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빌딩 앞에서 걸음을 멈춘 루한이 주먹을 말아쥐고 제 종아리를 콩콩 두드리기 시작했다. 익숙한지 다리를 풀어내는 손길이 야무지다. 다리가 저려오는지 한참을 허리를 굽혀 다리를 두드려대다가 루한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자세가 흐트러지면 모델로서 제대로 습관을 들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루한이 가라앉은 기분을 살짝 감추며 고개를 돌려 찬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숙소 어디야. 금방이라며."
웅얼거리다시피 칭얼대는 말투에 찬열이 살짝 손을 뻗어 루한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대답했다. 앞으로 딱 3분. 골목만 돌면 바로 호텔 하나 있어. 찬열이 앞에서 끌다시피 해 겨우겨우 호텔에 도착한 둘은 키를 받은 후바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습관이 철저하게 배어 버린 탓에 씻기도 전에 손이 가는 것은 포인트 아이라이너들과 옷들이었다. 쇼핑백 하나하나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 에이전시의 오디션별로 정돈해 새로 구해 온 쇼핑백에 넣어 놓고, 바쁜 여정에 섞인 큐빅들은 색별로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 놓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숙소였기에 찬열과 루한의 쇼핑백을 질서있게 늘어놓자 방의 4분의 1이 꽉 찼다. 한결 깨끗해진 숙소에 한숨을 내쉰 루한이 겨우겨우 물품들을 정돈해 놓고 루한이 씻기 위해 파우치를 열었다.
"씨발. 나 안해!"
파우치 안은 분리된 아이셰도우가 안에서 흔들리며 빻아져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손을 대어 정리할래야 해 볼 수도 없는 모양새에 루한이 파우치를 그러쥐고 화장실 쪽으로 던져서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애써 쇼핑백들을 밀어넣으며 공간을 더 확보해 보려던 찬열은 그 모습을보고는 기가 찬 듯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루한의 곁으로 누웠다.
"루한, 저거 버릴 거야?"
"몰라. 아이셰도우는 또 어디서 사."
찬열은 루한이 원래 사소한 것에는 신경을 잘 쓰지 않고 넘겨버리고, 그다지 걸릴 게 없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에 난감해하고 속상해 하는 모습에 속으로 가만가만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오케이. 상태를 보니 그림이 나오네. 휙 돌아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제게 매달려 칭얼대는 모습에 꽤 토라진 것 같아 보여 찬열이 웃음을 삼키며 애써 말을 걸었다.
"내가 같이 사러 가 줄게. 됐지? 그거 뭐 속상할 일이라고, 딱 보니까 견적 나오는데. 많이 시달렸어?"
루한이 같이 가줄 거지? 하며 재차 물어보고는 이내 확답을 얻은 걸로 확신한 모양인지 아으,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찬열을 바라보도록 몸을 휙 돌렸다.
"큐빅을 붙이니 마니 아이라인이 이렇고 저렇고 모델은 빼놓고 자기들끼리 상의하고, 다른 데서는 사진은 이것밖에 없느냐고 갈구지를 않나. 아니 갑자기 컬러렌즈를 가져와서 껴보라는 건 또 뭔데. 응? 내가 모델이지 강아지야? 그런 건 피팅모델이나 시키지. 누가 쇼핑몰 알바생인 줄 아나. 아 몰라. 니가 가. 짜증나."
물어보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 모습에 찬열이 못말린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침대 시트에 푹 파묻혀 말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있을 즈음, 루한이 찬열의 앞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찬열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어가던 찬열이 뒤로 흠칫 물러나며 말을 끊었다.
"이번엔 또 뭔데."
너, 내가 무슨 맨날 사고만 치는 것처럼 말하지 말고. 루한이 투덜대며 말을 이었다.
"우리 오늘 첫 번째로 오디션 본 에이전시 알지. 거기 한국인도 있어?"
찬열이 잠시만, 하고는 제 스마트폰의 홀드를 해제해 에이전시의 이름을 탁탁 눌러대며 검색했다.
"응. 있네. 이름 보니까 오세훈 맞을걸? 지금 스물...셋. 오, 우리보다 젊네? 열 여섯살 때 프랑스로 이주해서 살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국적은 한국이래. 갑자기 이건 왜? 거기서 한국어 들으니까 신기했던 거야?"
루한이 찬열의 휴대폰을 낚아채 프로필을 훑어내기 시작하고는 어느 한 부분에서 루한의 눈이 커졌다.
"이 에이전시에서 모델 일도 했었어?"
찬열이 스마트폰을 다시 가져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다시 루한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웬만하면 묻는 말에 대답은 좀 해. 대가없이 핸드폰만 빼 갈 거야? 루한이 도리질을 쳤다. 찬열이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모양새를 취하고는 다시 액정에 시선을 고정해 사실 반, 주관적인 생각 반이 섞인 프로필을 읊었다.
"응. 그런가 보네. 지금도 내킬 때마다 하고 있나 봐. 그 기럭지에, 그 얼굴에 그 몸빨이면 하지 않는 게 더 아까운 몸이다."
루한이 그건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진짜 궁금하다. 이 사람은 왜?"
찬열이 집요하게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니...그냥."
루한이 뒷말을 삼켰다. 아니...그냥, 섹시해서.
창문 틈 사이로 세느 강의 바람이 불어들었다. 파우치 안의 금빛 아이셰도우가 바람에 날려 루한의 긴 속눈썹 위로 내려앉았다. 파리 패션위크, 첫 번째 밤.
| 청옥입니다! |
2편은 언제 나올지 저도 몰라요♬ 또 장편으로 끌어가보고 싶은 소재는 마구 샘솟고... 이 아이는 구독료를 붙이지 말고 끌고 가고 다른 소재는 구독료를 붙여서 가는 방안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사실 죄송해서 받아질지는 잘 모르겠네요. 파리 패션위크의 첫번째 밤이에요! 모든 독자분들, 암호닉 분들, 신알신 해 주시는 분들 모두들 너무나도 감사하고, 다음에 더 예쁜 이야기 더 예쁜 세루로 뵈도록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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