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
처음 배운 사자성어 중 경수에게 가장 와 닿던 말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지만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항상 되뇌었다. 사랑 대신 폭력으로 얽힌 가정에 어려운 형편. 단지 남이 보기에 안쓰러운 제 처지가 노력한다고 해도 달라질 수 없는, 또 자신이 특별하지 않은 존재란 걸 일깨워주는 아주 당연하게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라고 생각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색이라곤 온통 어두웠고 어두운 주변에 그저 조금씩 조금씩 잠식되어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인정하기 싫었기에 안 좋은 과거쯤은 어쩌면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경수는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도 검게 물든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부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에.
투둑투둑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 끈적거리며 들러붙는 불쾌함이 감도는 방에서 경수가 더운 숨을 헐떡였다. 그 습한 온기가 방을 더욱 습하게 만드는 듯 몸을 감쌌다. 온몸의 힘이 빠지는듯한 느낌에 간신히 떨리는 손을 들어 옆에 놓인 물컵을 들어 올린다. 컵 옆에 있는 약통에서 한 움큼 약을 쥐어 입에 털어 넣고 물로 넘긴다. 숨겨도 결국에는 다시 눈앞에 보이는 약통도 이젠 거의 바닥이 보였다. 하얀 약통을 보기 싫어 숨겨도, 때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그 처지가 웃겼다. 붉게 올랐던 열이 조금씩 식어갔고 평소와 같이 돌아오자 기분마저 식어내렸다. 그대로 경수는 맨바닥에 털썩 누워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봤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습한 반 지하방은 이곳저곳 곰팡이가 거뭇하게 번져있었다. 방 모서리를 검게 물들였던 곰팡이를 몇 번 닦아내기도 해봤지만 제 노력과는 다르게 점점 크게 번지는 꼴이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차피 달라질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눈을 감았다.
항상 그렇다. 자주 그렇다. 그렇지 않다. 관계없는 항목이라고 선택지를 줬던 종이에 쓰인 질문은 자신이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하던가 자살을 시도해본 적이 있느냐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펜을 잡은 손에 답이 있었다. 셔츠 안으로 슬쩍 내비치는 상처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한 줄씩 늘어날 때마다 짙어지는 자괴감. 도움이 필요했다. 고작 종이에 쓰여있는 말들이 왠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는 상대라고 느껴졌다고 설명해야 했나.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하소연이라 생각한 나머지 너무 솔직한 게 탈이었다. 아무 문제 없다는 반 아이들의 결과 대신 교무실에서의 호출은 너무 솔직하게 표현했던, 자신의 답지 않은 순간의 실수였다.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있느냐며 시작된 상담엔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고작 무생물을 대화 상대로 인식했던 경수였지만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람 앞에선 제 깊고 어두운 부분까지 보일까 항상 조심스러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입을 열지 않았던 경수를 자신이 해결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자리에 돌아온 후 경수는 말없이 또래상담이라고 적힌 신청서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재잘재잘 생기 넘치는 반 아이들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중하던 경수의 손에 쥔 종이를 앞자리의 주인이 낚아챘다. 백현이었다.
" 야야. 도경수 뭐 보냐? "
백현은 한 손에는 빵 봉지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론 낚아챈 종이를 눈으로 훑는다. 빵 한 입을 크게 물곤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세 개째 무리 없이 백현의 뱃속엔 거지가 몇 마리가 살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네 번째 빵마저 마지막으로 베어 물곤 글의 요지를 파악한 백현이 경수에게 다시 종이를 건넸다.
" 이거 신청하려고? "
" 아직 생각 중이야."
백현이 입을 우물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듯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나 이거 해봤는데 괜찮더라. 막 앞에 과자도 있고 시간도 때우고... 어, 한번 해봐 "
" ..상담하면 무슨 말하는데?"
" 여자친구나 막 학업 이런 거? 그냥 친구랑 대화하는 것처럼 뭐, 이런 거랑 똑같지 "
말을 하며 손에 묻은 크림을 쪽쪽 빨던 백현은 배고프다며 배를 문지르며 다시 교실 밖으로 나갔고
아아. 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거린 경수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잠시 후 수업이 시작되는 종이 울리고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아이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백현은 간신히 빵 봉지 몇 개를 안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경수의 머릿속은 수업시간 내내 상담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 가득했다. 듣는 둥 마는 둥 수업시간이 끝이 나고 책상에 엎어진 경수는 이제야 주변 소리를 귀에 담았다.
