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드는 버스 정류장. 긴 의자에 걸터앉은 여자의 핸드폰은 벌써 뜨거워. 여자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좋아했고, 목소리만 따뜻함을 좋아했고, 목소리의 주인을 좋아했어. 지금이 몇 시인가 싶어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고,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목소리의 이름이 떴어. 재현 선배. 그녀는 지금 한 시간째 그녀와 통화 중인 정재현을 짝사랑했어.
“네? 시간 보느라 못 들었어요.”
-너 버스 언제 오냐고. 집에 언제 들어가는 거야아.
“몰라요. 차가 엄청 밀리나 봐요.”
그가 말꼬리를 늘렸고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어. 그녀는 거짓말을 했어. 집 가는 버스는 방금 지나갔거든. 어떻게든 통화를 더 오래 하고 싶어서 벌써 세 번째 버스를 보냈어. 재현이 벌써 어두워졌다며 걱정하는 소리가 퍽 좋았어.
원래 둘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 다 그녀가 먼저 다가가고 노력해서 이뤄낸 결과였지. 그에게 먼저 연락한 것도 그녀였고, 먼저 말을 건 것도 그녀였어. 대신 이번은 달라. 재현이 먼저 전화를 걸었거든. 재현이 장난을 치면 그녀는 밝게 웃었고, 둘은 말을 멈추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떠들었어.
그녀는 그야말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랑에 빠진,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자였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여느 때보다 사랑스러운 법이니까.
그 순간 사랑에 빠진 건 그녀 혼자가 아니었어. 한 명 더. 맞은편 횡단보도에 서 있던 이민형. 그는 친구들과 피시방에서 저녁까지 해결하니 슬슬 졸리길래 집에 가던 길이었어. 이어폰을 꽂고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그의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어. 그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어. 민형은 그녀와 같은 반이었거든. 앞모습은 본 적 없지만 옆모습과 뒤통수는 자주 봤었어. 그녀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지.
동그란 눈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동그란 입. 잔뜩 올라간 광대와 상기된 표정.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얘기하는 것 같았어. 귓속말도 아니고 나 그런 사람이라니까!!!!! 하고 얘기하는 것 같은 거야.
“사람들 건너는데 길을 막으면 어쩌자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넋 놓고 있던 민형은 누군가 그의 어깨를 치며 횡단보도를 건넜을 때야 정신을 차렸어. 그리고 신호가 끊기기 전 아슬아슬하게 횡단보도를 건넜어.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더 예뻤어. 그는 버스 정류장 옆에 서서 그녀를 훔쳐봤어. 그리고 그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지.
행운은 민형에게 친절했어. 주말에 또 그녀를 만났으니까. 한낮의 더위를 피하려 눈앞에 보이는 드럭 스토어로 들어갔는데 만난 거야. 그녀는 핸드폰 대신 향수를 들고 있었어. 민형은 반가워서 그녀에게 인사하려다 그녀는 자신을 모른다는 게 떠올라 뻗었던 손을 거뒀어.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괜히 머쓱해진 민형은 코를 찡긋했어. 그리고 모르는 사람인 척 멀리서 그녀를 훔쳐봤지. 나는 너에게 관심 없다, 하고 스스로는 속이고도 자신의 눈동자는 속이지 못하던 민형이 생각했어.
그 사람 선물 사는구나.
단번에 알 수 있었어. 버스 정류장에서의 그녀는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람과 통화 중이었고, 그녀가 지금 계산한 향수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 향수였거든. 문제는 ‘그 사람’이 누구냐는 건데… 잠깐, 계산? 그녀는 이미 계산을 마치고 나갔어. 민형도 서둘러 따라가려 했지만 직원에게 붙잡혔어. 찾는 거 있으세요? 가식적인 목소리와 형식적인 미소. 어, 그게… 민형은 말을 맺지 못했어. 그가 찾는 건 이미 이곳에 없었거든.
여자는 침대에 앉아 앞에 놓인 핸드폰과 눈싸움을 했어. 미동도 없던 핸드폰이 카톡! 하고 울리면 재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알림을 읽은 그녀는 실망해. 기다리던 사람의 연락이 아닌 거야. 여자는 방금 재현에게 일요일에 영화 같이 보겠냐는 카톡을 보냈단 말이야. 그녀에게 온 카톡은 민형의 것이었어.
