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려나 싶었는데, 얼다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사람으로 드글거렸던 광장은 순식간에 비워졌고, 그 때문에 학연은 크게 실망을 한 차였다. 아아, 헨델에게서 빵을 사온 후에 광장에 앉아 모처럼 사람 구경을 하려던 차였는데……. 아래로 내리깐 속눈썹에는 빗방울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헨델은 커다란 몸집을 가진,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아래 베이커리의 친절한 주인아주머니였다. 학연은 헨델을 무척이나 좋아해, 외출을 할 때면 꼭 헨델의 베이커리에 들르곤 했었다.
학연은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아이였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래요? 제 어미의 고운 손을 꼭 붙잡고는, 눈을 도륵도륵 굴리며 학연이 이따금씩 던지는 질문에, 사람들은 저들이 아는 지식들을 나누어주며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었다. 그리고 학연은 왜인지 그 눈빛이 싫었다. 참 똘똘한 아이구나. 머리 위로 닿아오는 끈적한 손의 감촉이 끔찍했다.
헨델은 그들과 달랐다. 그저, 글쎄,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궁금한걸? 하고 반문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학연은 그것이 좋았다. 나와 같은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니!
학연이 빼꼼 끄트머리를 드러 낸 바게트를 봉투 안으로 욱여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 폴짝, 허공에서 굴리던 짧은 다리로 벤치에서 내려온 학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치, 오랜만의 나들이였는데…….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학연은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내려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때, 찰박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ㅡ. 장난스레 입김을 내뱉던 학연이 아스라이 들려온 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 누군가가 있었구나. 학연은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제 또래의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비를 맞으며,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바라보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안녕, 거기서 뭐 해?
학연이 소년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소년의 시선이 학연에게로 향했다.
학연은 품 안의 바게트를 꼭 끌어안았다. 바게트가 눅눅해지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학연은 비를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학연은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소년이 지붕이 없는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학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학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소년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대답, 하기 싫으니?
…….
……뭐, 보아하니 그런 것 같네.
학연이 소년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근데, 혹시 너 나 본 적 있어?
…….
왠지 낯이 익어서 말이야.
학연은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을 위아래로 흝어보았다. 비에 젖어 착 가라앉은, 눈이 다 가려질 정도의 긴 머리카락과 흰색 티셔츠와 다 헤진 검은색 바지. ……추울 텐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응시하는 학연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우리, 본 적 없어.
그런가…….
하지만, 넌 날 알겠지.
아, 학연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학연이 두 발자국 더,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너, 그 아이구나.
…….
뭐랬더라.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해를 입히는 아이라고, 엄마가 그랬었던.
…….
저주를 받은 아이, 맞아?
……맞아.
학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였다. 학연은 소년에게로 세 발자국 더, 다가섰다. 누군가가 손을 뻗는다면 닿을 거리. 그리고 먼저 손을 뻗은 건 학연이었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치워내는 학연에, 소년이 작게 움찔했다. 학연이 소년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소년의 눈동자는, 학연의 생각보다 옅었다.
어둠이 짙게 깔려도 하늘만은 훤했던 광장은 온통 쌔까맸다. 어두웠으며, 침울했다. 하늘을 집어삼킨 비구름 때문인듯했다. 학연이 샐쭉 웃었다. 소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일렁였다. 그의 웃음에 악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지?
소년은 학연의 두 눈을 뚫어져라 마주하다, 깨달았다. 아, 그저 호기심이구나.
……호기심?
뭐야, 아니네!
……뭐?
아무런 일도 없는 걸? 봐봐, 난 멀쩡하잖아.
이번엔 소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 앞의 아이가 물은 것이,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이 맞느냐는 것이 아닌 소문의 진위였다니.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가 되는 아이. 자신은 저주를 받은 아이였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그래서, 소년은 항상 혼자였다. 모두가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서길 꺼려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광장 같은 곳에 올 수 있는 날은 이렇게 궂은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을 하지 않는 날 뿐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외로웠다.
