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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혁의 일기
야 너 솔직히 말해. 김여주 좋아하지. 질풍노도의 시기, 중학교 때 황인준에게 처음 들은 말이다. 황인준은 한창 예민했던 중학교 2학년 김여주의 같은 반 친구였다(그래서 처음에 싫어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니가 나 대놓고 경계하는데 어떻게 모르고 베기냐? 나름 몇 년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종이같이 애한테 단번에 들켜버렸다. 소문나서 김여주가 알면 어떡하지, 골머리를 앓으려던 차에 황인준이 말했다. 안 말해 멍청아, 김여주랑 이어줄 테니까 나한테 짜증 좀 부리지 마. 투덜거리던 황인준. 이때부터 황인준, 김여주, 나 이렇게 세명이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황인준과 친구가 되고 깨달은 점은 내가 김여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던 사람이 황인준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소꿉친구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알고 계셨다. 그니까 철저하게 김여주만 모르고 있었다.
김여주를 만나고 나는,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다. 어쩌면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엔 유치하게 표현했다. 사실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여주한테 고백한 적이 있다. 있자나 김여주.. 나랑 그.. 사귀는 거 할래? 아니. 나 지성이랑 나중에 결혼하기로 했단 말이야. 놀이터 그네에 앉아 가슴 두방망이질을 하며 했던 어린 고백의 결말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지성이? 웅. 걔 우리보다 한 살 어리잖아. 야 사랑에 나이가 어딨냐~. 아마 김여주는 기억 못 할 거다.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아 집에 울면서 들어갔다. 그리고 꽤나 충격을 받아 표현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중학교 때의 나는 감정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아, 정확히는 슬픈 감정에 무뎌졌다. 사춘기의 김여주는 한 달에 한 번씩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다. 야, 정재현 오빠 진짜 잘생긴 것 같지 않아? 동혁아 너 황욱희랑 친해? 나 좀 도와주라. 뭐 한두 번 듣는 게 아니다 보니 익숙해졌다. 처음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는 타격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친구라는 명분으로 김여주 옆에 붙어 떨어져 본 적 없다.
문제는 김여주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제노를 좋아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노는 이민형을 비롯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처음으로 친해진 친구였다. 처음 김여주가 나에게 이제노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중학교 때와 같이 그저 잠깐 좋아하는 거겠지,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고등학생 김여주는 중학교 때보다 마음이 훨씬 성숙했다. 한 달을 못 넘기던 마음이 이제는 반년을 넘겼다. 김여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은연중에 이제노에게 티를 냈다. 깜빡이 없는 김여주 화법은 이제노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내가 김여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던 이제노는 아닌 척 애써 덤덤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말 불안했지만 씁쓸하게도 서로 좋아하는 걸 응원했다. 한창 여름이던 새벽 밤, 뜬금없는 김여주 전화를 나는 긴장하며 받았다. 고백받았나, 하고. 동혁아 나 어떡해? 울음 때문에 잔뜩 뭉개진 발음으로 너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이제노 생각에 머리가 핑 돌았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울린거야. 겉옷만 챙겨 계단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잠옷 바람으로 정자에 쭈구려 앉아 흐느끼던 김여주를 보고 나는 애꿎은 이제노가 미웠다. 안쓰러울 정도로 우니까 나는 문득 내가 안쓰러웠다.
왜 김여주 찼냐. 어? 너 걔 좋아하잖아. ... 병신. 내 물음에 이제노 어깨를 으쓱이고 실없이 웃었다. 어차피 김여주는 나 안 좋아해. 늘 외면해왔던 말을 했다. 꽤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김여주는 나를 진지하게 이성으로 볼 생각이 없었다는걸. 이 말을 꺼내게 한 이제노가 괜히 미웠고 인정하는 내가 불쌍했다. 이후로 이제노가 나를 피했다. 나쁜 의미로 피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멀어졌다. 나는 그런 이제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도 못한다.
