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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조 이 항(李 沆)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인 왕세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염려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임금의 보령이 불혹 가까이 되었을 때에 왕세자가 태어났으니, 이제 왕세자의 춘추가 지학을 갓 넘긴 열여덟이었다.

 

“ 광아.”
“ 하문하십시오. 아바마마. ”

 

내 아들아. 왕이 이제 한층 자란 제 아들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정실이 아닌 후궁의 태에서 본 서자라 하지만 왕은 하나뿐인 아들인 세자를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게다가 다소 드셌고 조정에 외척이 득세하여 왕의 심경에 부담감을 주는 의경왕후와 달리 세자의 모궁인 보경당 권씨(귀인 권씨)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현숙한 면모를 보여 왕이 더욱 그녀를 아끼고 총애했다. 그녀의 소생인 왕자가 태어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름을 손수 광(曠)이라 짓고 다섯 살이 되는 해 곧바로 동궁으로 책봉하였다.

 

‘ 이리도 강건하게 자랐거늘, 어찌하여 집안이 이 아이의 발목을 잡는단 말인가! ’

 

하지만 배경이 너무나도 불안했다. 시강원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을 듣고 있는 왕세자의 입지가 이 지경이 된 탓은 외척의 힘이 없는 것은 물론 조정은 물론 궁내의 입지가 매우 불안불안해서이기도 했다.

 

 

현 조정은 의경왕후의 오라비인 형조판서 김수찬을 비롯한 북파(北派) 일당. 그야말로 경주 김씨 일파의 세상이나 다름없음이라, 그들이 조선을 장악하고 있는 한편 왕세자의 외척인  배경도 실권도 없어 열여덟이 된 지금까지 가례조차 올리지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왕이 조정에서 세자의 가례를 입에 올리면 형조판서가 반대를 하고, 북파 일당이 줄줄이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형식상이나마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왕으로서는 북파에 대립하는 남파(南派)가 팽팽히 대립을 해야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줄 텐데, 치맛바람이 센 중전의 영향 탓에 남파의 기세가 밀려도 한참을 밀리는 것이다. 하다못해 최근 중전이 회임을 하였으니 결국 다소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줄 기회라고 판단한 왕은 결국 보경당의 동복 아우인 권근을 인재로 발탁해 단번에 한성부 판관직을 맡겼다.

 

“ 동궁은 활을 쏘아 보아라. ”

 

그러나 맙소사, 동궁의 독살 시도라니. 이리도 끔찍한 일이 생길 수가!
왕이 다시 한숨을 쉬다가, 생각을 지우기로 결심하고 왕세자에게 하명을 내렸다. 왕의 하명에 왕세자가 나직이 답하며 내관이 건네주는 활을 받아 나무깍지를 꼈다. 열여덟이란 나이와는 달리 행실도 언사도 마치 다 자란 사내대장부와 같으니, 당장이라도 보위를 금방 물려주고 싶을 정도로 왕은 새삼 흡족해졌다. 곧이어 동궁이 활시위를 당겼다.


명중이오!
저 멀리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대강 보아도 과녁 정중앙에 꽂힌 화살이 눈에 띄었다. 정말로 어디 한 곳 부족한 곳이 없는 완벽한 아들이다.

 

“ 동궁의 활쏘기 실력이 이제 이 과인보다 낫구나. ”
“ 소자의 재주가 아직 미천해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

 

왕세자 광이 왕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비록 입지가 불안하다 하나 장차 보위를 이어받을 몸, 그는 단 한번도 부왕의 말을 거역한 적도 뜻을 어긴 적도 없었다. 밝을 광(曠). 이름자 그대로 자라났고 성장했다. 그리고 왕은 그런 세자가 자랑스러웠지만 내심 크게 불안했다.

 

“ 너의 그 활솜씨는 대대로 조상대부터 내려온 것이다. ”
“ 알고 있습니다. 태조대왕(太祖大王) 전하를 이르시는 게지요? ”
“ 역시 동궁은 영특하여 뜻을 잘 아는구나. 백보 밖에서도 배나무의 배를 쏘아 떨어트려 맞히셨다는 일화가 있지. ”

 

궁내에서 좀처럼 입지를 잡지 못해 못내 마음이 불편한 왕세자로서는 이렇게 부왕과 함께하는 시간이 유일한 즐거움이요 낙이었다. 광이 천진하게 부왕의 영웅담을 듣고 있자 왕이 아들을 향해 웃더니 이내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왕이 곁에 자리한 도승지 신면에게 눈짓을 하자 도승지가 그를 알고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두를 자리에서 멀찍이 멀어지게 했다.

