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회의는 빠른 시간 안에 끝났다. 패션쇼 준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고, 단지 의상에 대해서 몇가지 상의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이번 패션쇼는 경수를 맘에 들어하는 디자이너가 경수가 만든 옷 한 벌 정도는 다른 모델에게 입힐 수 있는 큰 기회를 주었기에,
경수의 의견 또한 조금은 반영 될 것이었고. 딱히 여러 인원이 회의에 참석할 의무는 없었지만, 이번 패션쇼는 유명 잡지에도 실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경수를 포함하여 여러 사람이 겸사겸사 뭉쳤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짐을 챙긴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경수 역시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남자가 경수를 부른다. 의아함에 경수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니 짐을 챙긴 남자가 경수 쪽으로 다가온다.
"오늘 뭐해요?"
"그건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전혀 궁금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잖아요 그런 얼굴"
경수의 말에 헛기침을 내뱉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경수에게 내민다.
"번호따는거예요?"
"좋을대로 생각해요"
"흐흥...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열한자리 숫자를 터치한 경수가 남자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오늘은 나 약속이 있어요"
"그래서요?"
"어,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물어본거 아니었어요? 그런거 아니면 나 완전 민망해서 이불에 하이킥할지도 모르는데"
"맞아요. 그런데 약속이 있다니 안되겠네요"
"내일은 약속 없는데"
씨익 웃으며 말하는 경수에, 처음으로 남자가 피식 웃더니 경수에게 손을 내민다.
"핸드폰 줘요"
이에 군소리없이 남자에게 핸드폰을 내밀자, 남자 또한 번호를 찍고 저장하여 경수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번호와 이름을 확인한 경수가 남자에게 한 마디 하더니 사무실을 나섰다.
"먼저 연락할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릴거니까 바람맞추기만 해봐요. 그리고 인상쓰지 말고 오늘처럼 좀 웃고다녀요 김종인씨"
경수의 말에 다시 한 번 피식 웃어보인 종인 역시 불을 끄고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 * *
흰색의 아우디를 끌고 주차장을 나선 경수가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형, 나 미팅 끝났어요"
- 벌써? 빨리 끝났네?
"응. 나 어디로 갈까? 지금 사무실 나왔는데"
- 오랜만에 고기나 좀 썰어볼까?
"알겠어요. 주소 찍어서 문자 보내요"
전화를 끊고 곧 레스토랑의 주소를 문자로 보낸 찬열에,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한 경수가 다시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도착한 레스토랑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댄 경수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웨이터가
친절히 자리 안내를 해주려고 하기에 찬열의 이름을 대니, 곧 조금은 구석진 창가 쪽으로 경수를 안내해주고 자리를 떠난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조금 바빴어요. 얼마나 기다렸어요?"
"나도 들어온지 얼마 안됐어. 한 10분? 창문으로 너 차 들어오는거 봤어"
"그랬구나..."
물로 가볍게 목을 축인 경수가 시계를 보니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이다.
"근데 저녁먹기엔 시간이 너무 이른거 아니예요?"
"느긋하게 먹고 나가지 뭐. 네 얼굴도 좀 오래 보고"
말을 마친 찬열이 웨이터를 불러 능숙하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얼마 되지 않아 전채요리와 스프가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하고, 둘은 서로의 근황에 대해 물으며 천천히 음식을 입에 가져갔다.
"형은 결혼 안해요?"
"야, 애인이 있어야 결혼을 하지, 결혼은 뭐 아무나 붙잡고 하냐?"
"이렇게 멋진 형을 여자들은 왜 가만히 놔두는지 모르겠네"
"그러는 너는... 아직이냐...?"
찬열의 조심스런 물음에 금새 그 뜻을 알아버린 경수가 스프를 떠먹던 스푼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경수의 그런 행동에 나지막이 한숨을 쉰 찬열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럴거야 너희 둘 다"
"뭘요..."
"그래, 변백현이가 요즘은 잘 해줘? 우리 예쁜 경수, 하면서 살갑게 대해주고 그래?"
"......"
"아니면 이혼하고 너한테 갈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달래?"
"......"
"그것도 아니면 사랑한다고는 하냐?"
"......"
