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렬하는 태양 한가운데, 노란 캡을 눌러쓴 택시들이 지나다니는 시가지를 뚫고 한 인영이 급히 걸어나왔다. 소매 끝자락까지 수트케이스와 쇼핑백들을 끼워넣고 양 손에는 구두와 징이 박힌 컨버스화까지 알차게 챙긴 채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에게서는 묘한 생동감이 흘러나왔다. 남자임에도 퍽 어울리는 밝은 하늘색 가디건을 걸친 채로 꽉 막힌 도로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는 모습에서는 일하는 남자의 섹시함과 왠지모를 나른함까지도 풍기는 듯 했다. 흰 스니커즈를 신은 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남자는 이윽고 신발을 쥔 손을 올려 손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발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흰 스니커즈가 멈춘 곳은 꽤 높은 빌딩이었다. 남자의 하늘색 가디건 끝자락이 빌딩 사이로 사라진다. 패션위크의 시작이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니 꽤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옷을 갈아입느라 여념이 없었다. 루한은 그 인파들 사이에서 찬열을 찾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워낙 키가 큰 모델들이라 루한은 웬만한 남자들과 머리 하나가 차이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키가 꽤 큰 편이었던 찬열도 그 속에 섞여 있으니 찾기가 힘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대충 키크고 잘생긴 사람 찾으면 그게 박찬열이었는데. 루한은 찬열을 겨우겨우 발견하고는 인파를 가로질러 찬열에게로 향했는데, 키가 큰 모델을 비집고 가려니 큰 수트케이스가 옆구리에 치였다. 가방으로 사람들 사이에 길을 터 이리저리 몸을 접어 인파를 헤치고 다가가니 찬열은 이미 하의를 갈아입고 상의를 끼워넣는 중이었다. 왠지 얄미운 마음에 수트케이스로 뒤돌아선 등을 퍽 때리며 입을 열었다.
"이젠 경쟁자라 이거지. 응? 혼자 에이전시도 찾아오고. 많이 컸어, 우리 찬열이."
루한이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신발 두 짝을 팽개쳤다. 컨버스화의 징이 꽤나 날카로워 매서웠던 터라 찬열이 오, 하는 소리를 내며 장난스럽게 몸을 옆으로 피해 루한의 곁으로 붙었다.
"미안미안. 내가 시간이 없잖냐. 나 오늘 너보다 한 군데 더 돌아야 된단 말이야."
마치 그냥 넘어가주지 않으면 하루종일 붙잡고 오디션을 방해할 듯할 기세에 루한은 질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어련하시겠어.
"됐고. 나 오늘 맡긴 큐빅이나 줘. 사진 찍을 때 눈 밑에 박아야 해."
찬열이 자신의 가방을 이리저리 뒤져 큐빅을 꺼내자 루한이 그 플라스틱 상자를 찬열의 손에서 빼어내고는 손에 들린 쇼핑백을 모두 찬열의 곁에 내려놓았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루한이 옆에 선 찬열을 한 번 흘겨보고는 쉴 틈도 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 오디션이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빨리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우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 쇼핑백 중 하나를 열어내었다. 하늘하늘한 감이 있는 짙은 남색 셔츠, 무릎을 반쯤 가리는 스트라이프 회색 반바지. 위로는 탁한 은회색의 기장이 긴 조끼를 어깨가 내려오게 걸쳐 입었다. 마지막으로 옅은 갈색의 워커까지 챙겨신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무채색 계열로 피팅을 한 후, 루한은 부지런히 쇼핑백을 뒤져 파우치도 꺼내 들었다. 찬열은 벌써 메이크업을 마치고 제 대기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찬열을 향해 떨어져 있으라고 턱짓을 했지만, 장난스럽게 고개를 내젓는 찬열을 보고는 옅게 한숨을 쉰 루한이 곧 걸음을 옮겨 전신거울 앞에 섰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핏을 훑어보고 난 후, 손에 든 파우치 안에서 아이라이너와 셰도우를 꺼내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움직이자, 눈의 윤곽이 매혹적으로 살아났다. 순번을 기다리던 찬열이 옆에서 조잘대는 바람에 아이라이너가 점막을 비껴 나갔지만 또 그것은 그것대로 무질서한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왼쪽 눈의 짙은 아이라인 밑에 붉은 색 조그만 큐빅들을 이리저리 박아 넣고, 입술만 색조 메이크업으로 진한 붉은 립스틱을 칠하니, 이것이 루한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였다. 190이 훌쩍 넘어가는 키 만큼이나 자신의 프라이드에 거칠 게 없는 다른 모델들 틈에서 살아남아 런웨이에 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소년과 성인의 경계. 그 묘한 나른함, 무질서함, 그 안에 숨겨진 퇴폐미.
