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6대 왕 민조 이항(李 沆)에게는 아들복이 없어 딸만 여럿에, 아들이 없었다. 적자가 없어 고민하던 와중, 후궁인 귀인(貴人)에게서 한 명의 아들을 보았다. 그 이름 광(曠)이라, 왕의 나이 불혹 가까이 본 아들에 크게 기뻐하며 밝을 광이라 명칭했다. 왕세자는 매사에 인효를 공경하며 총명해 착실히 부왕을 받드니, 왕이 크게 기뻐했고 부자간의 정情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그러나 왕세자의 외척은 문조의 정실 부인인 의경왕후 김씨를 필두로 한 북파(北派)에 비해 가문의 문중과 세력이 비교적 미약했다. 왕세자를 낳은 귀인 권씨의 집안은 북파에 반대되는 남파(南派)로 그리 세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대대로 자질은 있었으나 북파의 득세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 가문의 일원들이었던 그들은 왕세자의 영향으로 귀인의 오라비 권근이 간신히 한성부 판관직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형조판서 김수찬을 시작해서 조정을 온통 장악하다시피 한 북파를 이기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에 바위치기였다.
게다가 민조의 정실인 의경왕후는 딸만 셋, 아들을 낳지 못해 시시때때 왕세자를 견제했다. 민조가 그리 녹록한 왕은 아니었음에도 중전의 기세를 뒤엎지 못한 것은, 그의 정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민조 이항은 일방적으로 한 세력을 휘어잡기보다는 두 세력의 대립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전이 세자를 견제하다 급기야 십수년 만에 회임을 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중전으로 추정되는 배후가 세자의 탕약에 독을 타는 일이 벌어지자, 왕은 다급해진다. 이대로라면 세자의 안위를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왕은 하나뿐인 세자를 지키기 위해 아들을 은밀한 곳으로 보내도록 한다.
‘동궁은 짐의 유일한 자子로 과인의 보위를 이을 귀한 몸이다. 아직 이번 사건의 배후를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하였으나, 이대로 북파 무리에게 과인의 유일한 후계를 잃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왕이 세자에게 밀명을 내리니, 세자가 이를 받들어 은밀히 성균관에 신분을 조작하여 드나든다. 그리하여 지금 들려줄 이야기의 주인공. 대조선국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익살맞은, 전설로 남은 조선 최고 4인방의 이야기.
광종대 가장 두드러진 네 사람.
광종 이광(李 曠), 병조판서 김신(金 新), 예조참의 민보우(閔寶玗),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승지 위경언(魏警彦)까지.
전설로 통하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백성들은 책으로 엮었고 암암리에 그것이 유통되며 그 이름이 조선실록 사인방(朝鮮實錄 四人帮)이라 붙었으니,
그 이름하여, 상하권 중 상권을 들어 조선반촌실록(朝鮮泮村實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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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 나오지 않아도 되오.”
“소첩 어찌 그러겠어요. 서방님 가시는 길 따르지 못하는 것 만으로도 면구한데…”
위경언은 제 옷매무새를 고쳐주려 대문까지 쫓아나온 아내 신씨의 배웅에 애써 손사레를 저었다. 아직 몸도 채 추스리지 못한 환자가 어찌 자신을 배웅한다는 말인가. 연신 거절해도 굳이 몸을 일으킨 파리한 안색의 처가 가까스로 발걸음을 떼다가 휘청하자 경언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아무래도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아 육신에 힘이 없는 듯 했다. 본래는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몇년간의 투병 끝에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된 것이 이 정도였다. 다만 탕약의 탓도 있고 몸이 버티질 못해 아이를 품어도 자꾸만 유산하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나오지 말라 하지 않았소. 아직 몸도 채 추스리지 못했거늘.”
“제가 아무리 몸이 미령해도 서방님을 배웅해야 부인이지요.”
본래는 혼자 눈물지을 아내가 염려되어 새벽에 혼자 떠나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현숙한 아내는 혹여나 춥지 않을까 자신의 옷매무새를 여며주는 것이다. 경언이 머쓱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자 아내가 그 박속같은 얼굴로 살풋이 웃었다. 이 여린 사람이 혼자 아이를 기를 수 있을까 걱정이다.
한참 제 매무새를 손으로 여미던 신씨가 불현듯 슬프게 말했다.
“소첩이 서방님께 짐인 모양입니다.”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연달아 서방님께 방해만 되지 않았어요.”
그러며 슬픈 눈빛을 하는 아내를 안쓰러이 바라보던 경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아내를 보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되물었다.
“그대가 어찌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는가?”
“짐이에요. 짐이지요. 아무렴요. 서방님.”
“부인.”
“여태껏 서방님께서는 충분히 소첩에게 희생하셨어요. 이대로 제가 귀한 인물이 되실 분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한답니다.”
“이러지 마시오. 제발, 부탁이오.”
나에게는 그렇지 않아. 그러니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요. 나를 슬프게 하지 마. 남편의 경고에도 아내는 묵묵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연정의 이름을 한 쓰라린 아픔이 신씨의 괴로운 가슴께를 치고 지나갔다.
