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국지민 |
여성의 고귀함은 풍만한 가슴도 아니고 잘록한 허리도 아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배앓이가 두 손이 덜덜 떨릴 만큼 숭고한 것이다. 아프다며 벽을 잡고 일어날 때의 위태로움은 안아주고 싶을 만큼 간절하며 미간을 망가트릴 때의 도도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세련됨이 흘러나와 간절한 기도를 하게 만든다. 아, 당신의 숭고함에 나의 사랑을. 정국은 어머니의 품을 좋아했다. 따듯하고 나이에 맞게 풍만한 살들이 포근히 감싸 안아준다면 그날의 모든 일을 끝내도 상관없을 만큼. 그런 어머니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태어난 아이가 울부짖었다. 마냥 신기했다. 한 품도 되지 않는 핏덩이가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 것이 나도 이랬을까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형은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줘요. 비록 여성의 숭고함이 부족하지만 나의 사랑을 가득 받잖아요.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에 안았다. 상대적으로 아담한 체구가 정국의 품에 갇혔다. 등을 쓸어내렸다. 정국의 마른 등의 척추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목덜미에 얼굴을 숨겼다. |
| 석진지민 |
남자는 어색했다. 손짓도 행동 끝의 마무리도 심지어 다나까로 끝나는 억양마저. 지민은 왼쪽 손을 턱에 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잘 빠진 몸매에 검은 수트를입고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신어 걸음걸이의 도도함이 풍겼다. 마담에게 다가가 오늘 하루 어땠냐고 묻는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새로운 애들이 들어왔고 수입은 저번 달보다 올랐고 손님도 나쁘지 않다는 온갖 거짓말만 해댔다. 지랄하고 있네. “매번 고맙습니다.” “고마운 건 우리지.” 마담이 가증스럽게 웃었다. 눈 옆의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남자는 앉아있는 지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들어온 것만큼의 걸음으로 나갔다. 화장을 한 번 고친 뒤 앉아있는 지민의 등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아, 아파요! 지민이 벌떡 일어나며 마담을 노려보니 껄껄 웃으며 비워진 룸이나 청소하라며 말했다. “그 남자한테 잘 해. 여기 이번 달부터 아까 온 남자가 관리해.” “언제 그렇게 바뀌었데.” 네가 도망치고 나서 새끼야. 너 잡고 내가 뒷수습하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마담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남자가 고생해서 잡았는데 하는 꼬락서니가 참, 어떻게 뺨을 때릴 생각을 했어? 건달한테 뺨 때리고 숨 쉬는 새끼는 너밖에 없을 거다 어휴.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어떡해. 여기에서 더 일하고 싶지는 않지, 나가려면 빚이 어마어마할 텐데. 쥐새끼 하나 도망간다고 그렇게 큰일인가? 마담에게 엉덩이를 걷어 차여서야 룸을 치우려 도도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찍힐 짓을 하고 다녀요. 어휴.” // 이쪽 길이 원래 지저분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궁창인지는 몰랐다. 이상야릇한 전단지는 길거리를 도배했고 큰 도로 주변에 휘황찬란한 붉고 파란 자극적인 간판들이 번쩍였다. 골목을 걷다 보면 홍등가의 길이 나왔다. 빨간 조명에 어른들의 두드림만 받을 것 같은 문들이 즐비했다. 석진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물었다. 자신이 찾은 쥐새끼 집주인이 앞으로 본인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웃겼다. 손에서 울리는 진동을 확인하니 마담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받자마자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조잘조잘 떠드는 게 꼭 먼저 하늘로 간 어머니와 비슷해 추임새를 넣으며 곱게 듣고 있었다. - 가게 근처면 같이 저녁이라도 먹어요. 앞으로 자주 볼 텐데. - 마침 근처입니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담배를 마저 태웠다. 신호등 맞은편에서 지민이 이어폰을 끼고 멍 때리며 빨간 불을 바라보았다. 사복 차림이 애다웠다. 몇 살이었지. 스물인가 스물 하나던가. 파란 불이 들어오자마자 건너는 지민은 석진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에라이,오늘은 운이 안 좋고만. 석진은 지민의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본 마담은 웃으며 둘을 반겼다. 어서 와, 둘 다. “지민아, 밥 먹었어?” “아니, 왜.” “그럼 같이 가자. 그래도 되죠?” 석진이 끄덕이자 마담은 지민의 팔을 끌었다. 뭐야, 둘이 약속이라도 했어? 