 

“ 비록 중전이 회임을 했다 하나 내 보위를 이을 자는 너 뿐이다. ”
“ 황읍한 말씀이시옵니다. 아바마마! ”

 

갑작스레 제 손을 잡고 말하는 왕에 왕세자의 얼굴이 황망해졌다. 당황한 안색의 아들을 바라본 민조가 신면에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 도승지는 듣고 그대로 받아 적으라! 동궁을 이대로 잃을 수 없다. 잠시나마 궁에서 내보내 거처를 옮기도록 해야 한다. ”
“ 아바마마! ”
“ 단순히 동궁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다. 궁에서 온전히 제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면 군주는 물론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동궁이 지금까지는 마냥 순진하고 무구해 과인이 지켜주었지만, 이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

 

세자가 경악해 큰 소리를 질렀지만 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왕의 의지는 확고했고 이제는 정말 그의 진정한 의중을 들을 일만 남았다. 민조는 아직 어리기만 한 아들 광의 손을 꼭 잡아냈다. 자신의 나이도 이제 환갑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 광아. 내 아들아. 잘 듣거라. 아비의 전언이다. ”
“ 아바마마... ”
“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하는 말이다. 과인은 아마 오래 살지 못할 것이야.”
“ 소자 아직 한없이 미천하고 부족한 몸입니다. 헌데 어찌 저를... ”
“ 북파 무리들이 너를 해치려 한다. 과인도 이제 너무나 힘이 드는구나.”

 

어떻게든 자신이 아들을 지킨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왕세자를 해치려 들 것이다. 왕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너를 청으로 유학 보내겠다 조정에 선포할 것이다. ”
“ 청에 말이옵니까...? ”

 

광은 부왕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청은 오랑캐의 나라로 부왕은 물론 조선이 가장 기피하고 언급을 꺼리는 국가였다. 선왕인 인조대에 굴욕을 당한 것은 물론, 천한 오랑캐의 나라라며 모두가 기피하지 않는가. 광이 생각한 부왕의 정치적 노선은 물론 그런데 청에 자신을 유학보낸단 말인가?

 

“ 그러나 진정 너를 보낼 곳은 그 곳이 아니다. ”
“ 허면 소자를 어찌 하시려고... ”
“ 성균관에 가거라. 너를 은밀히 빼돌릴 것이다. ”

 

지금 왕세자에게 급선무는 자신의 사람을 적어도 둘 이상 만들어두는 것이었다. 이미 북파 일당이 장악하고 있는 조정은 왕세자가 믿을만한 사람이 없고, 가례를 올려 처가를 만들어 주기에도 동궁의 입지상 충분히 버거웠다. 결국 머리를 굴린 끝에 왕이 생각하기에는 사대부는 물론 지방관의 아들들도 대과를 위해 모여있는 성균관의 유생들이 적격이라 생각한 것이다.

 

“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관직을 받지 않아 때묻은 자들이 보다 덜할 것이다. 게다가 동궁의 나이가 젊으니, 북파 일파들이나 조정의 사람들보다 네게 좀 더 이득이 될 사람들이겠지. ”

“ 허나, 아바마마. 소자는 자신이 없습니다. 왕세자인 제 신분은 또 어찌한단 말입니까... ”

“ 네 신분은 철저히 숨겨질 것이다. 너는 소과에 통과한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소생으로 위장될 것이고, 동궁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균관에 입성하는 것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것만이 네가 이 궁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방책이다. ”

 

그 말에 동궁의 눈매가 눈물로 글썽였다. 부왕이 자신을 어여삐 여기고 아끼는 것이야 익히 알았지만 자신을 구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광이 눈물을 흘리자 왕이 고개를 저었다.

 

“ 울지 말거라. 너는 과인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과인이 무엇인들 해주지 못하겠느냐? 과인은 네 아명을 도(道)로 짓고, 이름자를 광(曠)으로 지었다. 그것은 과인이 너를 믿어서다. 네 태몽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사납게 울부짖으며 승천했던 것처럼, 과인은 동궁이 무어든 잘할 것이라 믿는다. ”

“ 아바마마...으흐흑... ”

“ 단지 사람을 얻으라 보낸 것도 아니다. 성균관서도 북파 무리 못지 않은 무뢰배들이 판을 치고 장악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 판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 이것은 돌아가신 과인의 스승께서 이야기한 것이야. ”

 

왕세자 광은 부왕의 용포를 잡고 슬프게 울었다. 자신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워서 울었고, 그런 자신을 따스하게 품어주는 부왕의 마음 씀씀이에 감복한 것이다. 한참동안 소리없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다가, 마침내 검은 용포로 소매를 닦아낸 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기 시작했다.

 

“ ...따르겠나이다. 부왕의 그 밀명, 소자가 따르겠나이다. 그저, 정진하고 정진하여 마침내는 당당히 이 조선 땅에 올바르게 서겠습니다. 아바마마를 닮은 영명한 군주가 되겠나이다... ”
“ 옳거니. 역시 우리 세자가 영명하구나. 과인은 그대가 헛된 위인이 되지 않을 것임을 믿는다. 밀명을 올바르게 수행하길 바란다. ”

왕의 말에 세자 광이 반드시 수행하고 몸 성히 돌아오리라 맹세했으니, 사흘 후 곧바로 왕세자를 가마에 태운 인물들이 도성을 떠나 사라졌다.

