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과 밀어내는 것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도 벌써 한 달째,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나는 결국 별 소득 없이 제자리에 서 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사랑 가득한 너를 밀어낼 자신 또한 없었으니까. 오늘도 그렇게 너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오후였다. 이놈의 버스정류장은 또 왜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건지. 코앞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을 발견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에게로 시선을 옮기다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시우야.”
“어?”
“나 오늘만 집까지 데려다주라.”
너를 조금 더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양극으로 슬쩍 기울었다.
“집까지?”
“아 그냥~ 혼자 가기 심심하단 말이야.”
지금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나오는 골목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너의 집.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려면 한 20분쯤 걸릴 텐데. 솔직히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집에 데려다 달라는 너의 말에 그동안 차마 오르지 못했던 그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겨 기쁘다는 뭐 그런...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 집이 어딘데? 이 근처야?”
“이쪽 길로 쭉 가다가 계단 좀 올라가면 돼. 아, 여기 내 단골 슈퍼인데 너도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래? 덥잖아.”
“너나 많이 드세요.”
“치. 그래라! 나는 이거 먹어야지.”
수십, 수백 번도 더 다녀갔을 너희 동네 골목계단을 처음인 척 걸어 올라가려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너를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서 착잡해진 마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힘을 실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술에 아이스크림을 묻히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손목을 돌려가며 애쓰는 너를 힐끔 쳐다보았다. 참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여자구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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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어?”
온 신경을 아이스크림에 고정한 채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열중한 네 모습이 귀여워 괜히 말을 걸어보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 얼마나 집중한 건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던 네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그 해맑은 미소와 함께.
“흐흫... 응.”
민망한지 살풋 웃으며 대답하는 네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미소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너에 대한 기억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야, 시우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들려오는 내 이름에, 아니,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내 가짜 이름에 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걸음을 멈추더니 나보다 한 칸 높은 계단 위로 올라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러고 보니 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네.
“응?”
그리고 내 귀에 깊숙이 박힌 예상치 못한 한 마디.
“우리 사귈래?”
― 좋아해. 나랑 사귀자.
익숙한 계절, 익숙한 장소, 그리고 익숙한 사랑 고백. 나에겐 전부 익숙한 이 상황이 너에겐 전부 새로운 기억이 될 거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잠자코 네 눈만 바라보고 있으니 네가 미소를 살짝 머금고는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나도 너 좋아. 그래, 우리 사귀자.
익숙한 계절, 익숙한 장소, 익숙한 사랑 고백, 그리고 같은 듯 다른 반응. 그날따라 유난히 밝던 보름달을 조명 삼아 환하게 빛나던 너에게 건넨 내 고백에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네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날과 똑같이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서는 날 바라다보는 네 모습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너를 꼭 끌어안았다. 네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이 내 옷에 묻는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는 평생 알지 못할 내 눈물의 의미를 들키고 싶지 않아 네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아... 너 울어?”
“그냥... 너무 좋아서.”
“좋아서 눈물까지 흘리는 애가 여태 고백 한 번 안 하고 뭐 했대.”
장난스레 투덜거리며 내 허리를 감싸는 너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소중한 네 기억을 앗아가 버린 못난 전 남자친구 밖에는 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 너에 대한 마음을 함부로 꺼내 보일 수 있었겠냐는 말이 자꾸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 말을 입 밖에 내는 대신 팔에 힘을 주어 너를 더 꽉 껴안았다.
“이제 좀 떨어지시지? 네 얼굴 보고 싶은데.”
너의 살에선 은은한 로션 향기가 났다. 단 하루도 잊은 적 없는 너의 그 향기가.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그러든가.”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첫 번째 연애. 그리고 다시 시작된 우리의 두 번째 연애. 너에게는 모든 게 처음이겠지만 나에게는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니까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을게. 네가 나를 영영 잃어버린대도 영원히 네 옆을 지킬게. 다시는 네가 나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내가 잘할게. 잘 부탁한다, 여주야.
***
시우. 시우야. 김시우. 어떻게 불러봐도 이름 참 예쁘단 말이지. 이유를 대자면 끝도 없지만 그렇게 예쁜 이름을 하고 누구보다 예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우가 너무 예뻐서 말해버렸다. 좋아한다고. 아니, 사귀자고 했었나?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어도 속으로는 엄청 떨렸으니까. 전부터 느낀 거지만 시우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길가에서 시우를 처음 본 그 날 이후로 알고 지낸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도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익숙하단 말이지. 꿈에서 자주 봐서 그런가? 아 참, 오늘 꿈에도 시우가 나왔다. 어떤 내용인지 말하기 부끄러운데 꿈은 그냥 꿈이니까 뭐. 꿈에서 시우에게 고백을 받았다. 말하고 나니 되게 민망하네. 평소에 시우에게 고백받는 상상을 좀 자주 하긴 했는데 그래서 그랬나? 배경은 어제 내가 고백했을 때와 엄청 비슷했다. 나와 시우의 옷이 반팔이었던 걸로 봐서는 계절도 여름이었던 것 같고, 장소도 똑같이 우리 집 앞이었으니까. 어쨌든 고백받는 꿈을 꿀 정도면 시우에게 고백을 받고 싶긴 했나 보다. 솔직히 서로 좋아하는 거 다 알고 있었는데 먼저 좋아한다고 좀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계속 기다렸는데.
+ 오랜만에 여주와 재환이의 두 번째 고백 장면을 보니 기분 괜히 이상하네요,,
이제 하루만 더 재업하면 13화를 만날 수 있어요! 우리 모두 파이팅^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