내가 끼면 되나. 마담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룸이나 청소하겠다며 겉옷을 벗었다. 석진은 밥이라도 먹고 일하라는 마담의 어머니 같은 뒷모습에 고개를 내리다 눈을 꼭 감고 다시 떠 지민의 팔을 잡았다. 지민이 눈썹 한 쪽을 추켜올렸다. “갑시다. 부탁하는 사람 입장 생각해서라도.” “지민이 너 고기 좋아하잖아.” 이 두 사람 왜 이래? 질질 끌려 나오는 지민은 당황했다. 석진은 지민의 귀 옆에 작게 속삭였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유연하게 행동하세요. 이게 무슨 어린애 행동이야? 지민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석진을 노려보았다. 마담은 기분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방을 확인했다. 지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답했다. “그쪽 핸드폰 케이스나 바꾸시죠. 핑크공주도 아니고 분홍색이 뭡니까?” // 마담의 웃는 소리와 석진의 간간한 응답이 식탁을 적셨다. 지민은 샐러드만 집어먹다 마담이 직접 썰어줄까? 다정한 말투에 팔을 문지르며 한 덩어리 대충 잘라 입에 구겨 넣었다. 고기 맛이 나쁘지 않은지 조금씩 잘라먹는걸 보고 마담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마담이 와인을 부탁하자 금세 한 병을 가져와 석진과 마담의 잔에 따랐다. 지민은 손을 저으며 입가에 간신히 미소를 띠었다. “왜 안 마셔?” “일해야지.” 너 답지 않게.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들이키는 모습이 우아했다. 꼴에 돈 만진다고 자주 와 봤나 보네. 담배를 물고 싶어 혀를 몇 번 씹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에서 나와 제일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필터를 물고 주머니를 뒤지니 라이터가 없다. 뒷머리를 벅벅 긁다 다시 상자 안에 넣고 화장실에 들러 손을 닦고 자리에 앉았다. 석진은 식사를 끝냈는지 와인만 깨작깨작 마시고 있다. “언제부터 이 일 했습니까?” 마치 물어보면 안 되는 질문을 한 것 마냥 조용해졌다. 마담의 칼질이 멈췄고 몰래 핸드폰을 켜는 지민의 행동이 멈췄다. 석진의 눈은 올곧았다. 턱을 괴고 생각하는 척하다 입을 열었다. 열일곱 이였나, 어. 그때 겨울. 태연하게 말하자 마담의 칼질이 유연해지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왜 물어봐.” “궁금해서요.” 옆에 있던 와인을 마시고 난 뒤 텅 빈 잔을 조금 멀리 두었다. 우리 슬슬 갈까? 마담이 가방을 챙기며 일어나자 석진과 지민도 따라 일어났다. 내가 열일곱 겨울날에 뭘 했지. 아버지 뒤꽁무니를 따라 정장을 입었던가. 수능 문제집을 풀다 찢었었나. 차 키를 확인하며 계산을 마칠 때까지 석진은 생각했다. // 마담은 피곤한지 차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지민은 핸드폰을 열어 온 문자를 확인했다. 동갑내기 친구에게 온 문자 세 건, 아는 동생에게 온 문자 두 건, 선배들에게 온 문자 여덟 건. 친구의 문자만 확인하고 다 지워버렸다. 입에 담배를 문 상태로 창가만 바라보았다. 벌써 어두워져 가로등의 불이 유독 환했다. 십 분쯤 가다 골목으로 꺾으면 하얗고 노란 가로등의 불빛이 아니라 발갛고 자극적인 간판들이 즐비할 것을 생각했다. 절로 머리가 아파왔다. 지민이 인상을 팍 쓰자 훔쳐보던 석진이 라이터를 던졌다. “눈치는 있네.” 지민이 불을 켜기 전 문을 열었다. 한 모금 먹고 밖으로 뱉으니 예의는 있네 받아친 석진을 보고 어이없게 웃었다. 도착해 마담을 공주님처럼 안고 들어가는 석진이 근사해 보였다. 멋들어진 정장에 살집 있는 마담을 번쩍 안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 마담을 눕혀놓으니 지민도 따라 들어와 상의를 벗었다. 저기요, 나 아직 안 나갔습니다. “이런 모습 많이 보지 않나?”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곱게 자리 잡은 자잘한 근육들이 몸 선을 예쁘장하게 만들었다. 석진은 벽에 등을 기대고 팔을 꼬았다. 셔츠를 잠그는 손이 짧고 통통해서 아기 같았다. 얼굴도 충분히 애 같은데 손도 애 같네. 버클을 풀어 훌러덩 벗으니 허벅지를 따라 길게 필기체로 박혀있었다. 팔려오는 계집년들 몸에 박는 흉터를 보고 나서야 고개를 숙였다. 너는 왜 팔려왔을까 열일곱의 새 교복을 입고 뛰어다닐 시기에. 평범한 굴레에서 놀지 않고 어긋나다 못해 망가질 것이 뻔한, 그런 허름한 굴레에 굳이 찾아와서. 바지를 챙겨 입고 석진의 앞까지 다가와 생긋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많이 작았다. “문신 잘 박혔지?” “당신네들이 한 거야.” “잘 봐둬. 이런 년놈들 여기 천지거든.” 눈을 맞추며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천지중에 하나가 너다 꼬맹아. 석진은 차를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나 급히 밖으로 나갔다. 지민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방금까지 먹었던 음식들을 다 토해냈다. |
| 태형지민 |