날카로운 생선가시가 목구멍에 걸린것마냥 되돌아오는 날카로운 통증에 경수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입을 열어 뭐라고 대답하긴 해야겠는데 찬열의 그 어느 질문 하나에도 똑바로 대답해줄 수 없어서 입술만
달싹이던 경수가 결국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경수에게 질문하긴 했지만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찬열은 한숨을 한 번 쉬곤 진지한 눈빛이 되어 경수를 주시했다.
"이제 그만 하자 경수야"
"뭘요..."
"뭘 말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 놔둬요 그냥"
"내가 너 이렇게 괴로워하는거 언제까지 가만히 두고보고만 있을 것 같아?"
"흐흥... 괴롭긴 누가 괴로워요. 오버 좀 하지 마 진짜"
경수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런 것 따위 통하지 않는다는 듯 찬열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장난하는거 아니야. 벌써 몇 년 째냐 이짓거리가. 그 자식은 잘 나가는 직장에다, 여우같은 마누라 옆에 끼고 잘만 살고,
지 편할 때, 지 원하는 시간마다 너 만나고 하고싶은거 다 하고 사는데, 어?"
"......"
"거기다 곧 있으면 지 닮은 자식 낳ㅇ-"
"그만-"
"야"
"형, 그만해요. 말 안해도 나 다 알고 있어. 형이 그렇게 애써 들쑤시지 않아도,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여기까지만 해요, 응?"
"넌 억울하지도 않냐?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러고 있는건데? 너 좋다는 사람이 널리고 깔렸는데"
"나는 괜찮은데 형이 자꾸 왜 그래요..."
"괜찮아? 괜찮냐 이게? 참 괜찮기도 하겠다. 에휴, 멍청한건지 속이 없는건지... 그 자식이 너 이러는거 알긴 하냐?"
"......"
따지고 잴 것 없이 찬열이 하는 말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기에 경수는 그저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스푼을 들었다.
금새 식어버린 크림스프가 경수의 입 안으로 들어와 식도를 타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어쩐지 그 느끼하고 매스꺼운 맛에 거부감을 느낀 경수가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스푼을 내려놓고 물로 입 안을 헹구었다.
"에휴 이 등신..."
"흐흐..."
"밥은 먹고 다니냐? 네가 무슨 체중관리하는 모델도 아니고너무 마른거 아니야?
너 살 더 빠졌지 요즘?"
"나 원래 살 잘 안찌는 체질인거 알잖아요. 요즘 좀 바빠서그런지 3kg정도 빠지긴 했는데... 그렇게 티나나?"
"말랐는데 거기서 3kg가 더 빠졌으니 네가 무슨 거식증 걸린 16세 소녀냐? 팍팍 좀 먹어"
"먹고 있잖아요 지금 팍팍"
경수가 방긋 웃어보이며 포크로 생선살을 쑤셔댔다.
곧, 두 사람의 테이블로 스테이크 요리가 나오고, 한동안 접시를 스치는 나이프 소리만 조용히 울려퍼졌다.
"왜 이렇게 못먹어"
"왜요, 먹고 있잖아. 맛있는건 아껴먹어야돼"
"고기만 다 썰어놓고 손도 안대고 있잖아 지금"
"천천히 느긋하게 식사하자면서요. 흐흥... 그래야 내 얼굴 더 오래 볼 수 있다면서?"
경수의 능청스러운 말에 찬열이 못이기겠다는 듯 한 번 피식 웃곤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다.
워낙 느릿한 속도 때문인지 일곱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스테이크는 접시의 반의 반도 비우지 못했다.
적당하게 썬 고기조각을 입 안에 밀어넣고 있는 찬열과는 다르게 경수는 간간이 물만 마셔댈 뿐 음식에 손도 잘 대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스레 경수를 바라보는 찬열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모양인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경수의 눈이 갑자기 커지기 시작했다.
"ㅅ...선배"
"왜그래?"
"ㅇ..아니... 우리 이만 일어날까요?"
"뭐? 갑자기 왜?"
"나 배불러서 그만 먹고 싶은데... 우리 딴 데로 자리 옮길까요?"
"음식에 손도 안대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아파?"
"응... 응 나 아픈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나가요, 응? 빨리..."
갑작스레 안색이 파리해진 경수가 의자에 걸쳐져있던 자켓을 손에 들곤 다급한 어조로 찬열을 보챈다.
