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 바람, 바람
'바람이, 이상해'
이제노가 말했다. 바람이 , 이상하다고.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곧 알게되었다. 바람이, 이상하다는 말은 이제노에겐 곧 종말을 의미했음을. 바람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걸까, 아니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걸까? 온통 하얀 방에서 이제노가 그렇게 말할 때면 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주곤 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인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처음 빛을 보았을 때, 그리고 바람을 맞이했을 때, 활활 불타는 건물을 등진 채 우리는 자유롭게 넓은 들판을 뛰어다녔다. 더 이상 우리의 능력을 숨기지 않아도 돼. 이마크가 손가락 끝으로 화염을 쏟아내며 말했다. 그러면 나는,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우곤 이렇게 말했지, 마크, 저 위로 올라가봐도 될까? 마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천러는 깔깔대며 천둥벼락을 쏟아냈다. 엉엉 우는 박지성을 등에 업은 나재민이 실 없이 웃었고 나와 이동혁은 파란 하늘을 누볐다. 얼른 내려오지 않으면 두고 가버리겠다는 황인준의 짜증에도 마냥 기쁘던 때가 있었는데,
나오지 마, 여주. 이마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와 박지성은 정말 그 텐트 안에 가만히 있었어야 했던 걸까, 귀를 찢을 듯한 천둥 소리에도 우리는 귀를 막고 가만히 책상 밑에서 울음을 삼켜야했던 걸까. 모든게 조용해진 지금,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도, 괜찮은걸까? 여주, 도와줘. 윙윙대는 바람 소리 속 이제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2.
햇님 달님 또는, 눈동자
'..........'
그 애의 눈동자를 보면 그냥 가만히, 고개를 묻고 다시 그 눈동자를 떠올리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저 그 눈동자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달님께, 햇님께 매일 빌고 또 빌었었지. 하지만 햇님과 달님은 아무것도 몰랐대. 내가 눈동자말고 다른 것들도, 그러니까, 그 애의 보송한 머릿결이나 손 끝까지도 모두 사랑하게 만들어버렸대.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거야 여주, 알겠지? 도영, 네 이름을 떠올릴 때면 나는 많은 걸 기억해내. 나는 모든 걸 알아.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너는 왜 그렇게 말해야 했는지. 그렇지만 말야, 그 좆같은 보스가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댈 때면, 나는 아무것도 모르게 돼. 네 마지막 눈동자가 떠올라서일까, 여주, 눈 감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던 네 눈동자가 떠올라서일까,
수많은 사람들 속 왜 너와 나여야했을까, 아득한 총성과 함께 빛을 잃었던 나의 햇님과 달님, 나에겐 더 이상 내려올 동앗줄이 없었지. 그저 네 눈동자만, 네 까만 눈동자만이 내게 있었지.
#3.
셋
이거 먹을래? 그렇게 물으면 너희는 항상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배가 부르다는 둥, 그걸 안 좋아한다는 둥, 아직도 내가 저들 말이면 무조건 믿는 줄 알지. 이 놈의 노란 장판 감성 탓인지, 정재현은 곰팡이가 핀 흰 옷을 샤넬 에디션 같지 않냐며 꾸역꾸역 입고 다녔고, 서영호는 털면 책벌레가 우수수 떨어지는 영어 사전을 성경처럼 아꼈다. 야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난 짬짜면. 겉보기엔 멀쩡한 중국집,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안다면 아무도 속 편하게 못 먹을 걸.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민이 짬뽕이냐 짜장면이냐 인 너희들은 죽어도 모를걸.
정재현은 주로 사람을 홀렸고, 서영호는 손을 놀렸다. 서영호가 신호를 주면 나는 그걸 갖고 죽어라 뛰었고, 지갑 안에 만원이라도 든 날엔, 그 지갑을 태우며, 지갑의 주인에게 미안해하며 우린 김사장에게 돈을 넘겼지. John Suh, Jay Jung, 그리고 Jane kim. 얘네가 내가 아끼는 애들, 김사장은 우릴 제 지인들에게 소개했고 우린 흔하디 흔한 이름 속에 진짜 이름을 숨기고, 감정도 숨기고, 굶주림도 숨겼다. 셋이면 제인이든 존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열일곱이 되던 이듬해 봄, 돈만 훔치던 우리들은 약을 팔았다. 김사장은 수완이 좋은 우릴 아꼈고, 그래서 이런 큰 돈을 만지게 해준다고 했다. 그게 정말 "만지기만 하는 것" 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김사장의 무릎 위에 앉아 코카인이니 마리화나이니 하는 것들을 피워야했고, 집에 돌아오는 밤이면 정재현은 소리 죽여 울었고 서영호는 영어 사전을 한장씩 찢었다. 여주, 내가 이거 다 찢으면 우리 도망가자, 서영호는 그렇게나 아끼던 영어사전을 매일 일곱장씩, 어떤 날은 열장 씩 찢었다. 500쪽이나 되는 그 책을 많이, 빨리 찢으면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닐 텐데.
그 날도 그냥, 뒷골목에 떨어진 홍합 껍질이나 주워먹던 열여섯의 겨울 같았다면 좋았으련만, 내 환각이 심했던걸까, 아님 정말 경찰이 들이닥친걸까? 일어나야 해, 여주야, 제발 정신 차려봐, 저 멀리로 사라지는 김사장의 뒷 모습과,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너희를 본 나는, 그냥 콱 너희의 손을 물어버릴까 생각했다. 셋이면 될 줄 알았는데. 셋, 셋. 자꾸만 목구멍에서 울음이 비집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