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백도]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上-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a/1/1/a1133f31b760d904a97441ff48f0b72c.jpg)
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것 봐, 그만 좀 일어나지?”
“…….”
“얼른 일어나. 언제까지 잠만 자고 있을 거야? 시간 없어 죽겠는데.”
누군가 경수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에 경수는 아직 잠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참 오랜만에 편안하게 잔 듯한 기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곳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세상이었다. 그 곳에서 숨 쉬고있는 경수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하얀. 그런 곳.
“도무지 모르겠단 표정이네?”
뒤에서 킥킥대는 목소리로 누군가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 경수가 뒤로 돌아보았을 땐. 무서우리만치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쌔까만 셔츠와 바지를 입고 서서는, 경수를 바라보고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허리춤에 받치고 있던 손을 경수 앞으로 뻗는다.
“누구세요?”
“백현.”
“백현?”
“ 응, 넌 도경수 맞지? 2014년 5월 28일 마주오는 트럭을 피하긴 커녕 트럭과 꽝 부딪혀 죽기를 바라던 도재현과 최은경의 외아들자, 신연고 2학년 11반 15번 도경수. 맞지?”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날 그렇게 잘 알아?”
“나?”
경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단 눈으로 말을 잇던 백현을 보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오싹해진다. 아무리 봐도 경수는 백현을 처음 본다. 그런데 이상한 건 경수에 대해 줄줄 읊는 백현의 모습을 보고있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백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백현의 얼굴과 이름은 경수의 기억 속에 존재하질 않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흠, 뭐라고 말해야 이해가 빠를까. 난 니가 태어났을 적부터 쭈욱 너를 지켜봐 온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럼, 스토커. 뭐 그런 건가?”
“스토커? 하하. 따지고 보면 그런 면이 없지않아 있지. 난 너에 대해 모르는게 없으니깐.”
“미친 새끼. 당장 경찰서에 잡혀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꺼져.”
“흐음, 니가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되나 본데. 도경수.”
“뭐, 뭐! 할 말 있어?”
“넌 곧 죽어.”
백현의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온 차분한 목소리에 흥분해있던 경수는 마치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멈칫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순간 경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빛바랜 영상들. 달려오는 트럭과 그 앞에 서 있던 경수. 그리고 그런 경수를 바라보며 미친 듯 절규하며 소리치던 세훈. 차갑게 쏟아지던 빗줄기를 맞으며 도로 한 가운데로 튕겨진 경수 몸.
그래. 나 트럭이랑 맞부딪혔지? 그래, 그랬어. 아주 세게 부딪혔었어.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뭐지?
“궁금하지? 트럭이랑 부딪혀 곧 죽을 인간이 병원에 누워있긴 커녕 이렇게 스토커 같은 녀석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지? 다들 처음에 그렇게 어리둥절해 해.”
마치 경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경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의 말을 장난스럽게 건네던 백현은 빙긋 웃으며 경수를 일으켜 세운다. 영문도 모르고 백현의 손을 잡고 일어난 경수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이 곳은 알수없는 방이다. 끝이 보이지않는 하얀 방. 어딘지 모를 하얀 방. 이쪽 저쪽 살피며 경수가 우물쭈물 대는 사이. 백현은 손에 들고있던 노트를 뒤적거리면서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고, 경수는 무의식적으로 백현의 뒤를 따랐다. 왠지 백현을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경수를 엄습했기에 경수는 허둥지둥 백현을 따라 걸었다. 길이라곤 보이지않는데 백현, 이 녀석은 뭘 알기라도 하는 건지 좌회전, 우회전을 해가며 요리조리 걸어갔고 경수는 그런 녀석을 놓칠 새라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그리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던 백현.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작은 입술을 열어 경수에게 오물오물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죽으려고 한 거야?”
백현의 갑작스런 물음에 경수는 반문했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말해줘. 지금 내가 있는 여긴 도대체 뭐야. 나 지금 꿈이라도 꾸는 거야?”
최대한 위협적으로 힘주어 말했지만 백현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더니 고개를 들어 위를 두리번 대며 살피기 시작한다. 침을 꿀꺽 삼키며 백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데 멀뚱멀뚱 주변을 살피던 백현은 갑자기 이가 드러나게 씨익 웃으며 경수에게 말한다.
“여긴 말이야.”
“…….”
“삻과 죽음의 중간 통로야.”
“무, 슨 말이야.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달란 말이야.”