멀쩡히 앉아있던 경수가 보이는 이상한 반응에 의아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찬열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급기야 경수는 찬열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알겠어, 이거 놓고 가자. 응?""
"빨리... 빨리 나와요. 응? 빨리 나가야 해..."
계산서를 들고 허겁지겁 카운터로 향하는 경수에 덩달아 발걸음이 빨라진 찬열이 경수의 손에서 계산서를 빼앗아 음식값을 지불했다.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 못하던 경수는 찬열이 품 안에 지갑을 넣기 무섭게 문을 열더니 찬열을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초조하게 숫자만 바라보던 경수가 마침내 도착하여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경수의 옆으로 찬열이 섰다.
그제서야 안심한 듯 눈동자가 풀어진 경수가 B2버튼을 누르고 한숨을 쉬는데, 옆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곧 경수가 탄
엘리베이터를 지나 레스토랑의 입구로 향했다. 무심코 고개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리고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던 남자는 찰나의 순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 사이로 경수와 눈을 마주쳤다. 사색이 된 경수와 멈칫- 그 자리에 멈춰선 남자 사이에 존재하던 엘리베이터가
그 둘의 시선을 차단해버리고 곧 엘리베이터는 B1층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찬열은 알아챘다.
경수가 얼토당토않은 태도로 일관하며 빠르게 레스토랑을 나선 이유. 백현과 그의 아내 혜교가 다정하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 근데 형. 차가 두 대인데 어떻게 이동하지? 내가 형 차 타고 갈까요?"
"너- 아까 나 뭐라고 불렀는 줄 알아?"
"응..?"
"선배- 라고 불렀어"
"아... 내가 그랬나?"
애써 평정을 가장한 척 자연스레 말을 꺼낸 경수를 무시하듯 낮게 목소리를 까는 찬열에 눈꼬리를 접어 웃던 경수가 순간 표정을 굳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알아챌 수 없는 속도로 다시 웃으며 받아쳤다.
경수는 평소에는 찬열을 '형'이라고 불렀지만 가끔 당황했을 때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는 예전처럼 '선배'라고 부르곤 했던 것이다.
경수와 찬열은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였다. 물론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변백현 때문에 그러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나도 봤어. 엘리베이터 닫힐 때 변백현 와이프랑 같이 레스토랑 들어가는거"
"그...래...?"
"너, 창 밖으로 먼저 본거지? 여기로 들어오는 변백현 차"
"하...하하... 형도 참, 그걸 다 봤어요? 눈 되게 좋다~ 나 몰랐는데!! 와아... 변백현씨가 여기 왔구나... 그랬구나..."
모른 척 해줄만도 하건만 일부러 상처를 후벼파는 듯한 찬열의 행동에 경수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백현생각을 하지 않으려 찬열을 만난 것이었지만 찬열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건 좀 곤란하다.
찬열의 입장에선 혼자 가슴앓이하는 경수가 안쓰러워서 하는 행동이었겠지만 경수에게 있어 이런 찬열의 태도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힘든데 옆에서 자꾸 건드리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다.
"형... 나 오늘 좀 피곤해서 그런데 먼저 들어가도 될까?"
표면상으로는 찬열의 의견을 물으며 허락을 맡는 말투였지만, 경수의 어조와 눈빛은 혼자 있게 놔두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이에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찬열이 알겠다는 듯 경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피곤한데 불러내서 미안"
"아니예요. 같이 식사하기로 해놓고 이렇게 헤어져서 내가 더 미안하지... 다음엔 내가 맛있는거 살게요"
"말이나 못하면. 가서 푹 쉬고, 전화해"
"응. 들어가요 형"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경수가 자신의 아우디로 향했다.
시동을 걸고 창문을 연 경수가 찬열을 지나쳐가면서 가볍게 눈인사를 하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경수의 차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찬열 또한 한숨을 쉬곤 자신의 차에 올라타고 이내 경수와 마찬가지로 레스토랑에서 멀어졌다.
일단은 묵혀뒀던 것들 편수대로 차례로 올려볼게요;ㅅ;
반응이 없어서 슬픈건 슬픈거고...ㅎㅎㅎ 올린건 올리고!!!
아 저는 왜 이렇게 경수가 마음아프고 속앓이하는게 좋죠??
새디인가봐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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