까 알겠네.”
“맞아. 맞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에, 자살을 택한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우울해지고 그러는데. 사람들의 입에 수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보면 더 마음이 아플 수 밖에 없었다.
그거밖에 답이 없었을까….
*
곤히 자는 학연의 모습을 보며 학연은 듣지 못할 홍빈의 아픈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려 퍼졌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 그게 형이에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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