“잉? 나 학교 다닐 때 수학이랑 과학은 젬병이었단 말이야.”
“장난 치지 마!”
경수가 소리를 꽥 하고 지르자 백현은 경수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움찔 하더니 뚱한 표정을 짓는다.
“화내지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제발 말해줘. 여긴 어디야? 그리고 넌 또 누구고!”
“사람에겐 시간이 주어져.”
“…….”
“죽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고 준비 할 시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직각점으로 느끼지.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죽기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한다지 않아? 그것과 같은 이치야. 다만 너는.”
“나는?”
“너무 갑자기 죽어버리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시간이 없었기에 이렇게 하루를 주는거야.”
진지하게 말을 잇는 백현의 얼굴을 보는 경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긴장할 때나, 겁이 났을 때 늘상 하던 버릇처럼 왼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알겠어? 여기가 어떤 곳인지. 난 니가 궁금해하는 것을 대답해 줬으니 이젠 니가 할 차례야.”
“…….”
“넌 죽으려는 이유가 뭐야?”
꿈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뒤, 이어진 백현의 물음에 경수는 공허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며 중얼대듯 말했다.
“죽고 싶으니까. 사는 게 힘이 들어서, 살아갈 기운이 없어서.”
“또?”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아서.”
“끝이야?”
눈을 치켜떠서 백현을 올려다 봤다. 한심하다는 듯 경수를 보던 백현의 눈빛은 점점 무섭게 가라앉는다.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더이상 뭘 바래?”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데에 갖다 붙이는 변명은 정말 멍청하고, 한심하기 짝이없어. 너 역시 다를 건 없구나?”
“뭐?”
“어차피 너에게 주어진 목숨이었으니까 어떻게 굴리든 나는 상관은 없겠지만, 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난 니가 조금 가여워 보여서 말이야.”
“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두 눈을 부릅뜨고 백현에게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대었다. 모든 걸 알고 있다면서,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면서 그런말을 하는 백현에게 경수는 속에서 꿈틀대던 속을 털어놓듯 원망스럽게 악을 뱉었고 그런 경수의 모습에 백현은 못 볼 것을 본것 마냥 얼굴을 구겨버린다. 그리고는 들고있던 노트를 동그랗게 돌돌 말더니 경수의 이마를 한번 통 하고 가볍게 때린다.
“제발 흥분 좀 하지마. 넌 어렸을 때부터 그 놈의 욱하는 성격이 문제였었어.”
“…….”
“일곱살 때던가, 여덟살 때던가 그 욱하는 성질머리 탓에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간 적 있었지?”
“허,”
“전교 1등이라 공부 밖에 모를 거라 무시하는 아이들의 놀림 탓에 김종인인지 뭐시깽인지랑 홧김에 같이 밤을 보낸 적도 있었고. 안 그래? 그 성질 머리 좀 고쳐. 그러니 될 일도 안되지.”
“아는 척 하지마.”
“가엾은 우리 경수.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더러운 성질머리로 살아가면.”
백현은 경수에게 다가와 머리를 쓸으며 말은 한다. 이 녀석 말하는 게 어지간히 짜증나는 게 아니다. 경수는 자신의 머리를 쓸던 백현에 손을 쳐냈다.
“뭐?”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현의 목소리 톤이 한 층 높아진다. 분명 내가 반박을 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을 너무도 싫어하는 내가 무어라 대들어야 하는데. 경수는 이상하게도 백현 앞에서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마법에 걸린 건지 아니면, 이 녀석의 말에 정말 경수가 할 말이 없는 건지. 백현은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하더니 입을 연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멋대로 목숨을 버리는 건 안 돼.”
단호한 어투였다. 백현의 차가운 눈빛 탓일까 아님, 경수를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것 마냥 대하는 백현의 태도 때문일까. 어느새 경수의 눈은 뜨거워져 있었고, 부풀어 터질 듯이 빨갛게 핏줄이 서 있었다. 경수는 꽁하고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한을 풀어내듯 오열하며 백현에게 화풀이 아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니가 뭘 안다고! 니가 나에 대해서 아무리 잘 안대도, 니가 아무리 잘났어도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니가 나처럼 살아봤어? 학교 다니면서 친구라곤 하나없이 매일 도시락 혼자 먹어봤어? 집에서 매일 같이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며 증오하는 부모님 밑에서. 나를 낳은 것을 후회하는 부모님 밑에서 살아 본 적 있어?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 당해서 눈물 흘려 본 적있냐고!”