김여주의 태도가 변했다. 까닭은 잘 모르겠지만. 전에 말했다시피 김여주는 감정을 숨기는 법을 몰라 갑자기 끌어안거나 하는 귀여운 행동을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처음엔 긴가민가 했지만 차마 감추지 못한 발갛게 물든 얼굴을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 년을 기다린 건지.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쁘게 웃고, 볼을 부풀리며 삐치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봄 같은 시간이었다. 봄은 사계절 중 가장 짧은 계절이다.
신애리.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알던 애였다. 같은 반이었거나, 친구의 친구였거나 해서 아는 사이가 아니라.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애리가 나에게 번호를 물어봤고 나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별다른 만남은 없었는데 3학년 같은 반이 되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붙어 다니고 있는 거다. 김여주는 신애리를 무척이나 불편해했다. 나한테 딱히 말하진 않았지만 붙어 다니는 것도 19년 차인데 눈치 못 챌 리가 있나. 같이 등하교 하는 것도 한두 번 참다가 결국 따로 불러내서 말했다. 너 이제 등하교 할 때 그만 따라다녀. 왜? 나도 불편하고 여주도 불편해하니까. 음.. 그거 이따 점심 먹을 때 말하자, 나도 너한테 할 말 있거든. 웬일로 수긍을 하나 싶었다. 이때 신애리랑 점심 먹은 게 올해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동혁아, 2학년 때 여주 제노 좋아했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신애리가 말했다. 몰라. 어떻게 몰라, 제노가 너 때문에 김여주 찬 건데. 안 그래?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맞는 말이어서.
"그거 알아 동혁아? 이제노 2학년 때 너 때문에 겉돌았잖아. 걔 김여주 좋아하던 거 너한테 들켜서"
"여주도 너 때문에 상처받은 거잖아, 엄밀히 따지면. 여주 그때 맨날 조퇴하던데, 힘들어서"
"다 너 때문이야. 니가 여주 좋아해서 이제노 은따였고 김여주 시체처럼 학교 다녔어. 두 명한테 상처 줬다고 동혁아"
"여주한테 말해줄까? 너 때문에 이제노한테 차인 거라고"
"넌 여주 좋아할 자격 없지. 미안하지도 않아? 제노한테나 여주한테나"
신애리 말 중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다 내 잘못이었다. 이제노가 겉돌았던 것도, 이제노가 김여주에게 상처 준 것도. 작년 기억으로 머리가 어지럽던 차에 복도에서 귓속말을 하고 있던 이제노, 김여주와 마주쳤다. 이제노는 아직도 나만 보면 눈을 피했다. 정작 죄지은 건 나인데. 나만 아니었다면 원래 둘은 만나고 있었을 텐데. 우연일지는 몰라도 이제노와 김여주가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고 나는 이제노만 보면 마음이 무거웠다.
의도치 않게 김여주와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적어지던 중 황인준이 말했다. 김여주 진짜 힘들어해 요즘.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맞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곧 김여주 생일인데. 선물 주는 건 친구로서 해도 되는 행동이겠지.
뭐 갖고 싶은지 대놓고 물어보기 뭐 해서 돌려 물은 적이 있다. 너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아는 애가 곧 생일이라. 질투라도 하는 듯 심각해진 표정이 정말 귀여웠는데. 난 남자친구 생기면 목걸이 받고 싶어. 왜? 그냥, 직접 걸어주면 엄청 설렐 것 같아서. 이날 황인준이랑 단둘이(징그럽게) 시내에 있는 주얼리 브랜드는 다 돌아다녔다.
멍청하게도 김여주 생일 당일 잃어버렸다. 등교할 때나, 학교에서나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어서 집 가는 길에 주려고 했는데. 봉투 째로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화학 같은 조였던 신애리가 토요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김여주와의 약속도 무산되었다. 미안해서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 너는 안 괜찮은 얼굴을 하고 그렇게 말했다.
조별 과제 하는 내내 김여주 생각에 집중도 안 되었다. 동혁, 괜찮아? 아파 보이는데. 유일하게 내 상황을 알고 있던 이민형이 물었다. 아프면 먼저 가. 우리가 할게. 이민형 말에 카페 안에서 사진 찍기 바빴던 신애리가 말렸다. 안되지, 같은 조인데. 미간을 찌푸리는 이민형에게 입모양으로 괜찮다고 하고 나서야 분위기가 풀리긴 했지만.
