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그리고 안녕
#01. 첫번째 안녕
오늘 아침 책상을 정리하다 너와 함께 준비하던 공모전이 생각나 자료를 찾으러 온 방을 들쑤셨다. 넣어둘 만한 곳은 다 뒤졌는데 보이질 않는다. 일전에 종이를 정리할 때 쓸려나갔나 보다.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너의 필체만이라도 추억하려 했는데, 그마저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찡하고 답답하다. 이제 내 책상 위에는 너와 함께한 추억 몇 장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너를 처음 보았던 건 소슬바람이 불던 가을 말 이었다. 과제 제출 기간은 임박했었고, 나는 여태까지 사진 한 장도 찍어놓지 않은 채였다. 내가 원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시기는 가을이 다 지나가 겨울과 마주할 때였다.
'가을'이라는 주제로 단지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나 억새 따위를 찍고 싶지는 않았다. 교양과목일 뿐이었지만 그 의미는 다른 과목보다 조금 남달랐고 영혼 없이 찍은 풍경을 내 과제로 제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찍고 싶었던 건 연꽃이었다. 여름철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연밭이 앙상한 꽃대만 남은 모습이 일몰 무렵 물에 비친 반영을 찍고 싶었다. 가을 말 연꽃대의 앙상함은 아름다움을 나타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이 앙상함이 빛과 조화를 이루면 세상에 둘도 없는 멋진 피사체가 된다.
나는 그날 너라는 연꽃을 보았다.
시간은 슬슬 4시를 넘기고 있었고, 일몰을 기다림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아침에 늦잠을 잔 것이 화근이었다. 기차 시간을 놓칠세라 아침도 안 먹고 부랴부랴 달려 나오느라 얇은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있었고,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날씨는 얇은 가디건 하나로 버티기에는 절대 따뜻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기차 도착시각마저 늦어져 좋은 위치를 잡기 위해 헐레벌떡 연밭으로 뛰어갔다. 결국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로 쫄쫄 굶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추워졌다. 행여나 맞춰둔 앵글이 엇나갈까 봐 몇 시간 째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과제 제출일은 임박했고 나는 더 이상 사진을 찍으러 청도에 올 시간이 없었다. 오늘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면 작품 전시회 때 내 작품란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게 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 컨디션은 점점 더 저조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내 작품은 잘 나올 일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이기에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내 어깨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그것이 두툼한 회색 후드집업이란걸 알아차린 순간 뒤를 돌자, 날 보고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옷과 낯선 이의 인사는 나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고 나는 벙어리가 된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초의 침묵이 흐른 후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컨디션 별로인 거 같은데 다음에 오는 게 어때요?”
웃고 있는 눈과 상반되게 그의 말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그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나에게 간섭하는 그가 무례했지만 내 어깨에 걸쳐있는 옷은 화를 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 쪽에게는 단순한 사진 한 장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사진 한 장이에요. 그렇게 계속 불평하고 있을 거면 찍어도 안 찍는 것만 못할 거야.”
그가 내뱉은 말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춥고 배고프다고 계속 불평하던 혼잣말을 그도 들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도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나의 투정을 계속 듣고 있던 그의 기분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할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가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서 조급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의 사과를 들은 그의 표정은 갑자기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미안하다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내 카메라를 응시했고 뭘 말하려는 듯 뜸을 들였다.
“조리개 값 조금 높이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을 듣고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그도 말을 어지간히 예쁘게 못 하는 듯했다. 고맙다고 짧게 말을 한 후 우리는 다시 각자의 일에 집중했다. 일몰이 끝날 무렵 나는 만족스러운 작품을 얻었다. 때로는 눈에 담는 게 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그 광경은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도 사진을 다 찍은 듯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다 져가는 햇빛을 받는 그의 머리카락이 너무 아름다워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몰래 찍었다. 사실 그에게 이름이나 번호를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때 우리 둘 다 알았을지도 모른다.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끝까지 가지 못할 인연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에게 받은 후드집업을 아직도 걸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집에 거의 다 온 시점이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그도 그리 두꺼운 옷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었다. 그의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그도 꽤나 추웠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나는 그의 번호는커녕 이름조차 몰랐다. 이 후드집업을 전해줄 방도는 전혀 없었다.
혹시 냄새가 나면 빨아야 할 것 같아서 코를 가까이 대보았다. 은은하면서 상쾌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마치 그를 닮은 향기였다.
고민하다가 그의 체취를 없애고 싶지 않아 옷을 곱게 접어 옷장 안에 넣어두었다. 미쳤나 보다. 살짝 변태 같은 행동에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것이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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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처음 쓰는 글이에요. 타사이트 동시연재. 자유연재. 작가의 말 접어보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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