 


 

한편, 왕세자를 가마에 태운 일행이 도성을 빠져 나가자마자 의경왕후 김씨는 속히 오라비인 김수찬을 불러들이라 귀띔했다. 이를 모를 김수찬이 아니었고, 그 날로 형조판서 김수찬이 입궁하였다.

 

“ 중전마마께 하례드리옵니다. ”
“ 어서 앉으세요. ”

 

왕비의 전각 아래 발을 하나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정적만 흐르다가, 발 아래 형체가 가려진 중전을 바라보던 형조판서가 입을 열어 말했다.

 

“ 회임을 하신 바, 복중 아기씨는 무탈하신지 염려되옵니다. 마마. ”
“ 이제 막 한달 하고도 보름을 넘긴 차, 다행히 큰 이상은 없다만 다소 몸이 조금 미령합니다. 큰 이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

 

형식상의 인사치레인 말들이 서로 오고 갔다. 한동안 서로 인삿말을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말을 꺼낸 쪽은 김수찬이었다.

 

“ 왕세자가 길을 떠났으니 우리가 속히 일을 벌여야 할 때입니다. ”
“ 알고 있습니다. 이제 막 도성을 떠났으니, 청으로 떠나는 그 틈을 노려 없애는 것이 옳겠지요. ”
“ 과연 영명하신 말씀이옵니다. 마마. ”

 

발 아래 중전이 주먹을 꾹 쥐었다. 왕세자만, 그 놈만 없어진다면...! 연달아 공주만 셋을 낳은 왕비는 왕이 은연중에 자신을 견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수년 전 마지막으로 낳은 혜순공주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아이를 가지지도, 낳지도 못했던 터라 뜻하지 않게 다음 대 보위를 보경당 정씨에게 허무하게 빼앗겨야만 했으니, 그녀의 증오는 극에 달했던 것이다.

 

“ 조치를 취해놓았겠지요? ”
“ 물론이옵니다. 이미 국경 즈음에 살수를 고용해 뒤따르게 했습니다. ”
“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할 겝니다. ”

 

중전은 그렇게도 조심하여 성공할 뻔했던 독살 사건이 어느 멍청한 항아 하나 때문에 실패해야만 했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으득 으득 이를 갈았다. 그 심중을 읽었는지 형판이 그녀를 위로했다.

 

“ 염려하지 마옵소서. 복중 아기씨에게 해가 갈 것입니다. ”
“ 오라버니. 이 복중 아이는 꼭 사내아이여야 합니다. ”
“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
“ 사내아이여야만 합니다. 나와 원자 모두 무탈할 텝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 그래야만 김씨 가문과 이 나라 사직에 어긋나지 않을 일이에요. ”

 

중전이 눈을 빛냈다. 그녀의 양 손 가득 끼워진 옥가락지가 청명히 빛을 냈다.

 

 

 

퇴궐한 김수찬은 한양 내에 있는 자신의 사저에 들어섰다. 문지방을 청소하던 돌석이가 납죽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했다.

 

“ 대감마님. 오셨습니까요! ”
“ 그 놈은 여전히 그러고 있느냐? ”
“ 도련님 말씀이십니까요...? ”

 

이 천놈이 말한다고 들으실 분이 아니시지요. 돌석이 그저 고개를 저으니 김수찬이 그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비단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열댓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울상으로 그에게 뛰어나왔다. 올해 열넷이 조금 넘는 김수찬의 여식인 김은희(金恩熙)였다.

 

“ 아버님, 아버님! 큰일이에요. 오라버니 좀 말려보세요! ”
“ 신이 그 놈이 법석인 것은 나도 알고 있다. ”
“ 오늘은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

 

오라버니! 오라버니! 애타게 오라비 이름을 부르짖는 은희를 본 김수찬이 머리를 짚었다. 그 놈은 도대체 나이가 몇이나 되어야 정신을 차릴 것이란 말이더냐. 아이고 두야. 막 한숨을 내쉬려던 참이었다.

 

“ 요란 떨지 말아라. 희야. 내 오늘은 아버님과 담판을 지을 것이다. ”
“ 그래도 이건 아니어요. 저번에는 식음을 전폐하더니, 이번에는 무작정 짐을 싸다니요! ”

 

아무리 부자간 사이가 나빠도 이건 아니지요. 정말로 연을 끊을 참이어요?
눈물이 아롱진 은희가 오라비와 아버지 사이를 부지런히 뜯어 말렸다. 그러나 오라비의 의지는 결코 꺾일 수 없는 것이라.