“…….”
“없지? 씨발, 그래 나 남자랑 몸 섞어봤어. 갈 때까지 가서 내 몸도 진짜 더러워. 그래도, 지들이 나한테 그렇게 대할 자격 있냐고. 왜, 왜! 잘 살아보려는 날 이렇게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 왜 살고 싶지 않게 만드냐고 왜!”
“…….”
“내가 뭘 잘못했는데.”
“…….”
“난 뭐 이렇게 살고 싶은 줄 아냐고.”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눈물이 바보처럼 기어코 터지고 나와버렸다. 볼을 타고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눈물 탓에 눈 앞에 무언가 씌어진 것 마냥 세상이 뿌옇게 흐려졌고 경수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정 받고 싶어?”
“뭐?”
“널 그렇게 비하해서 나한테 동정 받고 싶냐고. 넌 불쌍하니깐 죽을 자격이 있다. 이거야?”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처럼 백현의 목소리를 차가워져 있었다. 그런 백현의 태도는 이미 흥분한 경수를 더욱 더 미치게 만들었고, 경수는 분에 차서 아무 말 못한 채 눈물만 흘려댔다.
“도경수.”
“나쁜 새끼. 씨, 나쁜 놈.”
“나한테 그럴 것까지 있냐? 나 참, 야. 일어나.”
“백현새끼. 흐, 너도 똑같아.”
“하, 이것 봐. 아직 어린 애라니깐.”
백현은 터져버린 울음보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수를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끌고간다.
“어, 어디 가는 거야!”
“죽기 전에 너에게 보여 줄 게 있어.”
“뭐야, 싫어. 싫어, 안갈래.”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지만.”
“…….”
“멋대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리는 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짓이야. 사람은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타고 태어났으니깐,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서 받을 수 없어. 누구도 마음대로 죽을 자격은 없단 말이야. 알겠어?”
화가 난듯 하지만 슬픔이 섞인 듯, 백현의 목소리는 참 아파보였다. 경수는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을 닦고 조용히 백현이 이끄는 곳을 천천히 따랐다. 그 곳이 경수를 어떻게 변화 시킬지 조금도 모른 채 약간은 흥분을 한 모습으로.
*
백현의 팔에 이끌려 한참을 걸었을 때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짐과 동시에 경수와 백현이 선 곳은 매케한 약 냄새가 진동을 하는 병원으로 바뀌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의사들, 그리고 쉴새없이 실려오는 환자들이 가득한 응급실인 것을 확인한 뒤, 경수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지만 조여오는 엄청난 손 힘으로 경수의 팔을 끌어다 웬 침대 앞에 경수를 데려다 놓더니 잡고 있던 팔을 놓아준다. 얼굴은 허여멀건 한 것이 가냘프게 생겨가지고 꼴에 남자라고 손 힘은 어찌나 센지 경수의 손목엔 백현의 발간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경수 반대편 손으로 손목을 문지르며 백현을 매섭게 한 번 흘겨본 뒤 백현이 데려다 놓은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자세히 살폈다. 머리며, 팔이며, 온통 깁스 투성이에 핏자국까지.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울부짖는 소리들과 화자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응급실 구석 침대에 누워 숨을 가쁘게 내쉬며 홀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경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곧 경수의 눈은 다시 한 번 그 남자의 얼굴로 향했고 무척이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설마…
경수의 동공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순간 경수의 옆을 한 젊은 의사가 지나쳐 다가와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이리저리 살핀다. 조심스레 이리저리 살피던 의사는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꽤나 화가난 듯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소리친다.
“김 간호사, 도경수 씨 보호자 아직도 안들어 온 거야?”
“저기, 그게. 함께 온 친구가 연락을 했다곤 하는데 아직.”
“혹시 이 환자 부모님 안계신 거 아니야? 일단 친구보고 들어와서 수술 동의서 쓰라고 하고 친구네 부모님 오시라고 전해. 출혈이 이렇게 심한데 도대체 어쩔 작정인 거야!”
“하지만 박 선생님이 보호자가 오지 않으면….”
“사람이 죽어가는데 절차가 문제야? 얼른 마취과에 연락하고 비어있는 수술실로 바로 데리고 들어가서 바로 수술 할 준비 해. 내가 직접 들어갈 거야.”
“네.”