" 아아~ 내 얘기 좀 들어봐봐."
" 왜 무슨 일인데? "
" 어제 그 내 썸 있잖아. 왜 내가 예전에 말했던.."
쉬는 시간이 시작됨과 동시에 아이들은 다시 모여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그 무리에 어울리지 못한 경수는 그저 대화라는 자체에 동경심을 품기에 그쳤다.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아니 그 상대를 만드는 것조차 두려웠다. 자신을 가까이하고 어두워질까 봐.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음에도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에게 너무 밝은 아이라고 생각했기에 경수는 백현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설령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도 나아질게 없었기에 애초에 기대를 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학교가 끝나고 하나둘 친구를 끼고 하교하는 풍경마저도 경수의 자리는 없었다. 유일하게 가까운 자리와 밝은 성격으로 말을 섞던 백현은 진작부터 같이 하교하는 다른 반 친구가 반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듯 혼자 걷는 길도 외롭지만 괜찮다고 여겼다.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향하면 도착지가 행복할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길수록 생기를 잃는 길을 따라 한 발자국 두발자국. 주변이 조용해질수록 풍경은 경수가 생각하는 자신과 어울리게 변해갔다. 무너져내린 담벼락과 복잡한 골목길, 깨진 창문 안으로 어지러운 폐가를 지나 끝도 없는 계단길. 그 길을 걷고 있으면 발걸음에 맞춰 약통의 약이 굴러다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계단이 끝나기 전 골목을 돌아 나오는 녹이 슨 초록 대문을 열면 보이는 또 다른 계단. 불을 켜지 않으면 제대로 내려가기도 힘든 그곳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있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습해지는 공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한계단 두 계단 천천히 내려가던 경수는 더 이상 발을 디딜 계단이 없자 몸을 돌려 작은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문을 열어도 빛이라곤 없는 어두운 집안. 문 옆의 축축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자 그제야 안을 볼 수 있었다. 빛이 들어와도 생기라곤 없는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에 서늘한 온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어수선한 집안 꼴은 오래된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연상케 했다.
" 다녀왔습니다."
가구라곤 딱히 없는 집안에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다녀왔다고 인사를 해도 이제는 받아줄 사람이 없었다. 경수는 한숨을 짧게 내뱉고 신발을 벗었다.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단칸방 한쪽에 자신을 반겨주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다. 적어도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해줬던 여자. 경수의 어머니였다. 존재 자체로 말없이 아버지와 자신의 위로가 됐던 어머니는 더 이상 없었다. 건강하게 지내라는 쪽지 한 장을 마지막으로 더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어머니를 찾겠다고 돌아다니던 아버지의 손엔 술병이 잡혔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술 냄새가 진동했다. 며칠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이 되어가면서 지쳐가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을 탄 그릇을 깨 부쉈고 사진과 옷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 여자의 흔적이란 말을 되뇌며 두리번 거리던 아버지의 눈에 끝내 경수가 비쳤다. 그렇게 주변이 한층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자신을 때리면서 눈물을 보였다.그걸 보는 경수는 맞아 멍들면서도 이해하려 노력했다. 제 몸보다 괴로울 아버지의 마음을.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나와 다르지 않으니 이해해야 한다고. 몇 번의 반복으로 하얗던 피부에 퍼런 멍이 번지고, 끝내 붉게 물들이자 그제야 거칠게 닿던 손길이 멈추고 어깨 부분이 젖어들었다. 그렇게 갑자기 경수를 껴안고 목놓아 울던 아버지였지만, 그마저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몸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깨버린 어머니의 그릇. 그 기억이 조각이, 외로움이 경수의 몸을 상처냈다. 하나둘 생긴 상처는 아물고 터지고 반복하며 손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던 손목의 상처가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가방을 내려둔 낡은 나무 화장대를 손으로 쓸었다. 금이 간 거울과 먼지가 쌓여있는 화장대. 유일하게 버리지 못한 마지막 미련, 유일하게 남은 엄마의 흔적. 칠이 벗겨진 서랍엔 하얀 약통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먹던 약, 아들에게 주고 간 쓸모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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