“모두에게 숨기지만 저는 알고 있답니다. 연상에 초혼(初婚)도 아니고 재혼(再婚)이지요. 게다가 여태껏 줄곧 병마에 시달려 왔어요. 하다못해 부군의 글공부마저 막았으니, 이제 제게는 자격이 없어요...”
“그만, 제발, 제발 그만 해요. 제발 그만...”
“지금이라도 저를 내쫓으세요. 그리고 서방님을 보필할, 건강하고 현명한 새 여인을.”
“부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과에 합격하고 글공부를 위해 성균관에 입학하려는 차에 아이를 낳고 후유증으로 급작스레 쓰러진 아내다. 그동안 줄곧 고생만 하다가 이제 막 인생이 펴기 시작할 즈음 쓰러진 것이다. 영 병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앓는 것이 걱정스럽고, 성균관에 들어간다 해도 일가친척을 비롯한 병구완할 사람이 없어 아내와 어린 아들을 지킬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대과 시험을 일찌감치 접고, 종 9품의 작은 벼슬이라도 하면서 몇년 씩이나 병석을 돌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내 약값을 구하려면 쥐꼬리만한 녹봉으로는 모자라서, 양반이라면 하지도 못할 거상단에 들어가 잠시나마 일을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해 꾼 돈도 제법 있으니 어쩌면 글공부가 늦어진 것도 제 출셋길에 방해가 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여보.”
그러나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니다. 격분한 위경언이 결국 처에게 소리를 지르며 목청을 높였다. 움찔하는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아롱지며 맺힌다. 그것을 눈치챈 그가 아내의 마른 어깨를 붙잡아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병을 앓고 있지만 참으로 아름답다. 박속같이 하얀 얼굴의 안색은 여전히 푸르스름했지만 그래도 약간이나마 불그레한 기가 도는 뺨에서 병세가 나아졌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효서야.”
경언이 갈라진 목소리로 처의 이름을 부르자 결국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터지고 만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아내를 경언은 품 안에 끌어안으며 대답을 보챘다. 말해 보아라. 이름을 불렀지 않으냐. 어서 대답해 보아.
부인, 부인. 목소리를 내자 마침내 예, 하는 단정하고 어여쁜 목소리가 답한다. 부탁이니 내게 제발 이러지 마시오. 말하는 목소리에서 일말의 물기가 잡혔다.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어찌 벼슬길에 나아가겠다 결심한 줄 아시오?”
“서방님...”
“전부 그대 때문이오. 내 아내가 되기 전에도 고생만 했는데, 나와 혼인하고 나서도 그리 둘 수 없었어. 부인을 내가 어떻게든 호강시키겠다 다짐했기에 내가 그래도 이만큼이나 살아갈 수 있었소.”
무작정 혼인하여 함께 살 적부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돈이 없어 좋은 옷도 한번 입혀 주지를 못하고 연약한 몸으로 묵묵히 안살림을 지키다가 병이 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몇 년이나 접어야 했던 세월동안 어린 남편은 사리분별과 세상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벼슬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입신양명하여 그대와 우리 아이를 먹여살리겠다 약속하질 않았소. 비록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노력하리다.”
“흑, 서방님. 소첩이 이리 못나 서방님의 길에 방해만 되는데 어찌...”
“방해가 무슨 말이오.”
그제서야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경언이 웃으며 신씨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기나 해요. 본래 사내 대장부는 약속을 지켜야 옳은 것인데 어찌하여 내 부인인 그대가 나를 가로막으려 합니까. 내 그대를 위해서도 꼭 대과에 합격할 테니 꼭 기다리겠다고 나와 약속해요.
“기다리겠어요. 소첩 꼭 서방님을 기다려 맞이하겠어요.”
“그렇다면 되었소.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미소를 지은 경언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한양에 가서도 돈이 모인다면 틈틈히 그대에게 보내리다. 혹여나 내가 없다고 밥 거르고 약 거르고 그러면 아니 되오.”
“그럼요. 저번에도 그랬다가 크게 역정을 내셨잖아요.”
그 말에 경언은 일부러 더 크게 화를 냈던 그때를 떠올렸다. 약값으로 자신이 부담스러워할까 겁을 냈던 아내가 일부러 먹었다며 거짓말을 하고 약을 먹지 않으면서 약이 많이 남았다며 자신에게 거짓으로 말을 했던 일이었는데, 그때 한편으로는 아내의 마음이 애달프면서도 너무나도 속이 상해 그렇게 역정을 내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자 속으로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어쩐지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진 경언이 곧 다시 고개를 젓고 아내를 다시 한번 꼭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이렇게 고운 당신을 보지 못한다니. 이제 앞으로 연통을 서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면 꽤나 오랫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절대 성공하여 돌아오리라.
“그럼 내 다녀오리다. 부인, 서언이와 같이 집안을 잘 부탁하오.”
“아무쪼록 무사히 다녀오셔요. 서방님. 대과에 합격하셔서 꼭 집안을 빛내 주세요.”
그렇게 방년 27세의 위경언, 오직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금의환향(錦衣還鄕)을 꿈꾸며 한양으로 떠났다. 오로지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의 무덤을 파는 길이 될 줄, 그는 아직까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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