경수였다. 침대에 누워 힘겹게 산소 호흡기에 꺼져가는 목숨을 지탱하고 있던 그 환자는 바로 경수였다. 멈추지 않는 피 때문에 이마와 목, 가슴에는 여려 겹의 거즈로 싸여있었고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해도 깨끗한 모습으로 다려져 있던 교복 역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찢겨있었다. 얼굴과 팔, 다리에 난 끔찍한 상처에 경수는 차마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엔 아까 그 간호사와 세훈의 모습이 보였다.
“오세훈 씨? 도경수 씨 친구 분으로 오신 분 맞으시죠? 얼른 수술 동의서 좀 써주세요. 지금 당장 수슬 들어가야 하니깐 빨리 부탁 드릴게요.”
“경수, 경수 괜찮은 거죠? 살수 있죠?”
“일단 수술 동의서부터 쓰시고 부모님께….”
“죽는 거 아니죠? 그거 먼저 말해 주세요.”
“얼른 쓰셔야 해요. 얼른요! 시간이 없어요.”
세훈은 떨리는 손으로 수술 동의서를 써내려갔고 그때까지도 경수에 침대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외롭게 혼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자 경수는 이상하게도 화가 먼저 치밀어 오른다.
이미 오후가 지나가서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는데, 사고가 난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순간 허탈함에 웃음이 흘러나와 고개를 숙인 채 쿡쿡대며 한참을 웃다 돌아서 말없이 경수를 바라보고있는 백현을 끌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웃기지. 내 옆에 아무도 없고, 의사가 나보고 고아 아니냐고 묻는거 봤어?”
“…….”
“아, 어차피 죽을 건데 수술은 왜 하나 몰라. 그치. 하긴 엄마나 아빠가 오면 말릴지도 몰라. 둘 다 돈에 환장하거든. 나 왜이렇게 웃기냐 아, 정말. 코미디야 코미디.”
“웃을 거면 눈물을 닦든가, 아님 웃지말고 울기만 하든가.”
“누가, 누가 운다고 그래.”
백현의 딱딱한 목소리에 경수는 콧방귀를 한 번 뀌고 앞서서 걸어나왔다.한 걸음이라도 일분, 일초라도 빨리 병원에서 멀어지고 싶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말없이 뒤에서 따라붙던 백현은 갑자기 경수의 어깨에 팔을 걸치더니 노래를 흥얼 거린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야.”
“…….”
“비가 와도 모진 바람 불어도 다시 햇살은 비추니깐. 눈물나게 아픈 날엔 크게 한 번만 소리를 질러봐 내게 오려던 연약한 슬픔이 또 달아날 수 있게.”
“노래 잘하지도 못하면서.”
“사실은 니가 더 못하잖아.”
“아는 척 하지마. 나 노래 잘해.”
“우길 걸 우겨라. 난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니깐?”
“백현아, 넌 누구야.”
경수에 대해 모든 걸 아는 듯한, 아니 모든 것을 아는 백현. 하지만 경수는 백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스토커. 사랑의 스토커.”
“…….”
백현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경수는 픽 하고 웃어버린 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갑자기 백현이 경수의 팔을 세게 끌어당기더니 빙긋 웃는 얼굴로 경수에게 말한다.
“시간이 없어. 얼른 따라와. 너가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
“어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도 되겠지?”
“싫어, 아. 병원은 죽어도 싫단 말이야.”
“싫으면 시집 가든가. 빨리 따라 들어와.”
병원 밖으로 나서던 경수의 걸음을 돌려 백현은 다시 경수의 팔을 끌어당겨 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이번에 가려는 곳은 응급실이 아닌지 응급실을 지나쳐 빠르게 걷는 백현. 백현을 놓칠새라 백현의 옆에 바싹 붙어 따라가고 있긴 하지만 경수의 시선은 응급실 자신의 침대 옆에서 안절부절 하고있는 세훈에게로 향했다.
“여기야.”
빠르게 움직이던 백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아이들이 가득한, 그것도 머리가 모두 민둥산인 아이들이 가득한 소아암 병동이었다. 백현은 경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소아암 병동 앞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들어가는 것을 내키지 않아하는 경수를 억지로 끌고 수 많은 병실 중 한 곳을 골라 들어간다. 워낙에 애들을 좋아하지 않은 성격 탓인 것도 있었지만, 사실 경수는 투병을 하는 꼬마 아이들을 무척 싫어했다. 싫어했다기보다 작은 몸으로 병에 맞서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가여워서, 마음이 안쓰러워 보기 싫었다고 할까. 그다지 내키지 않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백현에게 이끌려 걷고 있는데 백현의 발걸음이 한 병실앞에서 멈춘다. 들어가보라며 턱짓을 하던 백현을 한 번 바라본 뒤, 경수는 최대한 인상을 구긴 채 머리만 빼꼼히 병실 안으로 집어넣었다.
