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땅따먹기 :: Epilogue 中 w. 메르헨
도경수를 잊었다, 고 할 수 없었다. 세훈과 같이 다니면서 세세한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을 도경수와 비교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차마 잊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날 보는 세훈의 눈은 조금 특별해졌다.
" 싸움……, 안 하면 안 돼? "
가만히 내 상처를 쓸어보던 세훈은 제가 더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걱정하는 건가. 도경수에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더 싸워. 종인아. 도경수의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머리를 잘게 털었다. 세훈이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 번 눈치를 채니 다음부터는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놓고 나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내 몸을 챙겼다. 경계하는 눈빛에서 그저 고맙다는 눈빛으로 바뀌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를 바라는 눈치였다. 속이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난 도경수를 좋아하는데.
도경수의 앞에서 세훈이 손을 잡아와도 도경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가 시킨 일을 내가 망쳤다는 그것 하나 때문인지 도경수는 도저히 나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세훈과 맞잡은 손을 보면서도 도경수는 질투를 느끼지 않았다. 질투? 그저 웃기다는 눈빛이었다. 김종인. 네가 어디서. 도경수를 피하고 싶었다. 더 이상 힘들어지기 싫었다. 도경수를 피해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도경수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보던가. 한 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제게 무너지고 마는 날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훈은 그런 날 따라서 같은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해맑게 그 소식을 전하는 세훈에게 화를 냈다. 무슨 생각이냐고. 화를 내며 소리 지르는 나를 쳐다보는 세훈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그래도 네가 좋으니까 상관 없어. 숨이 탁 막혀왔다. 결국 세훈과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중학교 졸업식 때 도경수는 김준면과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도경수의 웃는 모습은 이미 나를 지운 듯 했다. 그런 도경수의 모습을 보는 내게 세훈이 손을 잡아왔다. 종인아.
" 내가 있잖아. "
* 백현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도 같이 가고 손도 잡아봤다. 도경수와 손을 잡지 못해 마음 졸이며 잠을 설칠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백현과 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을 놓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체온이 손에 길게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웃어보였다. 도경수 따위는 생각 나지도 않았다. 그딴 싸이코 새끼. 다만 세훈의 불안한 듯한 낯빛이 기억 끝에 아른거렸다.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던 세훈은 결국 내 뺨까지 때리고 말았다. 차악―. 공기를 가르며 날라온 손바닥에 헛웃음마저 지었다. 때린 손바닥을 붙잡으며 미안하다 말하는 세훈의 어깨를 밀쳤다. 처음부터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알고 있었으면서 언제까지 연극에 동참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는 강당으로 불러냈다. 마지막이라면서 불러낸 세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끊고 바로 달려나갔다. 비어있는 강당엔 내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금방 올 것 같지는 않아서 준비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세훈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들어오는 것은 백현이었다. 세훈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백현을 보자마자 세훈은 잊어버렸으니까. 차라리 들어왔으면 낫겠다고 생각했다. 백현과 함께인 나를 본다면 마음을 접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세훈은 강당에 오지를 않았다.
집에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백현과 닿은 입술이 감격스러워 손을 들어 더듬었다. 왠지 소녀가 된 기분에 쓰게 웃었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하니까 끝이 없었다. 함께 하는 하루하루가 기분이 좋고 심장이 떨려왔다. 백현에게 전화라도 할까 들었던 핸드폰에는 세훈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 너 아까 불러 놓고, " " 잠깐 만나. " " ……. " " 우리 집으로 와. " " 싫어. " " ……죽을 거야. "
입술을 콱 깨물고 지갑을 챙겨들었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데 백현의 방문이 눈에 걸렸다. 가만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중학교 때도 죽을 거라고 하던 세훈이었다. 급하게 뛰어간 집에서 세훈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 태연한 행태에 기가 찼다. 세훈의 말 한 마디에 바로 뛰어온 내가 한심할 정도였다. 다시 나가려고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 앉아. " " 너 지금 장난 쳐? " " 내가 해달라는 대로 안 해주면, " " ……. " " 죽을 거야. "
하. 숨을 탁 내뱉었다.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현관에 서 문을 바라보고 섰는 날 힐끔 쳐다본 세훈이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조용히 입을 뗀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세훈을 처리할 것을 부탁하는 도경수의 그것과 같았다.
" 그냥 모르는 척만 하면 돼. "
*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눈을 꽉 감았다. 교무실에서 정신 없이 뛰어나온 백현이 발개진 눈으로 내 손목을 꽉 잡아왔다. 손을 들어 볼을 쓰다듬고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왜 울어. 네가 잘 못한 게 아니잖아. 백현에게 끌려가는 내내 심장이 따끔거렸다. 세훈이 그렇게 된 것을 알았다면 김준면도 이렇게 아팠을까.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모르는 척만 해주면 된다고 세훈은 부탁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새벽부터 아프다며 칭얼거리는 세훈을 데리러 일찍 집을 나갔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세훈은 내가 알던 세훈이 아니었다. 내가 구해준 세훈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도경수가 겹쳐보였다. 도경수가 왜.
