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아, 그 날 기억나?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고백했던 날. 너 엄청나게 당황하더니 가만히 서서 어버버거렸잖아. 그걸 보는 게 싫어서 장난이라고 그냥 얼버무렸었지. 우리 그 땐 중학생이었는데, 진짜 귀여웠겠다.
그건 기억나? 빼빼로 데이에 내가 너 빼빼로 만들어 주겠다고 온갖 난리치면서 이상한 초코송이 모양 빼빼로 선물했던 거. 그거 받고서 네가 고맙다면서 진짜로 좋아했었어. 아빠 주려고 만들었다고 거짓말 쳤는데 사실 너 주려고 만든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들어 본 빼빼로였어.
니가 고등학교 올라가서 처음으로 여자친구 사귀고 나한테 기념일 선물 고르는 거 도와달라고 했을 때, 너랑 시내에 갔다 오고는 혼자 집에서 문 잠그고 펑펑 울었었어. 널 좋아한 날들 중에서 그 날이 제일 슬펐어. 그 때 처음으로 짝사랑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깨달았던 것 같아.
성인이 되고 나서 니가 여자친구랑 깨졌던 날, 같이 술집에 앉아서 펑펑 울던 때에는 니가 힘들어하는 게 너무 싫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구나 싶어서 조금 기쁘더라. 나쁜 새끼라고 해도 돼. 니 앞에선 아닌 척 했지만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 이후로도 웃고, 또 울고 많은 일이 있었지.
어쨌든 우리 참 오래 함께였었어. 중학생 때부터 지금 대학교 졸업반을 앞두기까지 8년 동안이나 친구였으니까 말이야. 난 그 긴 시간동안 하루도 너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어. 하루도 네가 아프진 않을까, 속상한 일은 없을까 걱정해보지 않은 적이 없어. 남들이 보면 미련스럽다고 할 만큼.
그런데 이제 그만하려고 해. 네가 아닌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그런 청춘을 시작해 보려고. 우리는 앞으로 다시 둘도 없는 친구가 될거야. 너에게 늘 그랬듯.
고마웠어. 계속 행복하길 바랄게.
"아윽... 오글거려..."
나, 김탄소. 22세, 종강과 함께 4학년을 앞둔 파릇파릇한 대학교 3학년 여자. 얼굴? 그냥 그럼. 몸매? 마찬가지. 연애? 삐빅, 안 하고 있음.
늘 어느 분야에서는 무난무난한 게 매력인 나에게 한 가지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면 바로 심각하게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술만 마시면 뭐가 그렇게 아련하고 슬퍼지는지 꼭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꾹꾹 눌러서 써주는 게 취미다. 어제는 시험기간이 다가오기 전 마지막 술자리라면서 동기들과 학교 앞에서 술을 잔뜩 마셨고, 그 결과 김태형이 희생됐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지만 그저께는 엄마가 희생양이었다.
편지를 꾸깃꾸깃 접어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위장에서부터 소주 냄새가 펄펄 끓어올라 가만히 누워있는 게 아무래도 좋을 듯 싶어 머리맡에 있던 베개를 거칠게 빼내어 꼭 끌어안는다. 다행히 필름이 끊길 때까지는 마시지 않는 타입이라 어제 친구들 앞에서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돌아보기 수월했다. 음, 휴지를 뜯어 가게에서 공짜로 주는 오뎅탕에 집어넣은 것만 빼면 완벽하게 깔끔하고 즐거운 술자리였다. 술 조절 잘하는 나 아주아주 칭찬해.
가만히 눈을 뜨고 누워있다가 밀려오는 피곤함에 결국 스르륵 눈을 감았다. 술 냄새를 뺀다고 자취방 창문을 열어놓고 잔 탓에 밖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가 귀를 찔러왔다. 분명 아침 7시나 8시일 것이 분명하다. 이상하게 난 술을 많이 마신 날이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고는 했다.
잠을 청하려고 뒤척이는데 도무지 정겨운 짹짹 소리에 잠이 들지 않아 결국 침대에서 몸만 일으키고는 창문으로 손을 뻗어 힘겹게 닫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 한마리라도 더 잡아 먹는다더니 다들 교훈을 듣고 열심히도 일어나 활동하는구나. 본 받자.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누워 따뜻한 베개를 꼭 안은 상태로 눈을 감았는데,
[띠 띠띠 띠띠띠 띠리릭]
"여어, 탄소~ 아, 술 냄새 나."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이 목소리는 어제의 희생양 김태형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김태형은 엄청난 아침형 인간으로, 종종 이렇게 내가 잘 때도 일찍 찾아와 나를 깨우고는 했다. 하지만 하필 술 마신 다음날이라니. 하필 오늘이라니. 어제의 희생양이 김태형이었는데. 하필.
"김탄소, 자? 자? 진짜로 자?"