과제가 끝나고 이민형과 같은 샵에 가서 같은 디자인의 목걸이를 샀다. 주면 마음이 풀릴까. 주말 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월요일에 교복 위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잘 어울린다. 예뻐. 오랜만에 김여주가 웃는 얼굴을 봤다.
김여주 웃는 얼굴로 하루를 버텼다. 신애리가 아무리 옆에서 성가시게 굴어도. 그러나 내 주변은 그렇지 못했다. 황인준은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번 하지 않았고 김여주도 아침과는 다르게 무감정한 얼굴로 제가 편식하던 반찬을 꾸역꾸역 삼키곤 일찍이 반으로 가버렸다. 옆에서 조용히 밥만 먹던 황인준도 김여주를 따라 일어났다. 황인준. 김여주 무슨 일 있어? 있으면 니가 뭘 어쩌려고. 쌀쌀맞게 말했다.
도대체 뭐 때문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황인준이나 김여주나. 나 뭐 잘못한 거 있냐? 이민형이 뭘 알겠냐마는 여러 번 물어봤지만 당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집에 가면서도 속상한 표정으로 입 꾹 닫고 제 갈 길만 갈 뿐이었다. 창백한 게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억지로 꾸역꾸역 먹던 모습이 생각나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샀다. 사실 조금 화가 났다.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주던가.
올라오는 감정을 참으며 김여주 집 문 앞에 섰다. 소화제.
"집에 있어"
"없는 거 알아"
"..."
"그러게 점심에 싫어하는 건 억지로 왜 먹어. 나 보라고 그래?"
".. 아니"
아니잖아. 왜 자꾸 거짓말하는 건데.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말했다. 병원 갈래? 내 물음에 너는 매정하게도 됐으니까 제발 가, 한다. 자기도 당황했는지 말끝을 흐리는 김여주에 나는 홧김에 돌아서 가버렸다.
그 후로 김여주는 나를 대놓고 피했다. 나도 화가 나있는 상태였고, 김여주도 나와 별로 말을 섞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아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했다. 이민형은 나보다 더 안절부절 했다. 동혁. 여주 진짜 힘들어해. 밥도 안 먹는대, 인준이가. 그렇게 무정하게 말했으면 잘 지내던가. 요즘 아침도 못 챙겨줬는데 그럼 한 끼도 안 먹는 거잖아. 미련스럽게도 걱정이 됐다.
자율학습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집에 갔다. 정자에 앉아 김여주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김여주. 어느새 해쓱해진 얼굴에 잔뜩 피곤이 묻어있었다. 눈까지 마주쳐놓고 못 들은 척 지나친다.
"김여주"
"왜"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만 말해줬으면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피하는지, 황인준은 왜 나에게 화가 나있는지. 답답했다.
"무슨 할 말"
"내가 물어봤짆아. 할 말 없냐고"
"할 말 없어"
답답해.
"김여주, 난 니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무엇이 너를 힘들게 했는지
"..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
한계점이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이지만 김여주가 힘들면 이제노 문제는 조금 미룰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까, 미안하게도 내게 우선순위는 김여주여서. 그걸 이제야 생각하는 내가 참 멍청했다.
"할 말 없어? 말 안 하면 아무도 몰라, 이 말 너한테 들으니까 진짜 서운한 거 알아? 그냥 힘드냐고,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봐 주면 안 돼? 그게 힘들어?"
울릴 의도는 조금도 없었는데 김여주를 울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변명하기엔 늦었고 습관적으로 달래려 어깨에 올려진 손을 김여주는 내쳤다. 병신. 허공에 머문 손을 보며 이제노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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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글 감사합니다ㅜㅜ 동혁 속마음은 아마 다음 편까지 해서 두 편이 될것 같아용..
분량조절 깔끔하게 실패해버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녀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