교정을 두르고 있는 나무들의 잎들이 만개하고 새로운 신입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등교한 지 보름.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일 학년 신입생 사이에서 요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작은 음료수를 격하게 내리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소녀들은 그 이야기가 진짜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이 학년 주황머리. 그 오빠 애인이 우리 학교래.” 주황 머리에 신인 아이돌과 배우를 묘하게 닮은 공룡상의 한 학년 선배가 화두에 올랐다. 대화를 들어보니 애인이 없다며 선배의 고백을 차던 게 엊그제였는데 이번 주에는 무려 애인이 있다는 말만 뱉고 고백의 편지를 돌려주었다는 설이 떠도는 것이다. 선배의 고백도 거절하고 일학년 미모의 친구도 시원하게 찬 주황 머리의 이학년 선배의 애인은 누구인가? 고민할 때 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아쉽게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야, 우리 내기할래? 무슨 내기? 주황머리 애인 찾는 내기, 찾은 사람한테 새로 생긴 밥버거 쏘기. 어때? 좋아! // 방과 후를 잠에 취해 간신히 듣고 석식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뛰어온 급식실 안은 시끄러웠다. 검은 계열의 머리통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주황색이 한 번에 눈에 들어왔고 그가 방긋 웃으며 앞에 앉아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다정해보였다. 댄스부 지민선배 맞지? 작은 눈에 작은 키.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했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동아리 내에서도 유난히 춤 선이 고운 선배이지만 너무 착한 성격 탓 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잘 치이곤 했다. 치이면서도 실실 웃어서 무른 묵 같다며 동아리 내에서 별명이 묵인데. 일부러 대각선에 앉아 힐끗 쳐다보니 지민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자 해사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주황머리의 선배가 뒤를 돌아 우리를 처다 보고 위 아래로 훑었다. 얼핏 보이는 명찰에 김태형이라 적혀있는 걸 보고 속으로 되뇌었다. 주황머리 선배 이름이 김태형이군. 지민선배와 친하고. 천천히 밥을 먹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열었다. “태태, 너도 방과 후 수업 들어?” “어? 으, 응. 공부…해야지!” “잘됬다. 앞으로 석식 같이 먹을래?” “나야 좋지!” 둘은 올 해부터 친해진 건지 약간의 어색함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같이 먹자는 약속을 하는 꼴을 보니 계집애들 같아 키득거리고 다시 대화를 들었다. 너는 지금까지 연습실에 있었던 거야? 응, 대회준비 때문에. 힘들겠다. 어, 조금? 네가 남길 것 같은 오리고기 먹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어? 다 먹어! 다! 진짜? 다 먹는다? 응응. 많이 먹고 힘내. 둘이서 아주 그냥 깨가 쏟아지지 않고 부어질 지경이었다. 곁눈질로 쳐다보니 태형선배의 고기가 가득 들린 젓가락이 지민선배 고기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저럴 선배가 아닐 텐데. 뺏어먹기 바쁜 그런 사람인데……. 의구심이 가슴 안에서 부글부글 끓을 때 태형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보지 마.’ 보지 말라니? 눈치 챘나?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벌려 알리는 태형선배가 생긋 웃으며 혀를 내밀고 다 마신 지민선배의 국을 자신의 것과 바꾸더니 꼭 어미 새가 제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것 마냥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둘이 분위기가 좀 그렇다? // 태형선배의 행동이 미심쩍다 느낀 계기가 한 가지 더 생겼다. 며칠 후 급식을 먹고 상담을 한 뒤 일면 현실자각타임이 와버려 언더 노래를 들으며 내적으로 갱스터가 되어 창문을 힘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때 아래에서 고백을 하는 청춘이 보였다. 선생님의 잔소리가 더 이상 듣기 싫었는지 검은 머리로 염색한 태형선배의 뒤태가 올곧았다. 이어폰을 빼고 진지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자 긴 생머리의 소녀가 분홍색 상자를 건네는 것에 이건 특종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동영상버튼을 눌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뒤뜰에 남녀 둘이 분홍빛의 상자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것이 특종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태형아, 이거… 받아줄래?” “아, 저 미안.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우리 학교야?” 고개를 끄덕이고 선물을 여자에게 다시 돌려주는 매너에 소문대로 개썅양아치는 아닌 것 같았다. 