‘너 향수 뭐 써?’
‘나? 나 안 쓰는데…’
‘너한테서 엄청 좋은 향이 나길래.’
‘… 그렇구나.’
그녀는 얼마 전 갑자기 말을 걸어오던 민형이 문득 생각나.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떼던 민형이가. 엄청 어색했는데. 얘는 그때도 뜬금없더니 카톡도 뜬금없어. 뭐, 생각해보면 아주 뜬금없는 건 아니었어. 민형의 친구들과 그녀의 친구들이 친했거든. 둘은 굳이 접점이 없었을 뿐이야. 그녀는 민형의 카톡에 대충 답을 보내고 다시 재현의 연락을 기다려. 제발. 답이 오게 해 주세요. 진짜 진짜 착하게 살게요…….
… 그녀는 진짜 진짜 착하게 살았어. 재현에게서 같이 보자는 답이 왔거든. 토요일 밤. 콧노래 흥얼이며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할 때 그녀의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음을 알았어. 방이 한참 어질러졌을 때, 며칠 새 친해진 민형이 전화를 걸어왔어.
-뭐 하고 있었어?
내일 뭐 입을까 고민 중.
-오우, 그럼 너… 아, 아니야.
왜애. 왜 말을 하다 말아.
-너 밝은 색이 잘 어울리더라. 그, 흰 셔츠 있잖아. 예쁘던데.
민형의 말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떠. 마침 하늘색 니트를 입을까 흰 셔츠를 입을까 고민 중이었거든. 내가 그거 입으려고 한 거 어떻게 알았어? 그녀가 묻자 핸드폰 너머로 민형이 웃었어. 야, 척하면 척이지. 네이비색 치마에 컨버스 어때. 민형의 말에 그녀는 감탄해. 그녀가 생각해도 그렇게 입으면 예쁠 것 같았거든.
오. 이민형 좀 센스 있었다.
-멋졌어?
응, 조금.
-아 솔직히 조금은 좀 아니다. 완전 멋있었다고 해줘.
싫어. 내 맘이야.
너는 칭찬에 너무 인색하다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민형에 마냥 웃었어. 그녀는 민형에게 내일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 간다고 말하려다 말았어. 왜인지 모르지만 아직 민형에게 말할 정도는 아니다 싶었어. 그녀는 전에 민형과 음색이 좋다고 얘기했던 아티스트가 내한한다더라며 말을 돌렸고, 민형은 정말이냐며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어.
민형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었어. 어디서 볼까 묻는 민형에 친구는 영화관 앞에서 보자고 했지. 일찍 도착한 민형은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더운 공기 때문에 영화관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기로 했어. 그리고 거기서 그녀를 발견했어.
“세 번 우연이면… 이건 인연이다.”
그녀가 가는 곳을 민형이 따라가는 건지, 민형이 가는 곳을 먼저 알고 그녀가 가는 건지. 가는 곳마다 그녀를 마주치니 민형은 너무 신기해. 운명이다, 혼잣말도 하며 헤실헤실 그녀에게 다가가던 민형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그녀가 여기에 왜, 누구와 온 건지 눈치챈 거야. 어쩐지 어제 통화할 때 목소리가 들뜬 것 같더라니. 예쁘게 입고 데이트 왔네.
세상에 큰 욕심 없이 사는 민형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달랐어. 누구보다 섬세하고 진지했어. 그녀에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어. 민형은 기다릴 줄도 알았어. 그래서 그녀의 짝사랑이 너무 궁금하지만 그녀가 얘기를 해주기 전에는 먼저 묻지 않았어. 그녀가 그만큼 마음을 열진 않았거든. 어제 통화할 때에도 내일 그 사람 만나? 물으려다 말았어. 사실 민형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어. 동시에 자기애가 높아서 자신만큼 좋은 사람은 아닐 거라 혼자 장담했지.
“일찍 왔네?”