" 내가 어제 오후 수업 때 그런 짓을 했다고? "
강하게 맞부딪혀오는 시선에 울컥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세훈을 변하게 했나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도경수였나. 나였나.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한 마음이 세훈을 향해 날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다치는 사람은 세훈일 것이다. 부탁한 게 이거였다. 모른 척 해달라는 게 이거였다. 고작 이 따위. 제가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려는 그 모습에 마음이 따끔거렸다. 둘 다 아플 것이다. 난 누구의 손을 들어줘야 하나. 모든 선택권이 나에게 달려 있었다.
" 네가 말해봐. 내가 아닌 거 네가 알 거 아니야. "
그래. 내가 알지. 그렇지만 난 말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얘기하게 되면. 세훈의 눈동자가 날 향했다. 죽을 거야. 그 말이 귀에서 웅웅거렸다. " 그걸 내가, " 더 싸워. 종인아. 도경수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도경수의 목소리와 세훈의 목소리가 날 옭아맸다.
" 내가 어떻게 알아. "
세훈이 웃었다. 도경수가 웃었다.
*
백현이 박찬열과 잤다. 내 눈을 마주하면서 박찬열의 품에 파고드는 백현의 눈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열이 터졌다. 박찬열의 머리칼 속에 파묻힌 백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러뜨리고 싶었다. 조금 놀란 눈빛의 백현을 보고 볼을 더듬었다. 울고 있었다. 끝나지 않고 돌고 도는 우리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도경수와의 관계가 아니었다. 서로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놓지도 못하고 갖지도 못하는 관계가 서러웠다. 그대로 뒤를 돌아 집을 나섰다. 빠르게 걸으면서도 울고 있는 내가 어색했다. 도경수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할 때도, 도경수가 날 외면했을 때도, 세훈이 자살 시도를 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백현 때문에 울었다. 손등으로 눈을 박박 닦았다. 세훈의 현관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가만히 앉아 TV를 보고 있던 세훈의 표정은 죽은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소란스럽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은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았다. 세훈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급하게 들어오는 날 보고 커진 눈이 백현과 같았다.
" 종인아……, 너, " " 그만하자. 오세훈. " 볼을 닦으려 하는 손을 부여잡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너! 소리치는 세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세훈의 양손을 잡고 울었다. 그만 하고 싶었다. 나도 이제 웃고 싶었다. 날 외면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웃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서로를 마음에 품고도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꿈 속에서 도경수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어디서. 졸업식 때 도경수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 너도 지치잖아. " " ……. " "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 " ……. " " 백현이 좋아해…. " 세훈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잡고 있던 양 팔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
마음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주머니에게 하숙집을 나갈 것이란 말을 남겨두고 집을 나왔다. 번쩍 들린 고개가 나를 따라왔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걸음을 옮겼다. 도경수를…, 만나야 했다. 오랜만에 가는 집에 마음은 설레지 않았다. 보충 시작하기 전까지 일주일이 남아 있었지만 담임에게 요구한 것은 2주의 시간이었다. 가서 이것저것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나를 괴롭히는 도경수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집에 도착하자 맞이하는 부모님과 잠시의 인사를 나누고 바로 나왔다. 도경수와 함께였던 중학교 건물에 들어섰다. 고등학교보다 먼저 방학을 했는지 학교는 한산했다. 도경수와 같이 걸었던 교정을 걷는데 도저히 도경수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밤마다 꿈에 나와 날 비웃던 도경수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경수가 좋아하던 화단의 꽃을 봐도 도경수가 어떤 식으로 기뻐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것만이 보였다. 백현은 더운 걸 죽어도 싫어했다.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며칠간은 부모님과 보냈다. 핸드폰도 꺼놓고 가방 안에 넣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집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경수도 세훈도 백현도. 평화롭게 2주가 지나갔다. 정말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냈다. 그리고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벌써 학교에서는 보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학교로 돌아가기 전날 동네에서 머리를 잘랐다. 도경수를 만나서 조금 길었던 머리가 도경수를 만나기 이전의 머리 길이로 돌아갔다. 다시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기분이 묘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점에 들려 문제집들을 샀다. 이전에 쓰던 문제집들에는 온통 백현의 이름만이 쓰여져 있을 뿐이었다. 중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도경수를 아예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빼버리고 싶었다. 도경수가 싫어하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도경수가 좋아하던 담배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에 가서 가방을 챙겼다. 벌써 가냐며 서운하다는 부모님을 향해 웃어보였다. 방학 때 다시 올게요. 불량해졌던 아들을 걱정하고 있던 부모님은 다시 단정해진 아들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역까지 같이 가겠다는 부모님을 말렸다. 혼자 가 볼 데가 있어요.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도경수가 다니는 고등학교 앞에 섰다. 내가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지 않았다면 도경수와 같이 다녔을 학교였다. 만약 같은 학교였다면 난 계속 도경수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까. 제 2의 오세훈을 만들어냈을까. 시원해진 뒷목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김종인? " |