소녀는 부끄러운지 상자를 품 안에 숨기고 도도도 뛰어갔다. 동영상을 저장하자마자 태형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왐마 잦됬어야. 굳은 상태로 가만히 있자 손가락질하며 그대로 있으라는 경고를 받고 굳었다. 도망칠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도망치면 내일 학교 못 나오는 거 아니야? 뛰어 온 태형선배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모르쇠로 가자! 왜 그러시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대한 귀여운 척 고개를 갸웃거리자 처 맞기 전에 내놓으라며 으르렁거렸다. 바로 핸드폰을 반납했다. 너 동영상으로 찍었냐? 지우고 나서 귀 가까이 입술을 대고 한 마디 했다. “지민이라던가, 박지민이라던가, 댄스부 부장이라던가, 어제 나랑 같이 석식 먹었던 귀요미라던가, 아무튼 걔 귀에 들어가면 네 인생 바이 짜이찌엔이니까 조용히 해라. 알겠지?” “죄, 죄송합니다.”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생긋 웃으며 제 갈 길 가는 태형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호기심이 가득 분출되었다. 왜 굳이 지민선배한테? 지민선배가 귀요미? 귀엽기야 하지만 친구한테 그런 애칭을 쓰나? 결론은 지민선배만 모르면 되는 거야? …태형선배 뭥미? |
| 태형지민 |
꿈을 꾼 적 있다. 웃는 게 사랑스러운 주황 머리의 남자가 소풍이라도 왔는지 돗자리를 깔며 가방에 있는 샌드위치를 꺼냈다. 나는 여전히 환자들만 입는 옷을 입고 있었고 웃지 않았다. 남자는 어서 앉으라며 제 옆을 방정맞게 두드렸다. 엉덩이를 붙이니 내 손에 샌드위치를 쥐어준다. 그것도 두 손에 어린 아이 마냥. 남자는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입술 끝에 소스를 잔뜩 묻히며 먹어댔다. 나도 먹었다. 밀가루는 먹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이 생각났지만 꿈인데 뭐 어때. “맛있지? 그거 내가 만든 거다?” 맛, 없는데. 일단 씹고 삼켰다. 남자의 목소리가 의외로 낮아 울렁이는 목젖을 바라보다 가슴을 두드리는 행동을 하니 물을 따 먹여줄 뻔 했다. 간신히 내가 마시고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다 먹으니 남자는 뿌듯하게 웃으며 돗자리에 누웠다. 요즘 하늘보다 두 배는 더 맑았다. 심지어 투명하다는 느낌도 났다. 책에서나 읽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아름다웠다. 주변은 풀과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다. 노란 꽃, 빨간 꽃, 하얀 꽃. 아쉽게도 향은 나지 않았다. 뿌연 꽃가루들이 춤 추듯 나풀거렸다. “너도 누워.” 그럴까? 남자의 옆에 누웠다. 푸른색만 보이니 꼭 내가 맑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분이 좋다. 남자는 슬쩍 팔을 벌려 내 머리 아래에 가져가댔다. 남자끼리 어색하게 팔베개라니. 내 아랫배를 심장소리에 맞게 두드렸다. 토닥, 토닥, 토닥. 꿈속에서 잠들면 또 꿈인가? 꿈에서 잠이 드니 “박지민 환자분, 약 드세요.” 현실이다. 그럼 그렇지. 웅크린 손에 떨어지는 알약들이 벌레 같았다. 먹기 싫다. 간호사가 지켜보는 내내 버티다 교수님 부른다는 엄포에 어쩔 수 없이 입 안에 털고 물을 마셨다. 으엑. 쓰다. 잘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다른 환자에게 시선을 돌린 간호사를 보고 커튼을 쳤다. 침대를 가리는 게 안심이 되어 다시 누웠다. 지금 자면 그 남자가 나올까. 옆자리가 시끄러웠다. 눈을 뜨니 창가는 벌써 어두워졌다. 아 밤에 못자겠는데. 커튼 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여섯 개의 침대가 가득 찼다. 골골대는 방이 지겹다. 옆자리를 보았다. 새 옷 냄새가 가득했다. 여자와 남자가 환자를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태형아, 혼자 있을 수 있지? 당연하죠.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주황 머리의 남자가 검은 머리의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남자는 꿈에서처럼 맑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꿈에선 엄청 하얬는데, 현실에선 까무잡잡하구나. “안녕.” “안, 안녕.” “…보고 싶었지, 나?” 남자는 까르르 웃었다. 벙 찐 내 표정이 그렇게 웃긴가. 더듬은 말이 웃긴 건가.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내 침대에 붙어있는 간이침대를 꾸역꾸역 꺼내더니 그 곳에 누웠다. 야, 거기 눕지 말고 네 침대에서 누워.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많이. 어? 귀 빨개진다! 부끄럽구나? 남자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귀여워.” 알아, 나도. 대꾸하자 여전히 예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다들 한 번쯤은 본 조각들꺼라 생각하고 백업차! ㅋㅋㅋ
짐총이라 쓰기엔 민망하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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