원래 무채색 속에 숨겨진 색이란 섹시한 것. 눈에 띄는 것, 또한 갖고 싶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제 순번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루한이 일어섰다. 기다리는 찬열에게 한번 고개를 끄덕여 준 후 걸어가 흰 배경 앞으로 다가섰다. 카메라의 렌즈가 나를 훑는다. 루한은 이 때를 좋아했다. 런웨이를 걸을 때와 함께. 런웨이를 걸을 때는 걸음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에 내 모든 걸 담아내는 긴 과정이라 매력적이라면, 카메라 셔터 소리에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를 보여주는 것 또한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나를 렌즈에 온전히 담아내는 순간. 자신의 프로필이 담긴 판넬과 함께 마지막 컷을 찍고 나면, 루한은 곁에 떨어져 있던 사진을 주워 앞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가져간다. 저의 모든 것을 보여 줄 사진. 그 사진 한 장에 컬렉션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린다. 눈을 감고 완전히 돌아간 의자에 앉아 뒤를 돌아보는 사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품이 큰 정장 자켓이었다. 어깨 선에 걸쳐진 자켓의 깃이 아슬아슬하다.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눈 앞으로 제 사진을 가져간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남자가 보고 있는 루한의 사진 밑으로 수많은 오디션 참가자들의 서류가 얽히고, 그것을 바라보던 루한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살짝 스쳤다 지나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이윽고 남자는 사진을 내려놓았다. 모델들로 시끄러운 장내에도 불구하고 사르륵, 하고 떨어지는 종이의 소리가 선명했다. 그 남자는 사진을 제 서류와 함께 끼워넣더니 유창한 한국말로 말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나가셔도 됩니다."
루한이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한국어를 듣자 저절로 몸이 굳었다. 세훈은 다시 인상을 좁혀 제 서류를 뒤지고는 입을 열었다.
"C'est fini. (이제 끝입니다)"
방금 전까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남자는 완벽한 프랑스어로 루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한은 남자를 보며 눈을 한 번 깜빡였다가 제 쇼핑백과 나머지 사진들을 다시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그 남자를 향해 -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라는 말을 한국어로 남기고서는 에이전시를 나왔다. 그 방을 나올 때 그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었던 것 같지만, 루한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아직 더 많은 오디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밝은 하늘색 가디건 소매 끝자락까지 가득 쇼핑백을 끼워넣은 채로 흰색 스니커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리 패션위크는 이제 시작이었다.
| 청옥입니다! |
세루 단편 이후로 거의 한달만에 글잡에 뭔가를 올리는 것 같은데...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_; 어느 비회원 익인분이 패션계 쪽 세루를 원하셔서 한번 데리고 와 봤는데 쓰다보니 압축이 되지 않고 또 애정도 가는 조각이라 어떻게 장편이나 상중하로라도 잘 끌고 가 보려고 노력중입니다. 다음편은 언제 나올지 저도... 오늘은 살짝 맛보기 느낌이라 분량이 작아요! 여기서 루한이는 모델이고, 세훈이는 곧 나올겁니다:) 눈치빠른 독자님은 얼추 맞히셨을 듯 해요. 늦게 찾아와서 죄송하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XD |
| 구독료 관련 |
저는 구독료를 받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원래는 받으려고 했지만 이 소재를 주신 분이 비회원이시기도 하고, 포인트를 받을 만큼 좋은 글도 아니라 부끄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비회원분들이 볼 수 있는 쪽으로 운영자님께서 수정해주신다고 했으니 문제가 해결이 되면 약간만 받도록 할게요. 옆구리 찔러 절이라도 받아 볼 심산입니다:) 여러분의 피드백 하나하나에 힘이 나는 게 제 마음이라...구독료는 아무리 많아도 50포인트 이상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실 받는 편은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죄송해서....
예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이것의 다음 편이든, 다른 조각이든, 불맠이든 빨리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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