 

“ 아버님. 아버님의 아들 김 신(金 新). 마지막으로 간곡히 청합니다. ”
“ 또 그 말을 할 참이냐. ”
“ 과거를 보게 해 주십시오. ”
“ 아니 된다. ”

 

그 이름 김 신(金 新). 올해로 스물이 되는 형조판서 김수찬의 맏아들이었다. 한양 내에서도 아주 유명한 미장부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쇠고집도 꺾이지 않는 심보도 형판을 닮아 아주 유별나기 그지 없었다.

 

“ 아니 된다고 하셨습니까. ”
“ 허튼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 가문은 무인 가문이다. 가문을 이어야 할 네가 무과를 응시해도 모자랄 판에 과거라니! ”
“ 소자는 가업을 이을 마음이 없습니다. 성균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
“ 그런 어리석고 한심한 소리는 무과에 합격하고 나서나 하거라. ”
“ 아버님! ”
“ 너는 아직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러는 것이다. 그 뿐이다. ”
“ 세상을 보다 알고 싶습니다. 저는 문(文)으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
“ 계집아이 같은 소리는 그만 하여라. 서둘러 무과나 준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

 

따르지 않겠다면 너를 패륜아로 알고 억지로라도 보게 하겠다. 그렇지 못하겠다면 어쩌실 겁니까? 네 팔다리 한 쪽을 영원히 쓰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사사로운 칼은 쥘 수 있겠지만, 영원히 먹과 붓은 쥘 수 없게 말이지. 아버님! 기어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마저 무참하게 짓밟는 부친에 울분에 찬 목소리로 김신이 소리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화를 삭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은 은희가 다시 오라비를 말리기 시작했다.

 

“ 그만 하세요. 오라버니. 정말로 연을 끊을 참이어요? ”
“ 아버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그리 해야겠지. ”
“ 오라버니! ”

 

빽 소리를 지른 은희에게 잠깐 미소를 보인 신이었지만 이내 표정이 다시 싸해졌다. 부친과 크게 돈독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나쁜 관계도 아니었다. 적어도 형판의 자리에 있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 정녕 아니된단 말씀이십니까. ”
“ 그래. 네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무가에서 문재가 나올 수는 있어도 그것이 가업을 이을 맏아들이라면 그럴 수 없다. ”

 

허나 뜻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법, 신이 김수찬을 쏘아보았다.

 

“ 허면 어쩔 수 없겠군요. 소자 아버님과의 모든 세속에서의 연을 끊으려 합니다. ”
“ 이, 이 놈이...! ”
“ 오라버니... 어찌 그런 끔찍한 말씀을...! ”

 

신이 그동안 주섬 주섬 싸둔 짐들을 손에 가득 들었다. 소일거리를 하여서 모아둔 돈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궁핍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희망마저도 철저히 짓밟힌 그가 아버지에게 일갈했다.

 

“ 이미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소자 성균관에 들어갈 것이니 이제 대감께서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

 

그동안 키워주고 길러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자신의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김수찬을 향해 신이 마지막으로 한번 절을 했다. 벼슬에 나간다면 그에 따른 사례는 해드리겠습니다. 응당 그러는 것이 옳겠지요. 부자간의 정을 끊자 말하는 그에게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로 진정인 것이었다.

 

“ 저를 인정해 주시리라 믿었지만, 그렇지 않아 참으로 가슴이 통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앞으로 저와 대감마님의 연은 끝이리라 믿습니다. ”
“ 오라버니, 가지 마세요. 아버님께서 괜히 그러신 거에요. 네? ”
“ 내 성균관에 가면 네게 연통을 보내마. 그때까지 잘 있거라. ”

 

오라버니... 말끝을 흐리는 은희의 머리가 한번 쓰다듬어졌다. 신은 이제 다시 제 아버지를 보았다. 노기를 잔뜩 띈 얼굴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바로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지 않았다. 신 역시 결의가 가득한 얼굴로 김수찬을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등을 돌렸다. 그러자 김수찬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지금 이 집을 나간다면 네놈과 나의 인연은 끝이다. ”

그 말에 신이 잠시 움찔 하였다. 그러나 다시 등을 돌린 그가 허리를 숙였다.

“ 안녕히 계십시오. 대감마님. ”

그대로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신 오라버니!

김신은 그렇게 길을 떠났다. 칼과 창이 아닌, 붓과 먹으로 학문을 공부하고 억지로 주어졌던 그간의 삶이 아닌 제대로 제 인생을 찾아보겠다는, 호기로운 대장부 기질을 품고 그대로 성균관으로 떠났다.

집이 멀어지고 보이지 않게 되자, 신은 이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정말로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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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료 없앴어요! ㅜㅜ 3편부터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아요

비평도 평론도 얼마든지 환영하니까 많이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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