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끝에 닿는 진흙이 무르기 그지 없다. 요 근래 이곳에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포병을 따르는 시종의 발걸음이 땅 아래로 녹진히 녹아들었다.
벌써 새벽녘이 트고 있었다. 시종은 소맷단 아래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었다. 네 단으로 고이 접힌 밀서였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 홍빈이 시종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도착하면 펴 보거라. 제 주인은 묘한 미소를 띠고서 그리 명령했었다.
시종은 제 눈을 반쯤 덮은 가리개를 조금 걷어낸 뒤 밀서를 펴 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먹물 번진 글자들이다.
'한상혁의 생사를 확인하여 살아 있거든 죽여라.'
목구멍을 차고 드는 숨덩이에 시종은 아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제 자리에서 머물렀다.
'반드시. 죽여라.'
연유가 무엇인지는 저도 알지 못한다. 정택운이라는 자와 연관된 일에 관여하려는 까닭을 알지 못해 답답하다. 자꾸만 불길한 직감이 솟구쳤다.
홍빈이 처음 낯선 자를 궁 안으로 끌어들였을 때부터 감은 좋지 않았다. 정택운의 희여멀건한 낯짝에 스치는 기운이 어둡기 그지 없었기 때문일까.
제 아무리 악독하고 지독한 주인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제 윗분인 것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시종은 이대로 발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내었다.
청하, 당신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종착점은 어디란 말입니까.
-
"살아있는 것이 확실하오?"
"그렇소. 김 정승 대감의 부인을 살해한 양반 살생 혐의요."
"양반을 살생한 죄는 무겁소. 참형을 당하는 것이 옳은 방도 아니오?"
시종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포병의 미간이 좁혀졌다.
양반을 죽인 죄는 분명 참형으로도 모자라 시체를 찢어 까마귀 밥으로 던져도 모자랄 판임에 틀림 없었지만, 하나의 문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정승 댁 하나뿐인 따님이 막고 있소만."
"정승의 하나뿐인 딸? 아무리 그렇다 한들 감히 아녀자가 형량에 관여하는 것인가."
"어쩔 수 없소. 한상혁이 제 어미를 죽이지 않았다며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써 대는데, 무슨 방도가 있단 말이오?"
곧 눈앞에 나무 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포병은 놀리던 입을 멈추고서 헛기침을 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시종은 눈알을 한 번 굴리고서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코앞으로 훅 끼치는 횃불 기름 향이 역했다.
옥 내부는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진흙으로 덧발라진 벽에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스며있기도 했다.
포병은 주위를 슥 훑어보았다. 곧 이어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네 번째요. 그곳에 한상혁이 있을 것이오."
"……."
"전할 말만 한 뒤 재빨리 나와야 할 것이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소."
"알았소."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희끗한 인영으로 보아 사람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포병이 문 밖으로 나가고, 시종은 다시 천천히 걸었다. 옆구리에 찬 검이 횃불에 비치어 형형하게 빛났다.
-
꽃이 지기 시작했다. 봄은 달콤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빨리 닳기도 하는 법이다. 사계 중에서 가장 이르게 지는 것이 봄이었다.
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는 꽃잎이 아쉬워, 택운은 괜히 제 손가락 끝을 만지작대었다.
이내 꽃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제는 제 옆구리로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곳에는 여태껏 본 적 없는 귀한 장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학연이 하사한 비옥도(斐玉刀)였다.
'이 검은 내가 가진 것들 중 단연 아름답다. 최고 아름다운 옥으로 깎아내린 검이지. 너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비옥도를 하사받은 것은 난데없이 검을 배우겠다며 말을 꺼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택운은 놀란 눈으로 학연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귀한 검이었다. 저에게 차고 넘칠 정도로 과분했기에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
'이런 진귀한 검을 받겠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똥통에 빠진 나무검이면 되겠느냐.'
'…….'
'농이다.'
시덥잖은 농을 치고서 학연은 다시금 말을 이었다.
'받거라. 네 꿈을 돕고 싶어 그런다. 내겐 차고 넘치는 것이 재물이니 너에게 하나쯤, 의미와 함께 부여해도 별 상관은 없다.'
어쩔 수 없이 건네받은 검이 이제는 저와 한 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태양의 빛을 꼭 빼닮은 온기가 옆구리를 따스히 보호해주고 있다. 택운은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칼집을 쓸어보았다.
이어 택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비옥도를 빼어들었다. 가히 흠집 하나 없는 칼날이었다.
과연 이 검으로 베게 되는 것은 무엇일지.
칼 끝에 매달릴 운명은 무엇일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시원한 칼날과는 달리 택운의 심중은 답답했다.
-
"방금, 뭐라고 했는가?"
"태양……."
"내가 묻질 않느냐!"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김 무사의 소식통이 전해지지 않아, 그를 뒤쫓는 은자들을 보내었사온데……."
"헌데."
"그것이…. 김 무사의 참혹한 시체가…."
학연의 주먹이 옥좌를 내리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입꼬리가 경련했다.
감히 태양의 무사를 베어 문 자가 있단 말이냐. 틀어 문 잇새에서 흐르는 음성에 김 내관이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황송하옵니다. 모두 제 불찰이옵니다!"
"…김 내관이 무슨 불찰이 있단 말인가."
"소인, 감히 한 가지 아뢰옴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말해보게."
고개를 들지 않은 김 내관과 학연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말은 오가지 않았으나 이미 두 사람 모두 눈치를 채었다. 학연의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홍빈, 네가 감히.
네가 감히…….
"김 내관."
"예, 태양."
"은자들을 보내게. 지금 당장."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태양."
"죽을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움직여야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
한상혁에게 어떠한 일이 생겨서는 아니 된다.
학연의 감기는 눈 앞으로 택운의 모습이 잠시 동안 스쳐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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