“욱….”
경수도 모르게 병실 안에서 풍기 역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올라와 양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빼냈다. 하지만 백현은 경수의 얼굴을 차가운 손으로 잡아 병실 쪽으로 돌려논다.
“왜이래, 이거 놔.”
“저 쪽을 봐.”
“싫어. 나가자, 여기 싫어. 기분 나빠!”
“적어도 너처럼 죽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없어. 소중한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아이들이지.”
“자꾸 비꼬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단 거 알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알았어. 알았어.”
백현의 비웃는 듯한 웃음에 경수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한순간 다정하게 다가와도 싸늘해지는 백현. 부드럽게 말을 잇다가도 비위가 상할만큼 말을 비꼬는 백현. 정말 백현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말해주고 싶은 것이 뭘까.
“저 쪽이나 보고 말해.”
백현이 가리킨 곳엔 많이 먹어봤자 다섯살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인 듯 보이는 낡고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얼굴을 맞대고 기도를 하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꼬마 아이는 작고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맞잡고 핏기 없는 입술을 열심히 놀리며 진지한 얼굴로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너무도 작아 잘 들리지 않자 경수는 천천히 그 아이가 앉아 있는 침대를 향해 한 발자국씩 발을 옮겨갔다.
“하느님. 자꾸만 엄마가 울어요. 내일 수술인데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니깐 마음이 너무 아파요. 제가 빨리 낫지 않으면 엄마가 매일매일 울 거예요. 그럼 제가 너무 슬프니깐 하느님이 도와주세요.”
“…….”
“하느님, 저 내일 수술 잘되게 해주세요.”
“…….”
“저를 꼭 살려주세요. 꼭 나아서 내년에 학교 가고 싶어요. 꼭 살려주세요. 바쁘시겠지만, 이번 소원만 들어주시면 정말 다시는 소원 빌지 않을 테니까 제 소원 꼭 들어주세요.”
아이의 기도에 아이에 엄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끌어 안았고 그 모습을 보기 힘든 듯 아이의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더니 허공을 향해 무거운 한숨만 계속해서 토해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수 역시 목 끝까지 아련함이 차올라 코 끝이 찡해졌다.
경수는 천천히 백현이 서 있는 쪽으로 돌아섰고 백현은 픽하고 웃더니 이제 됐다는 듯 나오라는 손짓을 하며 먼저 병실을 빠져나간다. 경수는 얼른 백현을 따라나가 백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어떻게 돼? 저 애 죽는 거야? 넌 알잖아. 그치? 죽어? 저 애 죽어?”
“글쎄.”
“나한테 저 꼬마를 보여 준 이유가 뭐야?”
“글쎄.”
“글쎄. 글쎄. 그 대답 좀 그만해. 확실하게 대답하란 말이야!”
“뭐든 확실하게 결정 된 것은 없어. 사람들이 믿고 있을 뿐이지. 자기 믿음이야. 안그래?”
이해 하기 힘든 말을 하던 백현. 백현은 경수에게 왜 그 꼬마를 보여 준 것일까. 죽음을 앞에 두고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도 있는데, 너는 복이 터져 그 사람에겐 너무도 간절한 그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고 했다. 뭐 이런 뜻인가. 백현이 멀어지고 있는대도 경수는 쉽게 병실 앞에서 걸음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아이의 기도가 안쓰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너무도 부러워서. 돈이 많은 것도 겉으로 부유한 것도 아니어 보이지만 함께 삶을 기도 할 수 있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이 있는 아이가 부러워 경수는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된 것 마냥 멈추어 서 있었다.
“얼른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멀리서 희미하게 웃으며 경수를 부르는 백현의 목소리에 경수는 눈가에 맺힌 이슬을 손으로 대충 닦아내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 때 생각난 것은 정말 싫지만 정말 이런 나를 인정하기 싫지만,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었다.
신알신 감사합니다! 읽어 줄 사람 없을 줄 알고 엄청 걱정 했는데 다행이에요ㅠ
앞으로 남은 편들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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