못 들은 척 눈을 끌어안고 있던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김태형이 침대에 살포시 앉는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조금 달달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항상 김태형에게서는 출처 모를 달콤한 향이 났다. 어렸을 때 물어보니 자기는 모른다고 했다. 커서도 똑같았다. 향수 냄새를 유난히 싫어하는 김태형은 절대로 뭔가를 뿌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늘 저런 향기가 났다.
"자네."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김태형은 이내 조용해졌다. 매트리스를 통해 작은 움직임조차도 느껴지지 않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 보고 있는 거 아닌가? 못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는건가? 하필 후리하게 입은 날 찾아오네. 그 놈의 하필, 하필! 항상 김태형은 타이밍을 못 맞춰. 베개로 절묘하게 가린 얼굴을 없는 힘 쥐어짜내 최대한 찌푸리고는 슬슬 일어나서 다시 돌려 보내야겠다 싶은 생각을 하고 있을때쯤, 김태형이 다시 살포시 일어났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매트리스 위로 올라와 내 옆쪽으로 다가왔다.
"문을 닫아 놓으니까 술 냄새가 나지."
곧 몸 위쪽으로 김태형의 인기척과 함께 창문이 스르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태형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내 옆에 앉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일어날 타이밍 애매하게 됐네. 어떡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김탄소 일어났지."
그리고는 어깨를 툭 툭 조심조심 건드려 온다. 너 그렇게 얌전하게 안 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태형의 목소리는 내가 혹시나 자고있지는 않을까 아주 낮고 조용해서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을것만 같았다. 곧 김태형은 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다시 조심스레 내 어깨를 두어번 건드렸다.
"이렇게 치면 원래 일어나는데, 왜 안 일어나지?"
내가 평소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던가... 고민도 잠시, 조심조심 몸을 움직여 곁으로 조금 더 다가와 베개를 슬쩍 올리는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떠버리는 덕에 김태형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헤헤. 너 깨어있었지, 계속."
"안니..아니거든."
잔뜩 잠겨서 굵어진 목소리로 그로울링을 하듯 대답하자 김태형이 또 헤헤, 웃으면서 술 많이 마셨구나. 하고 말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왜 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입술을 내민 녀석은 평소처럼 되도 않는 상황극을 하려는지 어깨를 움츠리며 침대 옆 벽으로 몸을 기댄다.
"요즘 탄소씨가 자꾸 절 미워해서요. 전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마음에 안 드나봐요."
순간 내 편지 내용을 훔쳐 읽어본 것만 같은 말에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김태형은 내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움찔하더니 이내 빙구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본다. 자기 상황극에 동참해달라는 의미의 웃음이 분명했다. 그런 표정으로 보면 내가 거절 못하는 거 아니까 그러는거지, 너. 아무것도 모르는 김태형을 머릿속에서만 괜히 타박하며 큼큼 목소리를 다듬었다.
"전 그 쪽이 원래 마음에 들었었는데요. 자꾸 아침마다 찾아오시니까 친구가 되기 싫어졌어요."
역시나 그로울링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가고 덤으로 소주냄새도 풀풀 났다. 그 상태로 다음엔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는 김태형의 순수한 얼굴을 보니 순간적으로 내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워져 베개를 김태형에게로 던지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리둥절한 눈길이 따라붙는다.
"다음 대사 생각하고 있어봐. 이 좀 닦게."
"그랭!"
어휴, 귀엽다 진짜.
하긴 김태형이 안 귀여웠던 적이 있던가. 화장실로 향해 치약을 칫솔에 가득 짜 입에 물며 거울을 쳐다본다. 아침부터 맨눈으로 김태형 외모를 접해서 시력이 좋아졌는지 오늘따라 상태가 더 적나라하게 나빠보이는 얼굴이 보인다. 심지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놈의 다크서클, 언젠가는 필러라도 맞아서 없애 버리리라.
분노의 칫솔질을 하는데 밖에서 김태형의 뭐라뭐라 말하는 게 들렸다. 칫솔질 소리가 너무 커서 제대로 듣지 못한 탓에 화장실 문을 열고는 뭐, 하고 말하자 굳이 침대에서 내려와 내 쪽으로 와서 한다는 말이 칫솔질 너무 세게 하면 이 상한댄다. 대답없이 화장실 문을 쿵 닫았다. 면전에서 무시당하니 기분이 나쁠만도 하겠지만 내가 아는 김태형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침대로 가 풀썩 앉고는 다음 대사를 생각할 것이다. 넌 그게 참 문제야. 아무 의도도 없이 누구한테나 다정해. 나를 포함해서. 차라리 나한테라도 다정하지 말란 말이야.
괜한 심술에 더 세게 이를 닦다가 결국 피를 보고서야 칫솔질은 멈췄다. 화장실을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날 쳐다보는 김태형이 보였다. 느릿느릿 침대 옆에 있는 책상의자에 앉아 고개를 까딱이자 그제서야 입을 네모낳게 벌리며 웃고는 말한다.