학연이 해맑은 얼굴로 건네는 말에, 소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주,
응?
……저주 같은 건 없어.
…….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는, 나는…….
…….
무슨 권리로 판단하는 건데…….
한 번 터진 말들은 댐이 무너진 듯이 뒤죽박죽인 채로, 한 번에 밀려들었다. 소년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학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마도 소년은 우는듯했다.
사실 학연은 그가 우는 이유가 전혀 짐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우는 아이를 내버려 둘 정도로 학연은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학연은 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만, 그에게는 색다른 질문을.
너는 이름이 뭐야?
…ㅈ…환.
응?
이재환…….
나는 차학연이라고 해!
학연이 재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꼴을 보아하니, 너 친구 없지?
…….
아, 괜찮아. 나도 친구 없어.
인상을 쓴 채, 자신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 재환의 손을 강제로 끌어와 악수를 한 학연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었다.
너, 뭐야?
말했잖아? 차학연이라고.
…….우리 친구 할래?
뭐?
나 친구 가지고 싶어. 우리 친구 하자.
재환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에게 친구를 하자고 손을 내밀다니, 아무래도 제 앞의 아이는 이상한 아이인 듯싶었다.
그렇지만 실은, 재환은 상당히 기쁜 것 같았다. 친구라니! 자신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니. 제 앞의 학연이란 아이는 자신을 경멸하지도 않았고, 욕하지도 않았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 했었던 말들을 듣고는 오히려 자신에게 손을 뻗어주었다. 학연의 어처구니없는 말들에, 황당함보다는 어쩌면 자신에게도 친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재환을 덮쳤다.
학연은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를 맞은 탓인 것 같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제 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었던 바게트를 재환에게 건네며, 학연은 환히 웃었다.
우리 친구, 하는 거지?
…….
자, 이거 너 먹어. 넌 지금 너무 말랐어.
아…….
음, 그러니까…… 일단 네가 해를 입히는 아이라는 건 거짓이었던 거네!
…….
내가 지금은 시간이 없고, 음…… 다음에 만날 때 자세하게 얘기해주라! 사람들이랑 마주치는 게 싫은 거라면, 우리 푸르른 새벽에 만나자! 아침 숲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 키가 작은 솔나무들 앞에서, 어때?
제 앙상한 다리는 보이지 않는 건가. 학연의 말에 재환은 입을 벌려 작게 웃었다. 비에 쫄딱 젖은 상태로 발랄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재환의 웃음은 그 크기를 더해갔다. 대답을 바라는 듯 재환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학연이, 재환의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어, 웃었다!
……보다는,
응?
솔나무 아래보다는, 아카시아 나무 아래쪽이 더 좋아…….
음, 그래, 그럼! 우리 아카시아 나무 아래에서 만나는 거다?
뎅, 뎅, 뎅. 저 멀리 교회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는 완전한 어둠에 잠긴 광장에게, 지금이 황혼임을 일러주었다. 학연은 그제야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이만 가볼게! 꼭, 꼭 나와야 해!
……잘 가.
아, 그리고! 웃으니까, 음ㅡ 좀 예쁘더라.
학연이 손을 마구 휘저으며 인사했다. 재환은 꽤나 선명하게 웃어 보였다. 학연은 뒤를 돌아서며 재환의 웃는 얼굴을 생각했다. 무언가를 닮았는데….
아, 그래 맞아!
그 아이의 웃는 모습은 꼭, 마치 해 같았다.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면 귀퉁이에 꼭 그려 넣었던, 곱게 눈을 접으며 웃던 해.
제 어미가 왜 이리도 늦었냐고 자신을 꾸짖는다면, 학연은 친구를 사귀었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학연은 신이 났다. 어서 비가 그치고 해가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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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란 건 이런 글도, 노래도 아니었는데 ^_ㅠ..
오랜만이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