그런데 재현을 본 순간 민형은 자신의 확신이 틀렸음을 직감했어. 누가 봐도 재현은 너무 괜찮은 사람인 거야. 이렇게 센 상대일 줄이야. 재현을 보고 웃는 그녀를 보니 왜인지 모르게 질투가 났어. 둘이 같이 볼 영화는 뻔했어. 그녀와 민형은 취향이 비슷한 걸 넘어 똑같았어. 그러니 언젠가 민형이 같이 보자고 하려 했던 영화를 보겠지. 꼴깍. 민형은 마른침을 삼켰어.
그날의 질투심이나 경쟁심은 잘 지워지지 않았어. 그래서 다음날 민형은 뻔히 알고도 그녀에게 물었어. 다음 주말에 영화 같이 보지 않겠냐고. 영화 제목을 말하니 그녀는 당황한 얼굴이었어. 아, 그거 이미 봤는데.
“진짜? 누구랑?”
맞아. 다 봐놓고 물었어.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민형에게 솔직하게 얘기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정재현이라는 한 살 선배인데 좋아한 지는 꽤 됐고, 어제 재현과 영화를 봤다고. 민형은 애써 침착하게 좋았겠다, 대답했어. 궁금했던 그녀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으니 좋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짜증났어. 그녀가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거든. 그리고 더 이상 가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겠다 생각했지. 이러다가는 그냥 친구로 남겠다 싶었어.
그녀의 신발끈이 풀리면 민형이 허리를 숙였고, 둘만의 유행어가 많아졌어. 아침에는 같이 등교하러 집앞에 온 민형과 지각이라며 손을 꼭 맞잡은 채 내달렸고, 밤에는 하품도 참아가며 서로의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통화를 했어. 그녀가 친구에게서 이민형이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라는 말을 들은 것도 그때쯤이었어.
여자는 그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 그녀가 느끼기에 민형의 말과 행동은 사심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거든. 더군다나 민형한테는 재현 오빠 이야기도 했고. 민형은 다 알잖아. 그녀가 누구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았어. 민형이 섬세하게 챙겨줄 때면 가끔 설레기도 하지만... 친구는 친구잖아.
“이민형. 너 솔직하게 말해봐.”
“무슨 일인데?”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오우, 이렇게 갑자기? 타이밍 좀 오바.”
민형이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자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민형을 쳐다보지. 서운하다. 난 너한테 다 말했는데. 그녀가 자꾸 재촉했어. 민형은 끝끝내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대답해. 있어, 있어. 왜 없겠냐. 그녀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어. 사실 없다고 할 줄 알았거든. 민형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어.
“여기까지, 여기까지. 더 이상은 아직 말 못 해.”
단호한 민형에 그녀는 더 묻지 않았어. 여자는 민형이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여자친구가 생겨서 자신과 함께 하던 시간이 줄어들면 많이 섭섭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어. 잘 됐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왜인지 아쉬워. ... 얘한테 참 많이 정들었나 보다. 복잡한 마음을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어.
그날도 쉬는 시간 내내 장난치는 민형과 여자를 유심히 보던 친구가 말했어. 내가 봤을 때 이민형 얘 좋아해. 빼박이야. 여자는 그녀의 친구가 조금 오버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그것도 민형의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하잖아. 굳이 이런 말을 해서 얻는 게 뭘까 생각해. 우리 그냥 친구라니까. 그녀가 웃으며 민형을 바라보지. 민형은 알 수 없는 표정. 그녀는 민형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어. 그러자 민형이 한 마디 툭 뱉어.
“그건 네 생각이지.”
그리고 민형은 가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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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후 이민형 오우... 방금 내가 무슨 말 했는지 아는 사람?????? 솔찍히 약간 약간 쫌 오바였지?????? 약간 아니고 존나 오바였어 미친 줄 알았잖아 오우 야아... 앞으로 걔 어떠케 봐... 아니 쫌 위로 쫌 해 줘 얘드랑... 위로 받아서 뭐하게; 그냥 대놓고 고백을 하지 그랬어요;; 러러 배고파 빤리 매점 가자 b. 여주 데이트 코디 상상도
c. BGM Kehlani - Honey d. 좋은 하루 보내세용 굿밤 굿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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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윤아.. 제대로 연말 꾸꾸꾸 말아왔어 미1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