"전 탄소씨랑 친해지고 싶어서 아침 일찍 오는건데요!"
어... 그래요... 네.
내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밥은? 하고 물어보며 의자를 괜히 빙빙 돌린다. 어색하다. 하지만 익숙한 어색함이다. 9년동안 알고 지내며 그 중 8년 정도는 김태형을 좋아하며 지내왔기에 늘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했고, 그렇기에 이 어색함이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날 정말로 친한 친구라고만 생각하는 김태형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안 먹었어! 라면 먹고싶어."
"니가 끓일래?"
"그래!"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는 김태형을 보며 발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한쪽 벽에 고이 접어두었던 탁자를 폈다. 요 며칠 관심가는 사람이 생겼다고 카톡이며 전화며 난리를 치던 김태형 덕분에 삶에 탁자 위에서 밥을 먹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실시간 중계를 해주시는 덕에 어찌나 입맛이 떨어지는지 살이 다 빠졌으니.
"탄소야, 신라면 한다?"
"먹고싶은 거 해."
내 말에 엉덩이까지 살랑살랑 흔들며 아싸~ 하고 외치는 김태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침대로 슬금슬금 몸을 눕혔다. 창문을 계속 열어놨더니 방 안이 쌀쌀해지는 바람에 침대 구석에 도망가있던 얇은 이불도 가져와 덮었다. 아까는 추운 걸 몰랐는데,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김태형이 찾아와서 마음이 추운 건가.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옆으로 누운 상태로 김태형이 물에 스프를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심조심 스프를 탈탈탈 털어넣고는 이쪽을 힐끗 돌아보며 바보같이 웃더니, 어떤 표정을 지어줘야 할지 고민할 새도 없이 다시 뒤돌아서는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스프를 휘휘 젓는다. 옛날에는 저 웃음에 속을뻔 했었다. 너무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웃기에, 순간 쟤도 날 좋아하나 싶은 생각에 며칠밤을 설렜다. 심하게는 꿈에서 김태형을 만나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무리 친구들 모두에게 저렇게 장난을 치고 웃어주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물론 그런 바보같은 착각을 한 내가 어이가 없었던 거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행동할까. 만약 김태형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수도 없이 했던 상상이지만 동시에 답을 절대로 알 수 없는 질문이다.
곧 방 안에는 소주 냄새 대신 라면 냄새가 가득 찼다. 휴지를 뜯어 냄비를 잡은 김태형은 앗뜨뜨, 하면서 탁자 위에 미리 올려둔 받침에 라면을 잽싸게 얹었다. 그리고는 컵과 물, 수저까지 준비하고 나서야 이불속에 누워 그런 자기를 쳐다보고만 있는 나에게 손짓했다.
"얼른 내려와! 진짜 완전 맛있게 됐다!"
그걸 어떻게 알아. 먹어보지도 않고, 바보야.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말없이 이불을 끌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김태형이 애벌레 같다며 귀엽다고 웃고는 내게 수저를 건네기에 애써 설레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수저를 받았다. 쟤는 지나가는 콩벌레한테도 귀엽다고 할 위인이니까, 절대로 저 말에 설레서는 안 된다. 어쨌든, 이불에 안긴채로 미식가처럼 국물을 한 입 뜨자 김태형이 긴장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과장되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쳐다보며 입 속으로 숫가락을 가져간다.
"으음... 제 점수는..."
국물을 먹고 말을 잇자 김태형의 찌푸려진 미간과 동그랗게 뜬 눈이 내 입술로 향한다.
"십 점 만점에 십 점."
"아싸!"
말이 끝나자마자 두 손을 흔들며 좋아한 김태형은 곧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자기가 창문을 열어놓고 자기도 추운지 남방을 벗지 않고 라면을 먹는 게 웃겼다. 계속 보고만 있으니 왜 안 먹냐며 의문서린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그래, 난 이제 김태형을 이렇게 멍하니 쳐다봐서는 안 된다. 어제 술 취해서 김태형에게 쓴 편지는 비록 지나치게 감성적이기는 하지만 헛소리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난 결심했다. 기나긴 짝사랑을 이제 끝내 보기로. 그래서 내 앞에 있는 이 순수한 김태형을 정말로 내 인생 가장 친한 친구로 대하기로.
"속 풀리지, 그치?"
"응. 맛있어."
비록 아직까지는 이렇게 물렁하게 대답해버리고 마는 바보지만, 천천히 계획을 세워서 진짜로 그냥 친한 친구처럼 대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
자,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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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를 짝사랑하며 삽질하는 내용을 기대하셨을 수도 있으셨겠지만... 내용을 보자마자 짝사랑 포기하겠다는 글이 나와서 혹시 당황하진 않으셨나요..ㅎㅎ
텀은 장담 못하지만 삘이 올때마다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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